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3 20:24최종 업데이트 20.09.28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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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글이 넘치는 시대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으로 뉴스를 읽고, 출근에서 메일링 서비스로 받은 글을 본다. 글을 상품처럼 배송해주는 플랫폼은 계속 생겨나고, 한 해에 나오는 책의 총 출간 권수도 기록적이다. 정말 우리는 언어와 가까워진 걸까?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에 따라 사고가 확장되고, 단어에 따라 생각하는 게 달라지며,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분위기도 바뀐다. 국어운동을 하는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에서 국어를 잘 가꾸고 다듬어 쓰자고 주장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7월 말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사무실 벽에는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 ⓒ 이희훈

 
'배리어프리' 대신 '무장벽 시설'

- 한글문화연대는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시는데요. 그 말에 담긴 철학이 궁금합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신 이유가 백성들이 제 뜻을 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잖아요. 지금으로 생각하면 국민들의 알 권리를 보장해주고 싶으셨던 거죠.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서서 국민의 알 권리를 뒷받침해주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쓰는 언어, 언론에서 쓰는 언어들 중에 어려운 말이 많습니다. 대개 외국어인데요. 그런 언어 때문에 국민이 알 권리를 침해당합니다.

예를 들면 장애인을 위한 시설인데 영어로 배리어프리(Barrier-Free)라고 한단 말이죠? 장애인은 아무래도 비장애인보다 외국어를 배우는 게 오래 걸리고 기회도 적습니다. 그런데 '무장벽 시설'이라는 말을 영어로 쓰면 되겠습니까? 정부에서 쓰는 말은 생활 대부분을 좌우해요. 언어를 어렵게 하면 국민의 정치 참여도 어려워집니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이니까 영어도 괜찮다, 이렇게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언어 안에 권리와 의무가 녹아 있으니까요."

- 정부의 언어가 부적절했던 사례를 들자면?

"저희 한글문화연대가 '스크린도어'라는 말을 '안전문'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스크린도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사고는 그렇게 나는 겁니다. 예전에 구의역에서 안전문 수리하던 비정규직 직원이 죽었잖아요. 그런 말을 '스크린 도어 수리하던 김군이 죽었다'가 아니라 '안전문을 수리하던 김군이 안전문의 문제점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게 문제의 심각성을 더 드러내거든요."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 ⓒ 이희훈

 
이외에도 한글문화연대의 요청으로 지하철 역에 있는 '자동제세동기'라는 장비 이름도 '자동심장충격기'로 바뀌었다. 

- 한글문화연대는 또 어떤 활동을 하나요?

"한글문화연대는 국어운동을 하는 거의 유일한 시민단체인데요. 국어를 잘 가꾸고 잘 다듬어 쓰자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였어요. 특히 공공언어 분야의 외국어 남용에 맞서서 개선활동을 하고 있어요.

저희가 하는 활동 중에 '우리말가꿈이'라는 대학생 연합 동아리를 키우는 게 있어요. 그들이 최근에는 'Kiss & Ride(키스 앤 라이드)'라는 말을 바꾸라고 정부에 요청했는데요, 그 말이 '환승정차구역'이라는 뜻이래요. 용인시 동천역, 수원 광교 중앙역, 여주 세종대왕릉 앞에도 그런 안내판이 있었어요. 우리말가꿈이 대학생들과 저희가 요청해서 지금은 바뀌었죠."
 

세종대왕릉역 '키스&라이드' 표지판 수정 전과 후. 영문 '키스&라이드'에서 쉬운 우리말인 '임시정차구역'으로 바뀌었다. ⓒ 한글문화연대

  

세종대왕릉역 '키스&라이드' 표지판 수정 전과 후. 영문 '키스&라이드'에서 쉬운 우리말인 '임시정차구역'으로 바뀌었다. ⓒ 한글문화연대

  
- 우리말 운동이 사회운동이기도 한 것 같네요.

"생활 속에 민주주의 운동이라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언어를 지킨다는 게 문화를 지키는 것과 연관이 있어요. 언어를 지킨다고 해서 사투리 쓰지 말자, 맞춤법 지키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쓸데없이 외국어 쓰지 말고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생각입니다. 물론 외국어를 써야 할 때는 써야죠. 그걸 뭐라 할 수는 없어요. 핵심은, 공공영역에서는 한국인이라면 한국의 공용어인 한국어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표준어, 맞춤법 이런 거에 너무 집착해요. 국가가 정해주는 표준만 가지고 생활하려고 해요. 그러다 보니 국가가 언어 문제에 대해 표준 정하고 규범 정하고 이것저것 다 관여하게 됩니다. 민간인들이 만드는 말, 학계나 각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말도 인정해줘야 해요. 사람들이 쓰다 보면 사전에 올라가는 거죠. 우리는 그런 점에서 창의력과 재주가 부족해요. 우리말을 만드는 재주요. 그러니 그냥 외국어를 가져다 쓰는 거죠. 어린애들이 말 만드는 거 가지고 칭찬은 못해줄망정 소통이 안 된다고 하고 욕할 일이 아니랍니다."

이건범 대표는 의외로 새롭게 만들어지는 말들을 칭찬해주고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말들이 다 칭찬받아야 마땅할 언어는 아닌 경우도 있다.

"가부장적인 가족 호칭, 맨 마지막에 바뀔 듯"
 

한글문화연대 이건범 대표 ⓒ 이희훈

 
- 때로는 우리말을 그대로 쓰면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단어를 쓰게 되기 때문에 영어를 쓰는 경우도 있는 듯해요. 성소수자나 젠더 이슈, 가족 관계를 일컫는 호칭 문제에서 그런 면이 있죠.

"그렇죠. 그런데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를 오랫동안 살아와서 바꾸기 힘들어요. 양가가 평등하게 바꿔야겠지만요, 이제까지 여성들 사이에 위계 서열 같은 것도 남성 위주로 정해졌잖아요. 자기보다 열 살 아래인 동서도 윗동서니까 형님이라고 해야 하고요. 고쳐야죠. 그런데 가족들이 자주 만나지 않기 때문에 힘들죠.

(그런 건 정부에서 해주면 되지 않을까요?) 쉽지 않아요. 정부에서 대안어를 제시해줄 수는 있겠지만 가족들이 자주 만나지 않기 때문에 호칭을 바꾸기가 쉽지 않죠. 제일 마지막에 바뀌는 호칭일 것 같아요. 자주 만나는 관계, 직장 호칭 바꾸는 게 더 쉽죠. 직함을 아예 안 부르고 이름 부르는 회사도 요즘에는 많잖아요."

- 한자어를 남용하지 말자는 주장도 하고 계신 걸로 압니다. 우리말을 가꾸는 일이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시각 장애인들의 한자어를 인식하기 어려운 점을 말씀해주셨는데요.

"한자를 모른다고 해서 낱말 뜻을 모르지는 않거든요. 한자의 훈을 알면 뜻이 잘 풀리는 말들이 있지만, 대부분은 필요가 없어요. 낱말이 의미를 획득한다는 게 꼭 한자를 풀어서 숨어 있는 뜻을 다 파악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전에 공문서에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게 해달라, 국어기본법 제14조 1항이 위헌이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며 운동을 한 분들이 있었는데요. 그 분들은 한자로 쓰지 않으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다고 주장해요. 그런데 그런 주장을 담은 문서에서조차 한자가 필요 없었어요. 제가 시각장애인이라 한자뿐만 아니라 한글도 읽을 수 없어서 그걸 몽땅 소리로 바꾸어 들었거든요. 소리에 한자가 어딨고 한글이 어디 있습니까? 그 소리만 듣고도 다 이해할 수 있었으니, 굳이 한자로 적지 않아도 사실은 그 뜻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셈이죠.

그리고 한자어에 뜻이 다 담겨있는 줄 아는데 한자 훈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낱말이 훨씬 많아요. 예를 들어 '헌법(憲法)'은 '법 헌'에 '법 법'인지라 그저 동어반복이지 무슨 뜻을 설명해주지 못하거든요. '비난(非難)'은 '아닐 비'에 '어려울 난'인데, 이게 사람 욕하는 비난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게 다 한자에 대해 잘못 알려진 미신이죠. 한자어들 가운데 구성 한자의 훈으로 낱말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건 33% 남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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