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18 11:25최종 업데이트 20.02.18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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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가 끝나고 나면 또 다른 설렘의 순간이 찾아온다. 바로 자원봉사자들과 참가자들이 찍은 사진을 보는 때다. 여섯 색의 무지개 깃발 아래에서 각양각색의 개성을 뽐내며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고된 일상 속에서 큰 위로와 힘을 전달한다.

하지만 반가운 사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는 퀴어문화축제에 우호적인 사람들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축제가 끝나면 보수 개신교계 언론이나 혐오집단의 블로그에도 현장 사진이 올라온다. 대부분 퀴어문화축제가 음란하다는 식의 폄훼와 모욕을 위해 찍은 사진들이다. 하지만 가장 불쾌한 경우는 따로 있는데, 사진을 교묘히 짜깁기하여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있었다고 가짜뉴스를 만드는 경우다.

구태여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겠다. 혐오집단의 허위선동은 글로 다시 옮길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사진에 찍히는 이들은 부스에 있거나 퍼레이드 트럭에 타는, 즉 눈에 잘 띄는 사람들이고 그들은 대부분 내가 이미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가짜뉴스에 자신의 사진이 악용된 것만으로도 분통이 터질 텐데 아무리 비판이 목적이라지만 이걸 내가 인용하는 건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한편으로 지인들이 그런 모멸적인 일을 겪는 상황을 보며 나는 숙연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활동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나 또한 현장에서 눈에 띄는 위치에 설 때가 있을 텐데 이는 혐오집단의 만만한 먹잇감이 되리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비슷한 일을 겪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정말 그런 일이 발생했다.

'가짜뉴스', 이렇게 만들어지더라 
 

나는 큐플레닛에서 쉴라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의 내용을 비판하는 영상을 찍었다. 그러나 이는 '가짜뉴스'에 의해 "큐플레닛이 <젠더는 해롭다>를 홍보해주었다"로 왜곡되어 알려졌다. ⓒ 큐플래닛


  

A출판사가 올린 게시물 ⓒ 페이스북 갈무리


 
몇 달 전, 퀴어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을 통해 '젠더는 해롭다? 트랜스젠더 혐오가 해롭다!'는 제목의 영상을 업로드 했다. 이미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영상은 ▲ '젠더'가 허구이자 여성인권에 해로운 개념이라는 주장과 ▲ 트랜스젠더 여성은 '진짜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을 비판하려고 제작되었다. 정체성이자 동시에 체계로서 개인의 삶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젠더가 어떻게 허구이며, 페미니즘의 새로운 조류를 만들며 발전을 이룩했던 젠더 개념이 어떻게 여성인권에 해롭다는 것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런 식의 퇴보한 논리를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부정하고 존엄을 해치는데 악용하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이 글을 통해 영상에서 했던 비판을 반복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주장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변하지 않는 사실은 퀴어 업데이트의 출연진인 은하선과 나는 트랜스젠더 배제적인 주장을 비판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몇몇 주장과 그러한 내용을 담은 쉴라 제프리스의 책 <젠더는 해롭다>를 언급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해당 도서를 국내에 번역·출간한 A출판사의 SNS 계정에 '뉴스 읽어주는 퀴어의 은하선과 신필규가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를 홍보해주었다'는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살펴보니 영상의 전후 맥락을 모두 잘라버리고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주장을 소개하는 부분만 악의적으로 갈무리해 짜깁기를 한 게시물이었다.

왜곡과 조롱 앞에서 할 수 있던 유일한 일 
 
사실 채널의 영향력이 점차 커져가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허위사실 유포와 모욕을 언젠가는 겪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한 것처럼 짜깁기 하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이미 '트랜스젠더 여성은 진짜 여성이 아니다'라는 혐오 가득한 주장을 '소개'하는 내 모습이 갈무리되어, 마치 내가 그런 주장을 한 것처럼 여기저기 공유되고 있었다.

사실 이것도 딱히 알고자 한 것도 아니었고, SNS의 얼굴인식 기능이 쓸데없이 좋은 나머지 누군가 그 사진을 올릴 때마다 내게 알림을 보내주었기에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사람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런 성격의 일에는 그냥 신경을 꺼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 개인적으로 늘 생각건대, 세상에는 우리가 더욱 우선순위를 두고 해야 할 덜 소모적이고 더 가치 있는 일들이 있다.

사사롭고 질 낮은 협잡에 붙들려 그런 일들을 미뤄두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암울한 상황이 아닐까.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큐플래닛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사실관계를 바로 잡는 공지를 올리는 것이었다. 허위와 거짓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실과 진실로 맞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품위를 버리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가짜뉴스에 대응하는 큐플래닛의 입장문 ⓒ 큐플래닛


다만 일련의 풍파를 겪고 난 이후 내 마음속에는 질문 하나가 남았다. 이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은 자신이 적대시하는 이들에게 한 방 먹였다며 기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런 식의 활동이 그들이 '운동'이라 주장하는 일에 도움이 될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이 했던 행동은 터무니없이 질 낮은 조롱에 불과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정치적 입장과 주장을 떠나서 보더라도, 저런 짓을 일삼는 집단에 어떠한 신뢰나 공신력을 부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운동의 목적이나 추구하는 신념과는 별개로 말하기 방식이나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을 진지하게 활동가라고 생각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는 절대로 택해선 안 되는 선택지다.

아마 큐플래닛은 지금과 같은 일을 또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른 분야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여성운동이든 성소수자 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간에 말이다. 사람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믿고 싶은 정보만 멋대로 취사선택하거나 짜깁기하여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일은 늘 발생한다.

특히나 트랜스젠더 여성을 향하여 이와 같은 일들은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다. 이러한 상황을 마주할 개인들의 반응은 천차만별일 것이기에, 누군가는 큰 실의와 고통에 잠겨있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들에 위로와 안타까움을 전한다.

다만 한편으로 나는 손상된 자긍심과 자존감을 우리의 손으로 회복할 방법이 분명 있다고도 생각한다. 상처를 준 상대방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오직 사실과 진실만을 가지고 정정당당하게 맞서며,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품위를 결코 내팽개치지 않는 것. 할 수 있는 만큼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꿋꿋이 걷는 것.

그리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운동이 목표를 달성할 유일하고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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