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읽은 책에 글을 붙이는 일은 보람찬 만큼 고되다 해도 좋다. 글이란 필경 나의 생각을 남에게 보이는 일인데, 바닥을 보이는 독서인구 가운데서도 서평을 찾아 읽는 이가 한줌이나 될까 싶은 탓이다. 그리하여 대가보다 큰 수고를 들여가며 서평을 이어 쓰는 데는 분명한 내적 동기가 필요하다. 그 동기가 서평쓰기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줄 테니 말이다. 내게는 지금 쓰는 이 글이 바로 그 이유가 된다. 1990년대 한국 문학사를 정리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소설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生의 이면>이 되겠다. 소설가 이승우의 역작으로 꼽히는 이 책을 나는 이제야 읽었는데, 그건 이 책이 지나치게 무겁고 우울하리란 선입견 때문이었다. 이승우도, 그가 쓴 다른 소설들도 글과 예술을 애호하는 이들과 일반 대중 사이에서 전혀 다른 반응을 받고는 한다. 이는 아마도 그의 글이 무겁고 우울하여서가 아닌지 나는 오랫동안 그런 틀려먹은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사람을 전과 다르게 한다는 것, 예술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보기 전과 후가 다르도록 하는 작품이야말로 세상에 태어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왔던 것이다. <生의 이면> 또한 그와 같아서, 나는 이 책이 사람을 감동케 하고, 때로는 위로하며, 그로부터 어떤 파문을 일으킬 힘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그 첫 문턱은 독자의 닫힌 마음을 열어젖히는 것이고, 이 책은 나의 선입견 또한 가벼이 무너뜨렸던 것이다. ▲ 生의 이면 책 표지 ⓒ 문이당 한 순간 뒤틀린 소년의 삶 이제야말로 책 이야기를 전할 때다. 어떤 이야기인가. 성공한 소설가 박부길이 있고, 그에 대한 작가론을 문예지에 적어주어야 하는 또 다른 작가인 화자가 있다. 화자는 박부길을 이해하기 위해 그를 직접 만나고 그가 쓴 여러 작품들을 들여다보는 과정에 돌입한다. 작품엔 작가가 묻어 있게 마련, 어느 작품이건 작가가 감춤으로써 드러내고 또 드러냄으로써 감추려는 일면이 고스란히 담기는 법이다. 박부길이 쓴 여러 작품들을 접하며 화자는 그가 여러 소설을 세상에 내어놓기까지의 과정에 조금씩 다가선다. 박부길의 생애는 이렇다. 그는 어느 시골마을에서 외로이 자랐다.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없었고 사람들은 아버지가 고시공부를 위해 절에 들어가 있다고만 말했다. 큰아버지가 큰 어른인 집에서 지아비 없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마음껏 사랑을 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던 어린 소년 박부길의 삶은, 단 한 순간 뒤틀리고 만다. 부길의 집 뒤엔 감나무가 심긴 뒤채가 하나 있었다. 집안 어른들은 그가 뒤채에 드나드는 걸 금했는데, 부길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커다란 감나무 때문이겠거니 그렇게만 여겼다. 감나무를 보러가는 건 금지하면서도 때때로 주는 감이 금단의 열매처럼 더 맛있게 느껴졌을 뿐이다. 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때가 된다. 모든 금지된 것이 그렇듯 부길 또한 뒤채의 유혹에 이끌린다. 그리고 그 안에 어느 사람이 들어 있음을, 구속하는 장비가 채워져 죄수처럼 갇힌 광인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부길은 몰래 들어간 뒤채에서 광인의 부탁을 받고 그에게 손톱깎이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다음날 그가 손톱깎이를 이용해 목숨을 끊었단 것을 알게 된다. 독자를 어루만져 마침내 움직인다 소설은 부길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추적하여 되살린다. 부길은 제 아버지가 아버지인 줄 모르고 죽게 하였고, 또 어떤 어른의 보살핌도 없이 낯선 도시를 홀로 살아내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때때로 닥쳐오는 외로움은 처절하였고, 삶의 한 순간도 그저 봐주는 법은 없었다. 소설은 어느 순간 온도를 달리한다. 통금을 피해 숨어든 어느 새벽 교회당에서 부길의 영혼을 매만지는 듯한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음악으로부터 위안을 받은 부길은 그를 연주한 이름 모를 여성에게 깊은 끌림을 느낀다. 어둠을 빛이라 여길 만큼 척박했던 마음에 처음 들어온 사랑이다. 갈급한 자가 물을 보듯 부길은 절실하게 사랑한다. 운이 좋아 사랑은 이뤄지고 부길과 여성은 조금씩 특별한 관계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 정점에서 소설은 쉬운 결말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 어느 관계도 가져본 적 없는 가엾은 이가 성숙한 사랑을 하리라는 건 얼마나 막연한 기대인가. 거의 필연적이라 할 만한 상실은 부길을 나락까지 떨어뜨린다. 세상 모든 것이었고, 또 유일한 것이었던 한 사람을 마침내 잃고만 청년이다. 그는 암혹했던 시절을 지낸 어두운 방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홀린 듯 글을 써내려간다. 그렇게 부길은 소설가가 된다. 한 아이가 자라 사랑을 하고 실패하고 소설가가 되는 이야기다. 별반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이 소설은 어째서 훌륭한가.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항목들, 이를테면 사건과 인물과 문장 따위의 것들을 차치하고 나는 이 작품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 소설이 진정으로 드러내는 것, 즉 이 작품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삶의 진실 한 가지가 독자에게 다가와서 그를 어루만지고 마침내는 움직인다는 기적적인 사실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 방식 사람들은 흔히 삶을 점으로 이해한다. 나이와 외모, 집안과 직업, 연봉과 그가 현재 있는 상황 따위의 것으로 그를 재단한다. 나이는 대개 어릴수록 좋고, 외모는 남들에게 호감을 살수록 나은 것이라고, 집안은 명망이 있고 화목하며 탄탄한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낫다고 말이다. 직업이나 연봉 또한 마찬가지, 더 많이 벌며 바깥에 내세우기 좋은 직업이 그렇지 않은 직업보다는 훨씬 낫다고들 한다. 때로는 이와 같은 잣대가 내면에 스며들어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누구는 실제보다 뿌듯해하고 또 누구는 참담히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의 어느 여정에서 갈피없이 표류하는 인간을 나는 허다하게 목격하였다. 그러나 삶이란 상대적이고 때로는 그보다 더 상대적이다. 삶이란 어느 한 점에 가만히 멈춰서 있지 않다. 운명 또한 우리의 기대처럼만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하여 어제 나쁜 것이 오늘은 좋은 것이 되고, 오늘 나은 일은 내일 못한 일이 되기도 한다. 못한 것이 나은 것의 근거가 되거나 평탄한 삶이 실패의 이유가 되는 일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무정한 삶에도 너그러움이 있다면 삶에서 마주하는 어떤 미덕은 오로지 삶에 잡힌 주름으로부터 길어낼 수 있다. 또 그렇게 얻어낸 미덕 없이는 지나칠 수 없는 삶의 관문 또한 있다는 사실을 나는 비싼 값을 치른 뒤에 배웠던 것이다. 이를 아는 이라면 오늘의 성취로부터 교만해지지도, 실패로부터 한없이 무너져 내리지도 않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生의 이면>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와 같다. 세상에서 더없이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듯 보이는 박부길의 삶은 바로 그 같은 이유로 인하여 드문 성취를 이룩한다. 어제의 실패가 자양분이 되어 오늘의 성공을 이루고, 오늘의 성공이 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은 겉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이 소설이 이야기한다. 그로부터 누군가는 오늘의 절망을 그저 절망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시야를 얻을 수 있을 테다. 한 편의 소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귀한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무심하고 잔혹한 듯 보이는 삶의 너그러움이 또한 여기에 있다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 덧붙이는 글 (사)한국독서문화재단이 주최한 제12회 글나라독서감상문대회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生의이면 #이승우 #문이당 #한국소설 #김성호의독서만세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