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8 09:28최종 업데이트 20.03.1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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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해직 45년 맞은 동아투위 기자회견장. ⓒ 동아투위

  
3월 17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중·후반의 노인들이다. 45년 전 이날 새벽, 박정희 유신권력과 결탁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동원한 폭력배들에 얻어맞으면서 길바닥으로 내쫓긴 동아일보사 해직 언론인들이다.

그렇게 무더기로 해직된 이후 이들의 삶은 험했다. 박정희 유신권력이 취업을 방해했고, 감시, 가택연금, 구금, 투옥, 수배 등의 억압은 그치지 않았다.

45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새벽 폭력의 현장에 다시 서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많은 얼굴과 풍경들이 눈앞을 스친다. 그날 함께 해직된 이후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서른 명 동지들 얼굴이 잔뜩 찌푸린 하늘 위에 어른거린다.

서른 명의 동지들은 저세상으로...

더군다나 우리는 바로 이틀 전, 또 한 명의 동지 권근술 선배와 갑작스러운 이별을 하게 되었다. 목이 메인다.

2년여 전, 그는 '꿈은 깨졌지만...평생 '해직기자'였던 이들의 입사 50년에 즈음하여'라는 글을 발표했다(<한겨레> 2017년 11월 13일자 '왜냐면'). 이 글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오늘 우리들은 한편으로는 울고픈 마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흔을 훌쩍 넘은 노인네다운 헛웃음으로, 착잡하기 그지없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흔 중반에 이른 노구가, 일생이 어긋난 분노의 떨림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저희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늙은이의 쉰 목소리로 대답할 겁니다. "우리는 평생을 '해직기자'로 살았소. 제발 앞으로는 '해직기자'라는 소리 좀 들리지 않는 세상이 오면 좋겠소."

"우린 평생을 해직기자로 살았소"
 

이날 회견장에 나온 '동아일보 해고통지서. 6가지 해고사유 외에 오른 쪽 포스트잇에는 시민들이 추가로 해고 사유를 적었다. ⓒ 동아투위

  
3월 17일 오전 11시, 동아일보사 앞에는 동아 해직언론인들뿐 아니라 언론·노동·시민사회 단체 구성된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 청산 시민행동'(이하 시민행동) 구성원들도 동아투위와 함께 했다.

시민행동은 이날 6가지 사유를 들어 '이제 우리 국민이 동아일보를 해고한다'는 해고 통지서를 발표했다. 6가지 사유는 ▲ 일제의 앞잡이로 민족을 배신한 죄 ▲ 민족 분열을 획책하고 이를 공고히 한 죄 ▲ 군사독재 권력의 충견으로 민중을 괴롭힌 죄 ▲ 민중을 저버리고 권력자, 기득권, 지배자의 편에 서 왔던 죄 ▲ 국민이 위임한 언론권력을 남용하고 탄압한 죄 ▲ 자사의 참 언론인을 부당하게 해고하고 지금까지도 사과하지 않고 복직시키지 않은 죄라고 밝혔다.

45년 전 그날 새벽은 추웠다.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보통 때 같으면 그저 괴괴한 고요만 가득한 시간이었는데, 이날은 새벽 3시 전부터 심상찮은 움직임이 있었다. 경찰이 주요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고, 검은 복장 차림의 청년들이 각목을 든 채 동아일보사 주차장을 서성였다.

유신권력에 굴복해버린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닷새째 제작을 거부하며 농성 중이던 동아일보,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의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을 강제로 해산시킬 것이라는 얘기가 며칠 전부터 나돌았다. 당시 나는 동료 기자 22명과 함께 동아일보사 건물 2층 공무국에서 신문 제작을 거부하면서 닷새째 단식 농성 중이었다. 3층 편집국에서는 기자들이, 4층에서는 동아방송 피디와 아나운서들이 제작을 거부하면서 농성 중이었다.

단식 중이던 2층 공무국에는 납으로 만든 활자판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요즘이야 컴퓨터로 손쉽게 편집·제작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손으로 일일이 활자를 하나씩 뽑아서 판을 짰고, 그것을 동판으로 만들어 인쇄를 했다. 신문제작에 없어서는 안 되는 활자판을 우리가 점령하고 있었기에, 소수의 제작참여 인력으로 4면짜리 '가짜 동아일보'를 제작하던 동아일보사 사측은 다른 신문사를 유랑하며 신문 제작을 하고 있었다.

45년 전 3월 17일
 

1975년 3월 17일 새벽 사주측이 동원한 술 취한 폭도들에게 강제 축출되기 직전 동아일보사 편집국에서 마지막 '자유언론 만세'를 외치는 기자들과 사원들. ⓒ 동아투위

 
3월 17일 나는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불침번을 섰다. 우리 23명의 단식조는 강제해산의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하자 매일 밤 불침번을 조직해 2시간씩 경계를 했다. 폭력의 강제축출이 시작되던 날 새벽, 나는 불침번을 끝내고 2층 베란다 쪽 유리창 가까이에서 잠에 빠졌다.

2층 공무국에서 단식하던 우리는 베란다 쪽 유리창이 촘촘한 쇠창살로 막아 놓은 것이어서 그쪽은 안심을 하고, 공무국 정문만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봉쇄를 했다. 그랬기에 밖에서 쉽게 쳐들어 와서 우리를 강제해산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갑자기 고함과 소란스러운 소리, 빨리 일어나라는 선배들의 외침이 들렸다. 눈을 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불침번을 서느라 1시간 남짓 눈을 붙인 데다, 닷새 동안 단식까지 한 상태여서 몸도 정신도 얼얼했다.

그때 베란다 쪽 유리창에 불꽃이 튀었다. 산소용접기로 유리창 바깥 쇠창살의 가장자리를 도려내고 있었다. 순식간에 쇠창살 덧문이 뜯어지고, 이어 해머로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리창이 와장창 부서지더니, 각목을 든 청년들이 삽시간에 2층 공무국을 덮쳤다. 누군가가 "활자판 무너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바로 창문 옆에 있던 나는 이들 각목 든 불량배들의 최초 공격 대상자였다. 그들의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그들은 고함을 질러대며 각목을 휘둘렀다. 살벌했다. 나는 그들에게 질질 끌려 2층 베란다로 내동댕이쳐졌다. 안경은 벗겨져 어디론가 가버리고, 손바닥엔 유리창 조각이 박혀 피가 흥건했다. 두 명의 깡패가 양쪽에서 내 팔을 움켜쥔 채 1층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나를 동아일보사 차 뒷자리에 태우고, 양쪽에서 내 팔을 꽉 잡았다.

산소용접기, 해머, 각목이 난무한 그 꼭두새벽
 

1975년 강제 축출된 동아투위 위원들은 6개월 동안 출근시간에 회사 앞에 도열한 뒤 신문회관 혹은 종로 5가 기독교회관까지 침묵시위를 벌였다. ⓒ 동아투위

 
우리들을 태운 차는 통행 금지의 그 시간에, 단 한 번의 검문도 없이,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사건기자여서 야근 때면 통금 중에도 경찰서 취재를 한 터여서, 서울 시내 어디에 검문소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중앙정보부로 잡혀가는 줄 알았다. 통금의 그 새벽에, 아무런 검문도 받지 않고 질주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우리들은 걸핏하면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같은 곳에 끌려갔던 터였다.

도착한 곳은 뜻 밖에 혜화동에 있는 한 병원이었다. 그곳 병원에서 나를 내려놓은 뒤 그들은 바로 떠났다. 조금 있으니 단식에 참여했던 동료들이 한 명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2층 공무국의 단식농성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3층 편집국과 4층 동아방송국의 농성해산 과정도 2층과 비슷했다. 동아투위의 공식기록인 '자유언론 40년 - 실록 동아투위 1974~2014년'에는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새벽 3시 50분께 2층 공무국이 함락되고, 농성기자들을 실은 찝차, 승용차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 3층에서 농성 중이던 기자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와, 와' '우당탕, 우당탕' '쾅, 쾅' 소리가 요란했다. 폭도들은 산소용접기와 해머, 각목으로, 농성 중인 3층 편집국 기자들이 걸어 잠근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구름다리 쪽의 창문과 덧문이 부서지면서 술 취한 폭도들은 해머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편집국 안으로 밀고 들어 왔다... 폭도들은 접근하는 기자들에게는 소화기 가스를 내뿜기도 했다..." (위의 책 22쪽)

"회사 측에서 동원한 폭도들이 2,3층의 공무국과 편집국을 점령하고 방송국으로 쳐들어 오기까지 1시간 4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6시경, 각목과 소화기, 소방호스 등으로 무장한 폭도들의 구둣발이 방송국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4층은 아나운서를 비롯해 여사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도들의 언행이 훨씬 거칠었다. 그들은 마치 태권도 유단자의 솜씨를 자랑이나 하듯 이들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는 김학천 피디의 옆구리와 목덜미를 사정없이 내리쳐 실신시킨 후 병원으로 후송하는가 하면, 어느 여성 아나운서의 머리채를 잡아채기도 했다.... 여사원들에게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남자 사원들에게는 예사로 폭력을 휘둘러댔다." (위의 책 23쪽)

우리들의 동아일보 시절은 그렇게 끝이 났다.

동아는 한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양한수 위원이 동아일보 앞에서 시위 중이다. ⓒ 동아투위

  
그리고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동아일보사는 1975년 3월의 폭력적인 대량 해고에 대해 그동안 단 한 번도 사죄하거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유언론실천선언' 투쟁을 동아일보의 DNA라고 자랑을 해왔다.

한 때 우뚝 솟은 1등 신문이었던 동아일보는 1975년 봄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신문을 만드는 핵심이 '사람'인데, 동아일보 제작의 핵심 인력인 젊은 기자들의 절대 다수를 내쫓아 버렸으니, 신문을 제대로 만들 인력이 남아 있을 턱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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