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이 해석한 '노량'의 이순신... 왜 실망스러울까

[김성호의 씨네만세 629] <노량: 죽음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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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starsky216)등록 2024.01.08 17:57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위기의 순간 등장하는 영웅들이 있다. 열세라고 여겼던 전세를 뒤집어 국가를 존속시키고 백성을 구해낸 이들이다. 이를테면 전성기를 맞은 페르시아의 대공세를 일거에 물리친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온 세계에 적수가 없던 원나라의 정벌전을 두 차례에 걸쳐 물리친 대월의 명장 쩐흥다오 같은 이가 그와 같은 인물이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없었다면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전성기는 훨씬 더 일찍 끝났을 테고, 쩐흥다오가 없었다면 중국과 별개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제 문화를 융성시킨 월나라의 위상 또한 흔들렸을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역사에도 그와 같은 인물이 없지 않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대병을 살수에서 무찌른 을지문덕이, 강성한 거란의 침입에 맞서 대승을 거두어 나라를 구한 강감찬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영웅이 있으니 바로 이순신이다. 특히 그는 앞의 다른 영웅들과 달리 고된 일을 해내었으나 그 뒤의 영광은 조금도 누리지 못하고 전사하는 비운을 겪었다. 오늘날 그를 이 땅의 거의 모든 국민이 추종하는 데는 바로 이같은 안타까움 또한 자리하고 있을 테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순신에 대하여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에 대해 아는 대부분은 그가 거둔 성취에 한한 것이고, 그가 삶을 살아간 자세, 그의 삶을 지탱한 철학, 그로부터 내려진 선택들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렇기에 조선이란 나라는 그저 이순신 같은 영웅을 탄압한 구시대적 국가로만 묘사되기 십상이고, 또 이순신이란 인물 또한 기적적으로 나타난 예외적 영웅으로 그려지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이순신 3부작, 그 비장한 마지막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노량: 죽음의 바다>는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역사를 아는 모든 이들이 노량해전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7년에 걸친 전쟁의 마지막 결전이며, 바로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안다. 한산과 명량 해전과 함께 이순신의 3대 해전으로 꼽히는 이 전투는 그만큼 치열하고 의미 깊은 전투였다. 그 처절함은 압도적 전투로 사상자가 얼마 나오지 않았던 이순신 함대의 이력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냈다는 점에서 드러나며, 이순신을 비롯 이영남 등 아까운 무장 다수가 전사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노량전투는 사실상 전황이 기운 상황에서 퇴각하는 적을 쳤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비판과 마주해왔다. 제 나라로 돌아가려는 적을 굳이 쳐서 피아간 상당한 피해를 야기했다는 점, 사실상 전쟁의 승리가 아닌 복수를 위한 전투가 아니냐는 점 등이 이유로 꼽힌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감히 내놓을 수 없는 해석이라 하겠으나 전쟁을 겪은 바 없고 당대를 산 이들의 기록 또한 얼마 보지 않은 이라면 그 같은 감상을 갖기 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즉, 노량전투는 그 시작부터 통쾌하다기 보단 먹먹하고 찜찜한 감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전투의 향방은 시작부터 정해진 것이고, 구국의 영웅은 언제고 쓰러질 것이며, 전투의 절실한 이유조차 보는 이에게 자연스럽게 납득시키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영화는 그 모든 부담을 감당하고 타개하기 위해 수많은 장치와 설정을 두게 되고, 영화의 성패 또한 그 승부수가 제대로 작동했는지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노량>이 소재를 선택함과 동시에 성공이 예견된 앞의 두 작품, <명량>과 <한산>에 비해 크게 고전하며 혹평을 받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아들 잃은 아버지, 조국 지키는 장수
 
영화는 그 시작부터 환상을 보는 이순신(김윤석 분)을 그린다. 환상이란 다름 아닌 아들 면(여진구 분)의 죽음이다. 군중에서 아버지를 보좌하는 형들과 달리 아직 어린 나이로 고향인 아산에서 어머니(문정희 분)를 지키던 그다. 그러나 전국이 휩쓸리는 전란의 와중, 아산을 습격한 왜군 잔당에 맞서다 목숨을 잃고 만다. 혼인도 하지 않은 약관의 나이였다. 명량해전이 있었던 즈음 아들을 잃었으니 <노량> 속 이순신은 아들을 잃은 지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을 테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어린 아들의 죽음이 제 탓이라 여기고 슬퍼한다.
 
그로부터 아들의 죽음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이순신의 정서를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조명연합함대의 한 축인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정재영 분)이 적에게 퇴로를 열어주지 않으려는 이순신의 동기를 아들이 죽은 데 대한 복수심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렇고, 이순신 스스로 아들이 죽는 장면을 꿈으로 꾸는 장면을 중요하게 삽입한 것이 그렇다. 아들 뻘인 항왜 무장 준사(김성규 분)에게 유독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며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을 강조하는 것 또한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또한 실제로는 조선군 모두가 반드시 치러야 할 일전으로 여기고 있던 노량해전에 대하여 영화는 그 필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까지 등장시킨다. 그것도 지척에서 통제사를 보좌하며 조방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노량해전의 결정적 계책을 냈던 군관 송희립을 통해서다. 퇴각하는 적을 굳이 치려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그를 앞에 두고 이순신은 이대로 전쟁이 끝나면 더 큰 화가 올 것이라는 모호한 답을 내놓는다. 얼핏 비장하지만 듣는 입장에선 모호할 수밖에 없는 이 답은 자연히 당대 문헌을 살피지 않은 일반 관객에게까지 노량해전의 정당성을 의심케 한다. 이것이 이순신 개인의 분노, 나아가 그 아들의 죽음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도록 한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김한민의 이순신 해석이 아쉬운 이유
 
이는 퇴로를 막아 적을 치고 대승을 거둔 마지막 전투가 이순신 개인의 고집스런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즉, 조선의 방침, 조명연합함대의 군략, 조선 장수들의 의지를 넘어 이순신 개인의 결정으로 압도적 승전을 거둔 것처럼 여기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존재가 이 전투에서 또한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왜군에 대한 최종적 섬멸이 방침이었던 당대 조선군의 입장과 재침이 가능할 만한 전력을 보존한 채 적이 불리한 지형에서 벗어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군략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적 판단이 전혀 아니었다는 사실을 영화는 의도적으로 감추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이순신을 더욱 영웅적으로 보이게 하리라 믿었기 때문일 테지만, 반대로 직접 남긴 많은 글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사고를 깊이 살피려 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주어진 책임을 다하고 끝까지 신념을 꺾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영웅적인 이순신을 영화는 또한 영웅화하려 시도한다. 기록과 달리 그가 직접 북채를 잡고 전투를 독려하는 모습을 그리고, 총탄에 맞아 쓰러졌음에도 다시 일어나 독전고를 계속 울리는 장면을 넣으며, 수차례 슬로우모션으로 이를 연출하고, 그 절정의 순간에 사망한 옛 장수들의 환영을 보는 장면 등을 삽입한 것이 그렇다. 다분히 이순신 개인의 활약과 그가 겪어온 고통을 극화시켜 보이는 연출법으로, 영화는 그 클라이막스 전체를 이 기조 아래 이어간다.
 
그러나 이순신은 철저히 이성적인 장수였다.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을 깨뜨리고, 전란 내내 꿈꾸었던 부산포로 진격하여 적 본대의 퇴로를 끊고 적을 섬멸한다는 핵심 계획을 감정적인 돌발행동으로 저버렸을 리 만무하다. 기록에도 없는 이같은 연출은 아무리 슬로우로 잡아내고 부활에 가까운 설정까지 삽입한다 하더라도 도리어 장군을 깎아내리는 해석에 가깝다. 장군은 임무를 수행하다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지, 일대 대전이 될 전투를 앞두고 무리한 포위전을 독단적으로 진행하다 그 과정에서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숨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례적 인물? 유학이 길러낸 이상적 영웅
 
장군이 남긴 글을 읽을수록 그는 당대 조선 사회가 길러낸 가장 이상적인 인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순나라 임금의 신하라는 이름에서부터, 순임금과 우임금의 설화에서 여해라는 자를 가져온 선택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철저한 유학자의 삶을 살았다. 문신의 길을 포기하고 무인의 길을 걸었으나 평생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유학자이자 대장부의 길을 따랐다. 백의종군을 하고도 왕의 첫 어명 앞에 아직 수군을 해체할 수 없다는 반대장계를 올린 사례에서, 또 위독한 어머니를 보러 휴전 중에도 임지를 떠나지 못한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 그의 목표는 오로지 조선의 안녕과 선공후사의 정신, 나아가 남아장부로서의 부끄럽지 않은 삶에 있었다. 왜란 이전 수많은 사례로부터도 확인할 수 있는 이 같은 자세를 그가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으로 왜곡한 모습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영화는 전작들의 두 배 가까운 시간을 해전에 할애한다. 그리고 전작들보다 훨씬 많은 슬로우모션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용하고, 장군이 직접 치는 독전고 소리를 신파적으로 활용한다. 그러나 그 사이 사라진 가능성이 적잖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실제 노량해전의 의미며 전개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는 기회가 상실되고, 그 과정에서 이순신의 역할을 알 기회 또한 차단된다. 싸우지 않으면 더 큰 화가 닥칠 것이라거나, 저와 달리 모두가 전쟁 이후만 바라본다거나, 너는 아직도 모르겠느냐는 반복된 대사 너머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영화는 선명히 드러냈어야 했다.
 
그건 전란을 일으키고 조국의 안녕을 훼손한 적이 종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가 수호하는 바다를 물러나도록 허용할 수 없다는 군인의 당연한 임무수행이며, 당대 조선인 모두가 바라마지 않았던 온전한 승리의 방점을 찍겠다는 결심이자, 전란 내내 꿈꿔온 부산에의 공세적 진격을 위한 서전으로 노량해전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걸출했던 지도자의 끝을 더 비극적이고 멋지게 그리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으나 그 선택은 도리어 이순신이란 이를 왜곡해 소비하는 결과에 그쳤다. 그리고 이는 오늘의 한국이 이순신을 바라보는 바람직한 자세일 수 없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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