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1 12:01최종 업데이트 18.12.11 12:01
강가이버는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향수'라는 이름의 병 막걸리를 만들었다. 술 이름이 향수인 것은, '향수'의 시인 정지용과 강가이버의 고향이 같아서다.

'차마 꿈엔들 잊힐리아/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취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이동원이 노래한 정지용의 시다. 정지용 시인은 한국 시문학계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다. 2001년 이산가족상봉 때에 정지용 셋째 아들 정구인이 상봉장에 나왔지만, 정지용의 후일담은 여전히 미궁 속에 빠져 있다. 
 

옥천 정지용 문학관에 있는 정지용 밀랍상 ⓒ 막걸리학교

 
한국전쟁 중에 폭격을 맞아 사망했다는 설과 1958년까지 양강도 풍서군 협동농장에서 살았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쪽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정지용 시인은 남한에서는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월북작가로 몰려 금기시 되고, 북쪽에서는 해방 전 반동작가로 몰려 1992년까지 금기시 되었다.

정지용은 우리말 시어들을 꼼꼼하고 감칠맛나게 다듬어 쓴, 우리 말맛을 잘 살려낸 시인이다. 정지용의 존재를 향수 노래만으로 알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인데, 굳이 변명하자면 (나 또한 그 부끄러움을 면할 처지는 못 되기에) 남북 분단과 이념 격돌이 그의 육신과 영혼을 행방불명시켰다.


정지용 시인은 술을 좋아했다. 동시대의 평론가 김동석은 정지용을 이렇게 평했다.

"술을 마시면 망나니오 – 술 취한 개라니 – 이따금 뾰족집에 가서 '고회'와 '영성체'를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조선 문단에서 순수하기로는 아직까지 정지용을 따를 자가 없다. '시를 위한 시', 이것은 결코 말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언젠가 지용은 술에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가지고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어' 가는 개찰구에서 바래다주러 나온 길진섭에게 손을 내저으며 폼으로 내려가면서, '나처럼 좋은 친구를 가진 사람은 행복이야. 당신은 바래다주는 친구 하나 없지 않소.' 하였다.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지용."

정지용이 '시를 위한 시'를 지었다고 평가받을 만큼 순수했고, 술과 친구를 좋아했다는 얘기다. 정지용이 타고 다녔을 경부선 완행열차가 옥천역을 지나면 이원역에 멈춰 선다. 지금은 경부선 이원역에 하루에 무궁화호 열차가 상행선 두 번, 하행선 두 번을 다니는 한적한 역이 되었다.

강가이버는 5년 전인 2013년에 이원역이 있는 고향 마을 이원양조장으로 돌아왔다. 허리 수술을 하신 어머니가 1년 넘게 객지 병원 신세를 지다가 고향에 돌아올 때,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양조장 일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한때 직원이 28명, 막걸리는 하루 3천병이 나갔던 양조장 매출이 줄어들어, 늙으신 아버지가 혼자 양조장 일을 하고 계셨다.

이 무렵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국세청으로부터 양조 위생 업무를 이양받으면서, 관리를 철저히 하기 시작할 때였다. 보건증이 없다, 수질검사를 제때 해라 등등 사사건건 식품의약품안전처 직원과 아버지가 충돌했다. 자식들은 폐업했으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감히 아버지께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양조장은 아버지의 전부였고, 양조장은 강가이버 형제들을 키운 요람이었기 때문이다.

건설업을 하던 강가이버는 양조장 면허를 지키려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휴업계를 내고 1년 반 동안 보수 공사를 했다. 그때 천정에서 나온 왕겨가 5톤 트럭 4대분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그 왕겨를 버리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그게 소중한 줄 몰랐다. 양조장을 수리하고 나니, 아버지는 눈에 띄게 기력이 쇠해지셨고, 양조장은 사람 손길을 더 기다리는 상황이 되었다.
 

강가이버, 항아리 들개를 만들다. ⓒ 막걸리학교

 
용량 400ℓ, 무게 70㎏이 되는 큰 항아리도 무겁고 소독하기 어려워서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오래된 것이 소중하다는 말이 생각나 버리지 못했다. 항아리를 소중하게 여기자, 강가이버의 허리가 견뎌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건설 현장에서 보았던 드럼통이나 기름통을 드는 장비를 개조하여 항아리 들개를 만들었다.

이제 버튼을 누르면 항아리가 들어올려지고, 기울여지고, 완전히 뒤집어진다. 그렇게 바닥에 뒤집어 놓고, 압력밥솥을 개조하여 만든 증기발생기로 항아리를 소독한다. 뚝딱뚝딱 이원 양조장은 그의 작업실이 되어 갔다.

그런 강가이버를 보고 나는 두 번 놀랐다. 처음 놀란 것은 양조장집 아들이면서도, 양조장 일을 모르면서 40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번은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혹시 양조장집 아들이 아니라, 양조장집 양자가 아닌가요?"

그는 웃으면서 아니라고 한다. 내가 짓궂게 묻는 줄을 안다. 양조장은 그의 증조부 강재선이 1930년에 창업했고, 지금 면허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주세법이 발령된 뒤인 1949년 9월 1일자로 나왔다. 같은 날짜로 영업신고가 되어있는 양조장들이 있을 걸 보면, 그 무렵 기존 양조장의 면허를 대한민국 정부가 새로 내줬던 것 같다.

그리고 강가이버는 올해 새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지역특산주 면허를 보탰다. 강가이버를 보고 내가 다시 놀란 점은 그의 공작하고 창조하는 정신이었다. 그는 술을 빚으면서 누룩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 전통 누룩과 개량 누룩을 만드는 방을 따로 꾸몄다.

그런데 필요한 누룩 양에 비해 누룩 방이 컸다. 온도와 습도 관리가 어렵고, 난방비도 무시 못했다. 그래서 중고 자외선 소독기를 사다가 자외선을 떼어내고 통풍 장치와 온도 감지기를 달고 누룩제조기로 개조했다.

강가이버는 유통 기간이 짧은 막걸리만 빚을 게 아니라, 마음 편하게 유통 기간이 없는 소주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는 옹기 소줏고리를 구해다가 전기밥솥 위에 중탕식으로 얹은 증류 시설을 갖췄다. 보는 사람마다 그 중류기를 보고 재밌다고 웃는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강현준이라 부르지 않고 강가이버라고 부른다.
 

이원양조장의 무감미료 병 막걸리. ⓒ 막걸리학교

 
강가이버는 신상품으로 유리병에 든 '향수'와 '시인의 마을' 막걸리를 만들었는데, 향수는 1970년대 아버지가 젊은 날에 빚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100% 밀 막걸리로 알코올 9%다. 시인의 마을은 100% 쌀 막걸리로 알코올 10%다. 그리고 둘 다 무감미료다.

시골 마을 막걸리가 유리병에 무감미료라! 보통 배짱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시도다. 그것도 말수 적은 충청도 사내답게 "그냥 냈슈" 하며, 요란할 것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았다.

강가이버의 아버지 강영철씨는 85살을 넘어섰지만 지금도 매일 아침이면 양조장에 나와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있다가 해질녘이면 들어간다. 지난해에는 안채에서 혼자 힘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양조장 사무실로 나왔는데, 이제는 그럴 기력이 없다.

오전엔 지팡이 신세를 지고 간신히 사무실에 나와 정물처럼 놓여 있다가, 오후에 안채로 들어갈 때는 강가이버가 아버지를 번쩍 들어 휠체어에 실어 모시고 간다. 양조장은 아버지의 평생 일터이고, 당신의 꿈과 현실이 발효된 공간이고,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머물 공간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강가이버는 아버지의 일상을 흔들지 않는다.

양조를 모르고 마흔세 해를 살고, 양조를 알고 다섯 해를 보낸 강가이버에게 아주 빠른 속도로 양조장은 그의 전부가 되어가고 있다. 그가 나고 자란, 그를 키워낸 공간이니, 이제 그가 양조장을 키우는 것이 어색할 것도 없다. 그는 흰 옷을 입고 흰 머리 띠를 두르고 일을 하면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다.

오래된 양조장 도구들을 배경으로 선 흰옷 입은 그를 보면, 이원 마을에 경부선 철도가 처음 놓인 1905년 그 무렵쯤으로 되돌아가 있는 듯하다. 강가이버는 고향 마을 양조장 일터에서 고향의 쌀로 술을 빚고, 고향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다. 정지용이 시를 위한 시를 지었다면, 강가이버는 술을 위한 술을 빚는 이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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