20.08.15 14:18최종 업데이트 20.08.1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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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백선엽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이 서술된다. 하지만,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한국전쟁은 한국·미국 대 북한·중국의 구도로 전개됐다. 중국이 개입하기 전에는 한국·미국 대 북한의 구도였다. 미군 참전 직전까지는 남북한의 대결 구도였다.
 
만약 미국이 개입하기 전에 국군이 무너졌다면, 다음 단계로 갈 것도 없이 인민군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국군의 전력이 전쟁 초기에 대거 와해했기 때문이다. 육군본부가 1963년에 발행한 <유엔군 전사(戰史),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제1집은 이렇게 설명한다.
 
6월 25일 현재 98,000명이었던 한국군은 6월 말에는 22,000명으로 보고받고 있었고, 수일 후에는 6 및 8사단 병력을 합하여 54,000명이 되었다. 제6사단과 제8사단을 제외한 전 부대는 최초 공격을 받아 와해되었으며 반격 작전 능력은 전혀 없었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미군 참전 이전에 인민군이 좀 더 빨리 움직였다면 전쟁이 조기에 끝났을 수도 있다. 인민군 역시 미군 참전 이전에 대세를 결정짓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미 육군 제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것은 7월 1일이고, 이 부대가 경기도 평택과 안성에 진지를 편성한 것은 7월 2일 밤이다. 인민군은 단 사흘 만인 6월 28일 서울을 함락했다. 이 기세로 몰아붙였다면 미군 개입 이전에 전쟁 양상이 달라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인민군 남하 막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

그런데 인민군이 신속히 진격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있었던 것이다. 6월 28일 서울과 한강 이북을 점령한 인민군이 그 이남으로 진격한 것은 7월 3일이다. 미군이 평택과 안성에서 대비 태세를 갖춘 다음에야 한강을 넘었던 것이다.
 
단 3일 만에 한강 이북을 점령한 인민군이 5일간이나 한강 이북에 묶인 것은 한강선 방어전투를 수행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시흥사) 때문이었다. 6월 28일까지만 해도 육군참모학교 교장이었던 김홍일 소장(1898~1980)이 시흥사의 지휘관이었다.
 
그간 한국에서는 백선엽의 역할만 부각됐을 뿐, 김홍일의 역할은 거의 평가되지 않았다. 하지만 6·25 때 실제 벌어진 상황을 보면, 김홍일보다 백선엽이 더 부각돼 있는 현실이 상당히 불공정하다는 판단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김홍일.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야전부대 지휘관도 아닌 참모학교 교장이 시흥사를 맡게 된 것은 6월 25일부터 단 3일 사이에 국군의 시스템이 대거 손상됐기 때문이다. 가장 절실한 한강선 방어를 '교장 선생님'에게 맡겨야 할 만큼 국군의 처지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홍일은 교육 및 기획 능력 못지않게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21세 때인 1919년 중국으로 가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와 소련에서 항일전투에 참여했다. 또 장개석(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에 참가해 참모장 등을 역임했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서도 교관으로 활약했다. 또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광복군에도 참가했다. 1945년 5월에는 한국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했다.
 
김홍일은 항일투쟁의 기념비적 사건에도 가담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의 숨은 공신이 바로 그였다. 윤봉길이 던진 '도시락 폭탄'이 그의 손을 거쳤던 것이다. 독립투사 정정화의 회고록 <장강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시 중국 중앙군에는 한인 군관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중에 가장 직위도 높으며 중국의 실권자인 장개석의 개인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사람은 중국군에서 왕웅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김홍일이었다.
 
그는 상해의 조병창에서도 근무했는데,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의 성능 때문에 왜황을 죽이는 데 실패하자, 백범은 그에게 특제 폭탄을 비밀리에 제조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 결과 물통 모양과 도시락 모양으로 된 특제 폭탄 수십 개가 만들어졌고, 홍구(홍커우) 공원의 의거 때는 고성능의 폭탄을 사용하여 왜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사열대를 단숨에 날려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국군이 사실상 와해된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 방어선을 맡은 장군은 독립군 출신이었다. 국군 상층부를 장악한 친일파들이 뒤로 물러나고 이때는 독립군 출신이 국군의 운명을 책임졌던 것이다.
 
김홍일이 지휘하는 시흥사는 형식적으로는 사단급 부대였지만, 실제 보유한 전력은 그에 훨씬 못 미쳤다. 그나마도 이 부대는 급조된 부대였다. 한강 이북에서 후퇴하는 병력을 수습해서 조직한 부대였다. 패잔병들로 구성된 부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다.

소규모 소총부대로 사기충천한 인민군에 맞서

국방부 군사(軍史)편찬연구소가 2016년 6월 발행한 <군사> 제99호에 수록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동원 연구원의 논문 '6·25전쟁 초기 김홍일의 활동과 예편'은 이렇게 설명한다.
 
시흥사는 (6월) 29일까지 예하 혼성사단으로 진지 배치를 일단 완료하였으나, 혼성사단은 이름만 사단이지 병력은 1개 연대 규모에 불과했고, 그나마 보유하고 있는 공용화기란 연대당 고작 박격포 2~3문, 기관총 5~6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소총부대 수준이었다.
 
소규모 소총부대 정도의 병력을 갖고도 김홍일은 사기충천한 인민군과 대결했다. 그 상태로 7월 3일까지 인민군 주력을 묶어놓았다. 시흥사와 김홍일의 놀라운 전투력은 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서도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위의 이동원 논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라주바예프는 6월 30일부터 7월 1일 사이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면서 "적의 조직적인 소총과 기관총 사격 및 포격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고 말했다. 6월 28일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7월 3일까지도 한강 여의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시흥사의 놀라운 전투력 때문이었다.
 
서울 함락 당시만 해도 국군은 사실상 궤멸돼 있었다. 이랬던 군대가 김홍일의 지휘를 받자마자 놀라운 전투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에서 인민군 대군을 5일간이나 저지했다. 지휘관의 능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상황이다. 1964년에 <사상계> 제138호에 기고한 '나의 6·25 서전(緖戰) 회고 - 한강방어작전에서 평택 국군 재편성까지'에서 김홍일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동원 논문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한다.
 
나는 결사적 결의로써, 후방 보급이 되지 않아 병사들과 같이 주먹밥에 소금물을 마시면서 삼일삼야 한잠도 자지 못하고 부하들을 고무 격려하면서 장병들의 애국심에 힘입어 참으로 기적적이고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
 
한강선 방어전투가 상당부분을 김홍일의 개인 역량에 의존했다는 점은 국방부가 발행한 책에서도 확인된다. 1987년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전쟁>은 이렇게 설명한다.
 
어려운 전세 하에서 한강방어를 위해 편성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지휘하게 된 김홍일 소장은 무엇보다도 먼저 장병의 침체된 사기를 되살려야 한다는 판단 아래 2, 3일 동안 굶주린 장병들에게 우선 급식을 제공하고 '미군 참전'이라고 크게 쓴 간판 수십 개를 만들어 길목마다 세우게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도 미군의 참전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으나, 철수 중인 병력들에게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김홍일의 역할은 '남북한의 대결 구도'가 '한국·미국 대 북한의 대결 구도'로 바뀔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었다. 미군이 방어태세를 갖춘 뒤인 7월 3일, 김홍일은 한강 방어선을 포기하고 후퇴했다. 그날 인민군은 대규모 한강 도하를 개시했다. 너무 뒤늦은 도하였다.
   

1950. 9. 부산. 미군들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고자 거물 망을 타고 군함에 승선하고 있다. ⓒ 맥아더기념관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백선엽이 아니라 김홍일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전공을 세운 데 반해, 김홍일은 미군이 없는 상태에서 인민군을 묶어놓았다. 김홍일이 없었다면, 미군의 참전이 '뒤늦은 참전'이 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김홍일이 있었기에 인민군의 도하가 '뒤늦은 도하'가 되고 말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백선엽이 받는 찬사의 상당부분은 실은 김홍일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김홍일에게 돌아가야 할 찬사를 상당부분 차지했을 뿐 아니라 김홍일의 활동에도 적지 않은 지장을 주었다. 서울이 함락되기 전날인 6월 27일 오후,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참모총장)은 '문산지구 제1사단장인 백선엽 대령의 작전을 지도하라'는 명령을 김홍일 소장에게 내렸다.
 
이에 따라 김홍일 소장은 백선엽 대령의 전투 상황을 관찰했고, 백선엽 부대가 적의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다는 직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백선엽에게 신속히 후퇴해 한강 방어에 주력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백선엽은 지시를 거부했다. 자기는 그런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총참모장이 김홍일에게 부여한 권한이 백선엽에 대한 지휘권이 아니라 작전 지도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지만, 백선엽의 지시 거부는 전쟁 초반에 국군의 전력 손실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됐다.
 
위의 회고록에서 김홍일은 "백 사단장은 '사수하라는 명령만을 받고 있는데 어떻게 독단으로 후퇴하겠는가'고 결심을 내리지 못하였다. 사단장 이상의 대부대장은 이런 때의 독단 전행(專行)이 필요하거늘 이를 이해치 못하니 가탄할 일"이라고 백선엽의 전략적 판단 능력 부족을 한탄했다.

만주군 출신들에게 밀려 전쟁 중에 2선으로 
 
백선엽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다. 만주군 출신인 백선엽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김홍일은 한강 방어선 전투의 공을 인정받아 제1군단장이 된 뒤에도 만주군 출신들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9월 1일 김홍일은 만주군 출신들에게 밀려 야전 지휘관에서 물러났다.
 
낙동강 방어전투가 한창이던 그날, 김홍일은 제1군단장에서 육군종합학교 교장으로 전임됐다.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던 장군이 전쟁 중에 갑자기 2선으로 밀려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동원 논문은 정일권 같은 만주군 출신들을 부각시켜 군부 장악력을 높이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계획과 더불어, 김홍일이 작전 수행 과정에서 미군과 마찰을 빚은 것이 김홍일의 2선 퇴진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이렇게 일선 지휘관에서 물러난 김홍일은 전쟁이 한창 때인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되고 말았다. 이승만은 물러나는 그를 '오성장군'으로 치켜세웠다. 중국군 소장으로 퇴역한 경력과 국군 중장으로 퇴역한 경력을 합쳐 그렇게 불러준 것이다.
 
하지만 그의 6·25 전공은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했다. 백선엽의 전공이 과도하게 치켜세워진 데 반해 김홍일의 전공은 과도하게 저평가됐다. 이동원 논문은 "6·25 전쟁기 한국군 지휘관으로서 그 역할과 성취에 비해 가장 저평가된 인물을 꼽는다면 김홍일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홍일의 지시를 거부하며 국군의 전력 손실을 확대시킨 백선엽은 최고의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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