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5 09:24최종 업데이트 20.02.0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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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daily) 와인. 매일매일 마셔도 부담되지 않는 가격의 와인(따위는 없지만), 그러니까 호주머니 사정 신경 안 쓰고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얼리(yearly) 와인은 무엇일까? 있는 힘껏 용기를 내어도 1년에 한 번 마실까 말까 한 초고가 와인 되겠다. 예컨대 미성년자인 미취학 아동의 생일을 기념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세우며, 배우자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김포의 떼루아 와인 아웃렛 할인 장터에서 구입하는 샤토 무통 로칠드 2005년 빈티지 같은 것 말이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몰상식한 이유를 대지는 않는다. 때는 2019년 4월 11일, 그러니까 내 생일날이었다. 그날을 위해 준비한 와인은 샤토 슈발 블랑(Château Cheval Blanc) 2008년 빈티지. 떼루아의 와인 장터 때 내 생일 선물을 구실로 큰맘 먹고 구입했다. 프랑스 보르도의 유명한 와인 생산지 생테밀리옹 지역을 (샤토 오존과 함께) 대표하는 와인이다. 내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는지 이런 와인은 진짜 1년에 한 번 정도만 마신다. 그것도 꼭 아내와 함께.

콧속을 황홀하게 하는 향... 근데 맛은 왜 이래

ⓒ 고정미


2015년에 와인에 빠진 이후로 마셔 왔던 이얼리 와인들이 떠오른다. 샤토 오브리옹 2007, 샤토 마고 2003, 할란 이스테이트 2004, 샤토 무통 로칠드 2005, 콩트 조르주 드 보귀에 뮈지니 2008. 재벌들이야 이런 와인을 데일리처럼 마시겠지만, 나같은 소시민 애호가에게는 본전 생각에 마지막 한 방울까지 깨끗하게 핥아 마셔야 하는 와인들 아닌가. 앞서 영접한 와인들의 기막힌 맛과 향을 되새기며 샤토 슈발 블랑은 나를 얼마나 놀라게 할지 기대감을 대폭 끌어올렸다.
 
아니야. 너무 들뜨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영접하자. 역시 귀한 몸은 다르다고 병 주둥이를 감싼 알루미늄 포일 하단부에 위변조 방지용으로 추측되는 동그랗고 작은 스티커가 붙어 있구나. 셀러트래커cellartracker에서 확인한 샤토 슈발 블랑 2008년 빈티지의 시음 적기는 2019~2042년까지. 시음 적기 초입이라 너무 일찍 마시는 감은 있지만, 성인(聖人) 수준의 인내심이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와인을 10년 이상 셀러에 모셔놓을 수 있겠는가. 그러다 애간장 끊어진다. 
 

샤토 슈발 블랑 2008 프랑스 보르도의 유명한 와인 생산지 생테밀리옹 지역을 대표하는 고가 와인이다. ⓒ 임승수

 
브리딩을 하며 향기를 맡는데, 이거 뭐 거짓말 살짝 보태서 누군가 스포이트에 향수를 머금어 내 콧구멍에 주입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력하고 매혹적이다. 이 글 쓰다가 결국 진열장에 모셔놓은 샤토 슈발 블랑 빈 병을 집어 들고 남아 있는 미세한 향기를 재차 흡입했다.
 
콧속에서 너무나 황홀해 입 안의 느낌도 잔뜩 기대하며 한 모금 마셨는데, 잉? 당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내 취향과 안 맞는 독특한 맛 하나가 도사리고 있는 것 아닌가. 그 맛의 원인은 바로 포도 품종인 카베르네 프랑이었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은 보통 카베르네 쇼비뇽이나 메를로가 내용물의 축을 이루고 프티 베르도, 카베르네 프랑 등의 여타 품종은 소량을 첨가한다. 예컨대 샤토 무통 로칠드 2005년 빈티지의 경우 카베르네 소비뇽이 85%, 메를로 14%, 카베르네 프랑 1%의 비율로 블렌딩했다.
 
그런데 샤토 슈발 블랑은 독특하게 카베르네 프랑이 내용물의 큰 축을 이룬다. 샤토 슈발 블랑 2008년 빈티지는 메를로 55%, 카베르네 프랑 45%에 극소량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첨가했다. 다른 연도에도 대략 메를로와 카베르네 프랑을 반씩 섞는 것은 동일했다. 이 높은 카베르네 프랑 비율이 나에게 호불호 중 '불호'를 느끼게 한 것이다. 세상에나! 이게 얼마짜리인데!
 
카베르네 프랑 특유의 느낌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한동안 전전긍긍했는데, 2018년 소펙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에서 우승한 지인이 내 사연을 듣더니 카베르네 프랑에서는 주로 '피망' 느낌이 난다고 조언을 해주었다. 피망이라는 단어 하나로 머릿속에서 모호하게 떠돌던 혼란스런 이미지가 단박에 정리되었다. 역시 와인을 제대로 공부한 이들은 맛과 향을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 재료를 많이 갖고 있더라.
 
피망을 좋아하는 아내는 샤토 슈발 블랑을 마시며 무척 만족스러워했지만, 내 경우는 원래 피망의 풍미를 선호하지 않아 동일한 와인을 마시면서도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당시의 맛을 머릿속에 다시 소환해 보면 대략 피망에서 향신료 같은 톡 쏘는 풍미만을 제거한 느낌이랄까. 하나도 안 매운 고추를 씹을 때 느낄 만한 질감이 와인에서 꽤 강하게 느껴지니 나로서는 다소 당황스럽고 어색했다.

큰 대가를 치르고 장착한 '필터'
  

도멘 드 팔루스 레 팡세 드 팔루스 2013 프랑스 루아르 쉬농 지역 와인인데 무려 카베르네 프랑 100%다. ⓒ 임승수


일찍이 카베르네 프랑이 나에게 안 맞는 것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다. 2017년 12월 14일에 마셨던 도멘 드 팔루스 레 팡세 드 팔루스(Domaine de Pallus Les Pensées de Pallus) 2013년 빈티지가 그것이다. 도멘 드 팔루스(Domaine de Pallus)는 와인 회사명, 레 팡세 드 팔루스(Les Pensées de Pallus)는 제품명이다. 프랑스 루아르 쉬농 지역 와인인데 무려 카베르네 프랑 100%다. 당시 이 와인을 마시면서 문제의 피망 맛을 느꼈고 그게 불편했는데, 카베르네 프랑 품종 자체가 나와 맞지 않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그저 이 와인은 이렇구나 싶었다.
 
그런데 샤토 슈발 블랑을 영접하는 과정에서 카베르네 프랑의 피망 맛에 좌절하니 그제야 2017년 12월에 마셨던 카베르네 프랑 100% 와인이 떠올랐다. 엄청난 뒷북이다. 어쨌든 큰 대가를 치르고 강력한 필터 하나를 장착했다. 앞으로 카베르네 프랑 비율이 높은 와인은 웬만하면 피하자! 물론 샤토 슈발 블랑은 와인 애호가들이 너무나 애정하는 훌륭한 와인이다. 피망 맛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 어떤 와인보다도 큰 감동을 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여집합이다. 샤토 슈발 블랑조차 아니라면 카베르네 프랑은 내 취향과 안 맞는 것이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끝에 어느 정도 내 취향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카베르네 프랑 비율이 높은 와인, 이탈리아 산지오베제 품종 비율이 높은 와인, 쉬라(쉬라즈) 품종 와인은 일반적으로 내 취향이 아니다. 다른 와인에 비해 좋은 기억이 적으니 굳이 일부러 찾지는 않게 되었다. 아내는 나와 다르게 산지오베제 특유의 신맛을 선호해서 이탈리아 와인을 마실 때마다 만족스럽단다. 확실히 품종에 대한 선호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다만 이탈리아 몬탈치노 지방의 산지오베제인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일부러 여러 번 구매해 마셨을 정도로 느낌이 좋았다. 여타 산지오베제와는 달리 맛이 깊고 풍부했다.)

결국 취향이다 
 
자신의 취향을 알게 되면 와인 선택의 실패 확률을 낯출 수 있으며 와인 마시는 시간이 더욱 즐거워진다. 물론 어느 정도 시행착오는 감수해야 하는데, 하필 내 경우는 이얼리 와인에서 교훈을 얻었다는 것이 뼈아프다. 유명한 고가 와인이라 누구에게나 맛있을 줄 알았지, 그 누가 샤토 슈발 블랑이 자신의 취향이 아닐 거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인생사가 이렇다.
 
최근 A형 독감에 걸려 2주 가량 골골댔다. 39도까지 오른 열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대폭 저하된 미각 기능 때문에 답답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후 떨어진 입맛을 살리기 위해 샴페인을 한 병 열었다. 뵈브 클리코 브뤼 옐로우 라벨(Veuve Clicquot Brut Yellow Label).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를 차분하게 바라보다가 산뜻한 사과 향을 뽐내는 이 기특한 액체를 한 모금 털어 넣었다. 과실 향을 담은 기포가 혓바닥을 마사지하니, 적어도 혓바닥에 깃든 독감 바이러스는 확실하게 세척되는 느낌이었다. 이 혓바닥 위에 동네 마트에서 갓 쪄온 랍스터 꼬릿살을 한 점 떼어서 올렸다. 이렇게 넋이 나갈 조합이라니. (독감 치료제로) 페라미플루 링거가 아니라 뵈브 클리코 링거를 맞을 걸 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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