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 20:45최종 업데이트 20.08.09 20:49
  • 본문듣기
코로나 사태만으로도 징그러운데 비까지 연일 쏟아지니 평상심을 유지하기 어렵다. 습관처럼 컴퓨터 책상에 앉아 멍한 표정으로 유튜브 영상을 뒤적거렸다. 무슨 알고리즘에 의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안정환 출연 회차 영상이 뜨기에 한참을 낄낄대며 보았다.

축구도 잘하고, 얼굴도 잘생기고, 입담도 최고고, 돈도 잘 벌고, 아무튼 다 가졌구나. 그러다가 뜬금없이 요한 세바스챤 바흐의 B단조 미사 중 마지막 곡 'Dona nobis pacem'(평화를 주소서)이 듣고 싶어진다. 내 두뇌지만 알고리즘 참 희한하네. 인과관계의 부스러기조차 찾기 어려운 사고의 비약 아닌가. 모든 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다.
 
이렇게 비가 줄기차게 내리는 날엔 대체로 파전에 막걸리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파전이란 무엇인가? 표면은 아삭아삭 부서질 정도로 프라이팬에 제대로 부쳤고, 내부는 향긋하고 두툼한 파줄기를 골조 삼아 부드럽고 쫀득한 밀가루 반죽이 살집을 형성한 물질이다.

거기에 시큼하면서도 시원달큰한 막거리를 곁들이면, 강우로 인한 양이온 증가의 영향으로 널뛰던 뇌파가 진정된다. 그러나,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비올 때마다 매번 이런 스테로이드 처방이 내려진다면 뇌도 적응하기 마련이다.
 
문화의 발전이란 구태의연한 관습과 결별하는 과정이다. 비 온다고 언제까지 막걸리에 파전으로 만족할 텐가. 우리 식문화의 발전을 위해 직접 임상 체험한 와인 처방전 세 가지를 준비했다.
 
미켈레 끼아를로 가비 '레 마르네'
Michele Chiarlo Gavi 'Le Marne

 
해물과 잘 어울리는 상큼한 이탈리아 화이트 와인이다. 미켈레 끼아를로(Michele Chiarlo)는 와인 제조사, 가비(Gavi)는 와인에 사용된 포도 품종 코르테세가 재배된 마을, 레 마르네(Le Marne)는 제품명이다. 마트에서 2만 원대 중반에 구입 가능한데 해외 거래가와 차이가 없어 매우 은혜로운 가격이다.

 

미켈레 끼아를로 가비 '레 마르네' (Michele Chiarlo Gavi 'Le Marne'} ⓒ 고정미

 

(좌)미켈레 끼아를로 가비 ‘레 마르네’ (우)감바스 알 아히요 이 와인과 감바스 알 아히요에 곁들이면 막걸리와 파전 생각이 순식간에 삭제된다. ⓒ 임승수

   
이 와인을 '감바스 알 아히요'에 곁들이면 막걸리와 파전 생각이 순식간에 삭제된다. 비 올 때는 매콤한 음식이 당기는 경우가 많은데, 알다시피 감바스 알 아히요는 새우·마늘·고추 등을 올리브유에 튀기듯 구워낸 요리다.

새우 특유의 짭조름하고 탱글탱글한 질감에 마늘과 고추의 매콤한 풍미를 한껏 품은 진득한 올리브유가 코팅되니, 굳이 맛있다고 공들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올리브유에 목욕 중인 새우 한 점을 집어서 입에 넣고 씹어보면, 언어란 것이 맛 하나를 표현하는 데에도 얼마나 부족한 도구인지 절감한다. 정말 맛있는데, 어떻게 표현할 말이 없네.
 
수차례의 저작 운동 후 식도로 넘겼지만 구강에는 여전히 올리브유에 버무려진 마늘, 고추, 새우 잔류물이 존재한다. 이걸 깔끔하게 처리하기 위해 시원하게 칠링된 미켈레 끼아를로 가비 레 마르네를 한모금 들이킨다. 마늘과 고추로 달아오르고 올리브유로 느끼한 입안을 상큼한 과일향의 노란빛 액체로 시원하게 씻겨낸다.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 시설의 미끄럼틀을 한달음에 내려오는 후련함을 미각으로 체험한다. 그나저나 감바스 알 아히요, 귀찮아서 어떻게 만드냐고? 배달앱이 있지 않은가. 나도 인근 이탈리아 음식점에서 배달로 받았다.
 
디디에 쇼팽 브뤼
Didier Chopin Brut

 
비오는 날 국물 음식은 올바르다. 소고기, 배추, 깻잎 등을 켜켜이 쌓아 버섯과 함께 가다랭이 국물에 푹 끓인 밀푀유나베는 더욱 올바르다. 이런 국물 음식에는 소주를 곁들이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기포가 송송송 올라오는 꼬릿한 효모 풍미의 샴페인이라면 밀푀유나베와도 근사한 매칭이 가능하다. 와인은 국물 음식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던데, 내가 직접 임상 체험을 했으니 믿어달라. 국물과 와인을 한데 섞어서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맛만 좋더구먼.

 

디디에 쇼팽 브뤼 (Didier Chopin Brut) ⓒ 고정미

 

(좌)디디에 쇼팽 브뤼 (우) 밀푀유나베 이 샴페인과 밀푀유나베를 곁들이면 오케스트라와 독주악기로 구성된 협주곡이 음식의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 임승수

   
샴페인은 대체로 비싸서 선뜻 손이 안 가는데, 얼마 전 이마트 영등포점에서 3만4800원에 구입한 디디에 쇼팽 브뤼는 품질과 가성비 모두 매우 뛰어나다. 디디에 쇼팽(Didier Chopin)은 와인 제조사, 브뤼(Brut)는 달지 않은 스파클링 와인을 뜻한다.

3만 원대 언저리 샴페인 중에 간혹 기포가 부실하고 맛도 거친 놈도 있는데, 디디에 쇼팽 브뤼는 기포 방울이 잘고 꾸준히 올라오며, 풍미도 그 가격대 여타 샴페인보다 부드럽고 세련되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밀푀유나베 역시 집에서 직접 만들 필요가 없다. 은박지 냄비에 내용물을 담아 끓이기만 하면 되는 형태로 마트나 백화점에서 판매한다. 포장을 뜯어내어 충분히 끓인 후, 가다랭이 국물에 푹 익은 소고기, 배추, 깻잎의 퇴적층을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문다.

심심하고 담백한 가다랭이 국물, 향긋한 깻잎 내음, 적당히 부드러워진 배추, 소고기의 육질감이 오케스트라의 총주처럼 입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진다. 그 뒤에 적절한 타이밍으로 독주 악기처럼 디디에 쇼핑 브뤼가 등장하면, 오케스트라와 독주악기로 구성된 협주곡이 음식의 세계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하인드사이트 카베르네 소비뇽 나파밸리
Hindsight Cabernet Sauvignon Napa Valley

 
기분이 차분하거나 살짝 가라앉을 때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1954년작 <길>(La Strada)이다. 워낙 명작이라 구구절절 내용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 목적의 글도 아니고, 어차피 술 얘기 아닌가. 이런 류의 여운 깊은 흑백영화에는 꼭 겹쳐서 떠오르는 와인이 있다.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인이다.

 

하인드사이트 카베르네 소비뇽 나파밸리 (Hindsight Cabernet Sauvignon Napa Valley) ⓒ 고정미

 

(좌)하인드사이트 카베르네 소비뇽 나파밸리 (우)영화 <길> 나파밸리 와인 특유의 정직하게 뿜어 나오는 연유 품은 에스프레스 향기가, 비애감 젖은 아득한 정취의 흑백영화 모노톤과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 임승수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는 밤. IPTV에서 990원에 7일 대여로 <길>을 감상한다면 옆에 이 와인을 놓고 조각 치즈와 함께 마시고 싶다. 바로 하인드사이트 카베르네 소비뇽 나파밸리다.

하인드사이트(Hindsight)는 와인 제조사,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포도 품종, 나파밸리(Napa Valley)는 와인 산지다. 나파밸리 와인 특유의 정직하게 뿜어 나오는 연유 품은 에스프레스 향기가, 비애감 젖은 아득한 정취의 흑백영화 모노톤과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 그렇다면 다른 나파밸리 와인도 많은데 왜 하필 이 와인이냐고?
 
뭐 딴 거 있겠나. 가성비다. 최고의 와인 산지로 꼽히는 나파밸리의 와인은 비싸다. 괜찮다 싶으면 십만 원은 우습게 넘어간다. 그런데 이 와인은 3만 원대 중반의 가격에 마트에서 구입했다. 그렇다고 맛이 처지는 것도 아니다.

나름 나파밸리 와인에 빠졌던 시절에 저가, 중가, 고가로 다양하게 마셔본 편인데, 저렴한 나파밸리 와인 중에서는 하인드사이트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국 판매가가 미국과 비슷하니, 가격 또한 바람직하다. 그런데 의외로 와인 애호가들도 이 와인을 잘 모르더라.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수입이 안 되어 마트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간혹 재고를 파는 곳이 있던데, 보이면 무조건 구입하시라. 이만한 가성비의 나파밸리 와인은 드물다. 꼭 다시 수입해서 판매했으면 하는 와인이다.
 
그나저나 이 글이 기사로 나갈 즈음에는 제발 장마가 멈춰 있기를 바란다. 기록적인 폭우로 힘든 상황을 겪는 분들의 소식을 접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진심 기청제(祈晴祭)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다. 장마 끝났는데 무슨 비 올 때 마시는 와인 추천이냐는 핀잔 들어도 좋다. 하루빨리 그만 내리기를.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