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 16:18최종 업데이트 20.07.0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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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문화진지의 탱크 ⓒ 권은비

 
한 아이가 탱크를 발견하더니 달린다. 부모는 아이에게 말한다.

"앞에 서 봐."

아이는 탱크에 기대어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포즈를 취한다. 부모는 사진을 찍는다.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은 한 노인이 아이와 부모를 바라본다.
      
나는 탱크와 아이, 아이의 부모, 그리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뒤편으로 도봉산 자락이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다.

70년 전인 1950년 6월 27일. 이 일대에서는 '창동전투'가 한창이었다. 아이가 기대어 섰던 전차가 즐비하게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을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전쟁의 소리가 이 일대에 가득 차고, 젊은 군인들은 단 1분 뒤의 미래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탱크를 보며 영화 <1917>이나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본 전투 장면들을 애써 떠올려봤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나는 전쟁을 모른다. 2020년인 지금, 오래 전에 멈춘 탱크 앞에서 아이가 기념사진을 찍는, 한국전쟁을 상상하기엔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이는 이 공간은 서울 도봉구 '평화문화진지'다.

격변의 시간, 노인의 가만한 시선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주요 군사 요충지였다. 1968년 북한 무장공비들이 습격한 '1.21 사태' 이후, 국방부는 이곳에 주거공간으로 위장한 대전차(對戰車) 방호시설을 지었다. 2층부터 4층까지는 주거시설이었지만 1층은 방호시설로서 기능했다. 언제든 위급상황이 벌어지면 1층에 보관된 탱크들이 전시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2017년, 이곳은 문화예술공간으로 재탄생됐다. 과거 군인 아파트로 사용되던 건물구조에서 1층 철근 콘크리트의 뼈대는 보존하되, 문화적이고 생태적인 공간으로 재구성했다.
 

평화문화진지의 풍경 ⓒ 권은비

 
나는 평화문화진지에서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 중이다. 입주한 작업 공간의 앞뒷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작업하는 동안 얼마든지 창 밖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 또한 유리창 안의 나를 관찰한다.
      
입주 예술가들을 제외하고 여기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바로 노인들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상관없이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은 벤치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거나, 쉽지 않은 걸음걸이로 공원 일대를 걷는다. 어떤 할아버지는 혼자 덩그러니 색소폰을 연습하시고, 어떤 할머니는 소형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단잠을 주무신다.
 
저마다 도시락을 꺼내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즐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이곳의 단골손님이다. 때로는 할머니 혼자, 할아버지 혼자 덩그러니 테이블 위 도시락통을 움켜쥐고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곤 한다. 가끔 비가 들이닥치는 상황인데도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 있는 노인들을 본다.

나는 나무 사이로 그들을 보며 그 구부정한 자세에서 나오는 시간의 무심함을 발견한다.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만나는 노인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자세와 표정들을 발견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그들이 아이었을 때, 청년이었을 때, 중년이었을 때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어떤 풍경이 그들의 청춘의 공간을 채웠을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상상일 뿐이다. 내가 전쟁을 모르듯, 격변의 시간을 통과해 내 눈앞에 당도한 노인의 가만한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
 
한반도는 한번도 평화를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전쟁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정신과 몸이 체화한 냉전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냉소는 냉전과 닮았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두 나라의 정상이 손을 잡고 걸었을 때, 나는 베를린에 있었다. 당시 독일인 친구들은 한반도가 당장 통일이라도 한 듯 내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거나 상기된 표정으로 기분이 어떻냐고 물었다. '뭐, 앞으로 상황을 봐야겠지. 2000년에도 곧 통일될 줄 알았거든.' 나의 대답은 호들갑을 떠는 독일 친구들의 들뜬 기분에 찬물을 끼얹기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남북관계에 대한 나의 냉담한 예상은 적중했다.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돼도 이곳 평화문화진지는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인다. 냉전의 상태는 딱 이 정도다. 그저 평화로워 '보인다'는 것. 평화로워 보일 뿐, 애초에 진짜 '평화'는 단 한번도 한반도에 당도해본 적이 없다.
 
평화문화진지 작업실에 한참 도색작업을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통유리 문을 두드린다.

"예술하시나봐요. 너무 멋지네요!"

실상은 보이는 것과 다르다. 창문 하나 없어 환기조차 되지 않는 작업실에서 나는 이산화탄소와 래커 시너와 톨루엔 성분 등의 유해물질을 온몸으로 들이마시고 있었다.

보기엔 멋져 보인다. 보기에만 멋져 보인다. 냉전 중인 한국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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