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6 11:56최종 업데이트 20.08.10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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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콩학자 정규화 그는 평생 우리 산하에서 7000여종의 야생콩을 모았다. ⓒ 민병래

 
정규화는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아파트를 나섰다. 경비 할아버지가 인사를 먼저 건네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지금 농사지시는 것 같은데, 나도 오래 농사졌어요. 인자 나이도 자셨는데 차라리 경비 일이 어때요? 제 아들이 시내에서 오락실을 하는데 낮에 관리해줄 착실한 분이 필요하대요. 하루 대여섯 시간 일하고 백만 원 넘게 줄 모양이던데..." 

매일 밭에서 일하니 정규화의 몰골은 영락없는 주름투성이 농사꾼 그대로다. 게다가 고무신에 밀짚모자 차림이고 차는 14년이나 된 SM5이니 누가 그를 전남대학교 석좌교수로 보겠는가? 그를 딱하게 본 경비의 권유였다. 

전남대 농대 교수인 그는 연구실이 아닌 들과 밭에서 우리 야생콩 채집과 연구로 한평생을 고단하게 보냈다. 2005년 미국국립대두연구센터에 1년 방문교수로 갔을 때 일이다. 센터의 종자관리 책임자이며 미 농무성 고위 관리인 넬슨은 정규화가 25년간 수집한 한국의 야생콩을 미국으로 가져와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정규화는 그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넬슨은 뜻밖이라는 태도였다. 정규화의 거부에 그는 빈 커피잔을 몇 번이나 들이키더니 뭔가 생각난 듯 부리나케 자기 사무실로 가서 '리스트'를 가져왔다. 그는 "당신에게만 보여주는 거"라면서 사람 이름을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한국의 저명한 콩 학자들이, 미국의 고위 관리인 넬슨에게, 어떤 계통의 야생콩을 가져다 주었는지 또렷히 적혀있었다. 학회에서는 "우리 야생콩 종자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역설하던 교수들이었다. 그들이 대국에 진상하듯 넬슨에게 콩 종자를 바쳤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물론 그 마음도 이해는 됐다. 넬슨과 공동연구를 하면 연구비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을 업고 학문적 명성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넬슨은 정규화가 1년 기한 방문교수를 마치고 출국할 때까지도, 그리고 이후 국제학회에서 만날 때마다 정규화가 보유한 한국 야생콩 종자에 집착을 보였다. 

현재 미국은 20,108점의 재배콩 종자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과 함께 세계 최대 수준이다. 문제는 원시유전자원이 담겨있는 야생콩 종자가 1,181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는 GM(유전자 변형) 기술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다. 유전자 편집을 하려 해도 좋은 유전자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특히 재배식물은 생육 환경이나 기후보다 품종에 더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콩자원의 최고책임자인 넬슨은 정규화의 유전자원에 욕심을 냈다. 나중에 넬슨은 미 농무성을 통해 한국 정부에 압력성 요청을 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알아서 결정해라"라는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세계 2위의 종자회사의 수십억 제안

2012년에도 정규화에게 특별한 제안이 왔다. 상대는 몬산토에 이어 세계 2위의 종자회사인 '파이오니어'였다. 그가 보유한 야생콩 중 병충해 저항성이 큰 종자를 선택해 같이 품종개량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국은 세계 최대 콩 생산국이었지만 '녹병(곰팡이병)' 때문에 생산량이 6%나 감소하고 있었다. 파이오니어는 녹병 퇴치를 위한 종자 개발을 제안하면서 정규화에게 로얄티도 내걸었다. 종자 판매량에 따라 수억에서 수입억 원이 보장되는 제안이었다.

정규화는 당시 폐차 직전, 주행거리가 30만km가 넘은 세피아를 타고 종자를 수집하러 다녔고 연구실 자금은 진작에 바닥났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는 제자들과 종자수집을 하며 "개인적 부를 위해 씨를 팔지 않겠다"는 약속을 늘 했다. 돌콩 하나마다 제자들의 발품과 땀방울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파이오니어가 종자를 개발하면 당연히 특허를 낼 것이고 그러면 우리 농민들은 돈을 내고 한국 토종 종자를 사야 한다. 손에 쥐어지는 수십억 돈보다 제자들과의 약속, 우리 땅이 보존한 야생콩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그래서 파이오니어의 제안을 거절했다.
   

진주남강변 콩밭에서 그는 여기서 해마다 야생콩 종자보존작업과 연구작업을 하고 있다 ⓒ 민병래

   
야생콩을 찾아서 섬으로 섬으로
 
농사꾼의 아들 정규화. 그는 195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경상대 농대를 졸업하고 영어교사로 재직하다 대학 강단에 선 후배들을 보고 자극받았다. 그래서 뒤늦게 전남대에서 콩에 관한 유전학을 공부하며 83년부터 88년까지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1983년부터 초기 2년은 주로 재배 콩 종자를 다양하게 수집했다. 야생콩에서 육종된 재배콩은 여러 세대에 걸쳐 맛을 높이거나 소출이 많은 쪽으로 개량돼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유전적 특성은 약해지거나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정규화는 원시유전자원을 풍부하게 지닌 야생콩이나 돌콩에 주목했다. 야생콩 종자가 많을수록 더 다양한 재배콩, 더욱 풍부한 신품종을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야생콩의 수집이었다. 당시에는 GM 작물 연구가 붐을 이루었고 유전자편집기술이 정교해지면서 생명공학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GM작물연구가 연구실적 발표나 연구비 확보 등 모든 면에서 유리했기에 연구자들도 실험실에만 머물려 했다. 
 
이런 풍토에서 정규화는 야생콩 수집과 원시유전자원 연구에 나섰다. 남들이 안하고 꺼려하는 게 외려 정규화의 DNA를 자극했다. 다행히도 전라남도 일대 섬들은 각각의 특성을 지닌 야생콩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정규화는 학생들과 함께 전라남도의 섬들을 하나씩 훑어나갔다.
 
연구실 제자들의 고생이 심했다. 산길을 정처 없이 헤매다 길을 잃기도 했다. 여객선 항로가 없는 무인도도 무시로 다녀야 했다. 배를 전세 내야 했고 풍랑이 높으면 데리러 갈 배가 뜰 수 없어 먹을 것 잘 곳 없는 섬에서 생라면으로 버티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배가 뜨면 세수도 못한 거지 꼴로 콩이 든 자루를 들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문제는 비용이었다. 야생콩 수집은 당장 돈이 안 되니 학교는 연구비 지원에 인색했다. 또 콩 자급률이 10% 미만이니 정부도 "콩은 그냥 수입하자"는 식이었다.
 
학생들 2~3명 짝 지어 무인도로 보내면 최소 2백만 원 정도가 든다. 배를 빌리는 비용도 들고 학생들에게도 최저임금을 챙겨줘야 했다. 또 콩 종자를 받을 수 있는 시기는 적당히 여물어 터지기 전인 11월 초 2주간뿐이었다. 이 시기에 여러 팀을 꾸려 전국 각지로 보내다 보니 한달 사이에 수천만 원이 들어갔다. 그렇다고 꼭 성과가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학생도 부지기수였다.
 

정규화와 파키스탄 제자 Adil Zahoor 여러 나라에서 공동연구와 학습을 위해 진주 콩밭을 오간다. ⓒ 민병래

 
이 모든 비용을 정규화가 혼자서 감당했다. 교수 연봉이 적지는 않지만 그의 월급 봉투는 전라남도의 무인도와 우리 산하의 이름 없는 길로 향했다. 다행히 아내가 교사여서 생계는 꾸려갈 만했다. 그렇게 35년을 모은 종자가 이제는 미국이나 중국 정부차원에서 모은 것(6000여 종)보다 많다. 세계 최대 수준이다. 
 
"고생을 사서 해요"

콩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때도 있었다. 2001년인가, 11월 초 어느날 여수 전남대 캠퍼스에서 오전 강의를 마친 정규화는 남해안으로 내달렸다. 야생콩의 씨를 받아내는 2주는 하루하루가 한달과 다를 바 없이 소중했다. 

그렇게 남해안 해안가를 헤집듯이 다녔지만 그날따라 소득이 없었다. 마침 급히 꺾여 돌아가는 해안도로에서 정규화는 매의 눈으로 씨를 발견했다. 수십 년을 하다 보니 좁쌀만한 종자를 운전하면서도 집어낼 수 있었다. 서둘러 주차하고 그는 비탈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어어, 에구" 그는 비탈길 두 걸음에 엉덩방아를 찧고 미끄러졌다. 낮에 내린 비 때문에 풀섶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비탈에서 절벽으로 꺾이는 목에서야 정규화는 가까스로 소나무를 잡아챘다. 아래는 열길 넘는 절벽이 파도에 몸을 떨고 있었다. 정규화는 겨우 중심을 잡고 조심스레 몸을 세웠다. 비탈 가운데에 돌무지 쪽으로 잔가지를 잡고 기어올라갔다.

오르던 그가 멈칫했다. 아, 종자를 안 받았네. 그는 다시 뒷걸음쳐서 소나무 앞에 있는 콩씨를 손으로 훑어 비닐 팩에 넣고 다시 돌더미 쪽으로 기어올랐다. 11월 한기에 남해 세찬 바람까지 더해졌지만 얼굴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고생을 사서 해요"라는 아내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정규화의 하루는 들판에서 시작해 들판에서 끝난다. 지리산을 마주하고 진주 남강이 왼쪽으로 흘러가는 천여 평 되는 콩밭이 그의 일터다. 밭 끄트머리에는 컨테이너로 꾸며놓은 간이 연구실과 채집된 종자를 분류하고 감별하는 농막이 있다.
 
정규화는 이 밭에 사방 2m 간격으로 대략 650개 지주대를 세웠다. 여기에 해마다 야생콩 종자를 심어 650계통의 야생 콩씨를 받아내고 있다. 그가 보유한 7000여 종자들을 한 번씩만 받아내려도 10년이 걸리는 작업이다. 더 넓은 밭에서 더 많이 심으면 좋으련만 여력이 없다. 
 

진주남강변의 정규화 이 밭은 제자들이 모아 정규화에게 연구용으로 기증했다. ⓒ 민병래

 
천여 평 밭을 매일 같이 둘러보기만 해도 반나절이 후딱 간다. 요즘 같이 더운 날에는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컨테이너 박스로 돌아오면 다음 일들이 기다린다. 관찰 내용을 기록하고 유전적 특성을 분석해야 한다. 그는 30여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 일을 해왔다.
 
콩은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태어났다
 
최근 중국은 콩의 역사를 바꾸려고 "콩의 원산지는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콩 원산지가 만주와 한반도 일대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고조선과 고구려, 발해를 관통하면서 콩은 길러졌고 우리 민족에게 면면히 내려왔다.

그 어느 시점에 두만강(豆滿江)이라는, 콩이 가득한 혹은 콩을 실은 배가 가득한 강이라는 이름도 지어졌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된장이 혼수품으로 요긴했고 중국에 두부제조기술단이 파견됐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역사이며 중국에 속한 부족의 역사"라고 설파한다. "콩 원산지는 중국"이라는 중국 논문에다 최근에는 일본도 콩 원산지를 주장하고 나섰다. 반면 콩 원산지가 한국임을 입증하는 논문은 하나도 없다. 
 
정규화는 이를 본인의 책임이라며 통감한다. 유전적 자료를 통해 누구보다 더 명확하게 증명할 수 있고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건만 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2020년에는 이를 꼭 써내려 한다. 
 

지주대마다 콩종자 하나를 심는다 콩밭에는 650여개 지주대가 세워져있다. ⓒ 민병래

  
오늘도 밀짚모자에 고무신을 신고 정규화는 진주남강변 콩밭에 선다. 그는 말한다. 콩은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이지만 코로나같은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면역력을 키워주는, 우리가 인류에게 기여할 수 있는 식품이라고, 그래서 콩만큼은 규모의 논리나 "수입하면 된다"는 접근을 버리자고...

지금 진주의 콩밭을 중심으로 세계적인 연구소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오가고 있다. 홍콩 사틴, 파키스탄 파이살라바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터키 앙카라, 남아프리카공화국 웨스트케이프에서 정규화의 자원이 공동재배되고 있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는 35년을, 365일을 매일 같이 산하를 헤매고 진주 들판에서 햇빛과 씨름했는지도 모른다.
 
2020년 정규화는 손녀딸을 봤다. 그 꼬물대는 손녀를 데리고 콩밭에 가서 그는 손녀딸의 이름을 정소이라고 지었다. 콩이 영어로 '소이빈(soybean)'이다. 거기서 소이를 따서 정소이, 정소이라고...
 
<못다 한 이야기>
 
'두만강'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①<<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두만강이라는 명칭의 유래를 《한청문감 漢淸文鑑》 만주지명고(滿洲地名考)에서 언급하고는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두만강은 또, 고려강(高麗江)·도문강(圖們江)·토문강(土們江)·통문강(統們江)·도문강(徒門江)으로 표기된 바도 있다. 만주지명고에 의하면 두만강이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라는 뜻의 도문색금(圖們色禽)에서 색금을 뗀 도문이라는 여진어(女眞語) 자구(字句)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② <<신정일의 새로쓰는 택리지>>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경원도호부」편에는 "두만강은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근원이 백두산에서 나와 동량ㆍ북사지ㆍ아목하ㆍ수주ㆍ동건ㆍ다온ㆍ속장 등의 지방을 경유하여 횟가[회질가(會叱家)] 남쪽으로 흘러 경흥부의 사차마도(沙次麻島)에 이르러 갈라져 5리쯤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여진 말로는 만을 두만(豆滿)이라 하는데, 여러 갈래의 물이 여기로 합류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사전에 북독의 신을 여기서 제사 지낸다.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라고 했는데, 두만강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서 두만강(豆滿江)을 콩이 가득한, 혹은 콩을 실은 배가 가득한 강으로 해석한 것은 학술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작가 본인의 상상입니다.
 
2. 정규화교수가 확보한 야생콩의 가치를 조금 더 부연하면
 
정규화가 이제까지 했던 야생콩 작업수집과 계통분류작업은 규모만이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는 철저하게 격리된 전라남도 일대의 섬들을 중심으로 수집하였기에 독자성이 뚜렸한 씨들을 모았다.
 
그리고 모은 씨가 발아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정확한 위치를 표시햇다. 수집팀에게는 사비를 털어서 마련한 군용 GPS장치를 줬다. 그래서 장소마다 가령 경북 포항 아모르모텔 2km전방 18-1이라고 위치를 표시하고 동시에 36-00-25.40N, 129-28-09-7E 같이 좌표를 찍어 사방 1M 내외까지 정확히 짚을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수집한 종자가 발아가 안되어 씨를 받지 못하면 이 좌표를 따라 언제든지 다시 가서 채집하고 복원할 수 있다
 
정규화의 또 다른 자랑은 그의 종자가 한반도 남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야생콩에 대한 다른 나라의 법적 제재가 이루어지기 이전부터 그는 수집을 시작했다. 마치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뚜껑에 담아서 가져온 것처럼 그는 중국을 비롯 일본 러시아 등 아시아 일원에서 채집을 해 모은 것이다.
 
덧붙이면
중국은 '인류유전자원관리법'으로 북한도 '작물유전자원관리법' 등으로 토종 종자가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것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고 특히 야생콩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2017년에 '유전자원관리법'이 만들어졌다.
 
3. 콩의 원산지에 대한 기록과 중국인들이 콩을 소중히 한 기록을 보면
① 중국의 사기에도 "기원전 7세기에 제(齊)나라 환공이 고죽국 지역을 정벌하고 이곳에서 융숙(戎菽)이라는 콩을 가져와 중국에 퍼트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죽국은 동이족의 나라 즉 우리의 조상나라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문헌 사기에서도 콩은 우리 민족에서 기원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② 은나라 시기 갑골문자를 분석해보면 처음으로 콩 두(豆)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BC 200년에 이르러 콩을 대두(大豆)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중국인들이 콩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몇몇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콩의 대두 두(豆)자는 풍년 풍(豊)자를 받치고 있다. 풍년을 가늠하는 잣대가 콩 농사였다는 의미다. 한편 머리 두(頭), 몸 체(體)에도 콩 두(豆)자가 핵심 부수다. 중국인들이 콩을 얼마나 소중한 곡식으로 여기는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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