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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놓치다니... 내년에 무조건 갑니다

[화순적벽 문화축제] 화순적벽에서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까지

등록 2022.10.25 08:23수정 2022.10.2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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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적벽을 대표하는 노루목적벽 풍경. 물속에 반영돼 비치는 절벽의 모습이 아름답다. ⓒ 이돈삼

 
화순적벽이다. 평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다. 전라남도 화순군이나 광주광역시 누리집을 통해 예약을 해야 가능하다. 그것도 정해진 날짜에 버스를 타고 들어가 1시간 남짓 둘러보고, 다시 그 버스를 이용해 나와야 한다.

하지만 10월 22일과 23일은 달랐다. 화순적벽 문화축제가 열린 날이었다. 축제는 동복댐 조성으로 고향을 떠난 실향민들이 모처럼 만나 옛 고향을 추억하는 공간이다. 일반인들도 이날만큼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됐다. 무료 버스투어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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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적벽 아래에서의 물놀이. 동복댐이 조성되기 전인 1970년대 모습이다. 화순적벽 문화축제 전시 사진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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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미정 앞에서 본 옹성산과 화순적벽. 화순적벽 문화축제가 열린 10월 23일 오후 모습이다. ⓒ 이돈삼

 
화순적벽은 여전히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동복댐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름난 물놀이 장소였다. 피서지였다. 강변 모래사장이 좋아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지역 학생들의 단골 소풍장소였다. 대학생들도 단체로 찾고, 연인들은 데이트를 위해 찾았다.


적벽의 위용은 대단했다. 높이 100여 미터의 거대한 절벽이 하늘로 솟아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도 장관이었다. 협곡에 절집 한산사도 있었다. 절벽 가운데로 놓인 잔도(棧道)도 아찔했다. 스님들이 험한 벼랑길을 오갔다. 절벽 아래 물길에서는 삿대를 저어 가는 나룻배가 떠 다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들이 배를 타고 뱃놀이도 즐겼다.

4월 초파일 밤에 행해진 낙화놀이도 장관이었다. 장정들이 절벽에 올라 짚 뭉치에 불을 붙여 던졌다. 불붙은 짚 덩이가 떨어지면서 풀어헤쳐지면, 불꽃놀이가 따로 없었다. 불꽃이 물에 어리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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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이 품은 절집 한산사에서 배를 타고 나오는 사람들. 1960년대 풍경이다. 화순적벽 문화축제에서 만난 사진이다. ⓒ 이돈삼

 
여기에 동복댐이 만들어지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땅을 지키며 대대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쫓겨나고, 마을은 물속에 잠겼다. 거대한 절벽의 절반도 물속으로 사라졌다. 물놀이를 즐기던 백사장도, 나룻배도 옛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

동복댐이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1984년부터는 민간인들의 출입조차 막았다. 출입 통제는 30년 동안 계속됐다. 8년 전, 전남과 광주의 상생 차원에서 개방되기 전까지 화순적벽에 대한 기억은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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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동천(赤壁洞天)’이 새겨진 기념비. 적벽이 신선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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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구암마을에 들어서 있는 김삿갓 동상. 그가 말년을 보낸 압해 정씨의 종갓집 앞이다. 주변에 삿갓문학동산도 조성돼 있다. ⓒ 이돈삼

 
이 거대한 절벽을 '적벽'이라 부른 이가 조선시대 선비 최산두였다. 1519년 기묘사화로 화순에 유배된 그가 중국의 적벽에 빗댔다. '식영정 4선'의 한 사람인 석천 임억령은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고 했다. 적벽이 신선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정약용도 어렸을 때 화순에 머물며 적벽을 만났다. 아버지가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다.

'김삿갓'으로 알려진 난고 김병연도 적벽에 매료됐다. 적벽의 풍광에 반해 오래 머물렀다. 금강산 유람으로 시작된 방랑생활의 마침표도 여기에서 찍었다. 김병연이 숨을 거둔 곳이 화순적벽에서 가까운 구암마을이다.

김병연의 첫 무덤이 구암마을에 만들어졌다. 그의 묘는 몇 년 뒤 강원도 영월로 옮겨갔다. 그가 말년을 보낸 압해 정씨의 종갓집도 마을에 복원돼 있다. 삿갓문학동산도 조성됐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던 김삿갓의 방랑까지도 멈추게 한 화순적벽이다.


화순적벽은 조선의 비경 가운데 열 손가락에 꼽히는, 조선 10경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지금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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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댐이 품은 화순적벽 전경. 옹성산 아래에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이 자리하고 있다. 10월 23일 오후 모습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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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적벽에 수몰민의 쉼터인 망향정과 동복댐 조성으로 수몰된 마을 유래비가 나란히 서 있다. ⓒ 이돈삼

 
화순적벽에는 동복댐 건설로 물에 잠긴 수몰지역 주민들의 설움을 달래주는 망향정이 서 있다. 댐이 건설되면서 정든 고향을 떠난 주민은 창랑, 월평, 장학 등 15개 마을 5700여 명에 이른다. 수몰된 마을의 유래비도 애틋하다.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망향탑과 망배단도 있다.

동복댐 건설은 너릿재 터널 공사를 불러왔다. 너릿재에 터널이 뚫린 것은 1971년, 광주시민을 위해서였다. 동복댐의 물을 광주까지 끌어오는 송수관을 놓으려면 터널이 필요했다. 너릿재 터널을 통해 송수관로가 놓이고, 광주시에 동복댐 물이 공급됐다. 덕분에 제한 급수를 일상으로 알던 광주시민의 물 부족 문제도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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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릿재 터널 입구에 세워져 있는 5.18사적지 표지석. 너릿재는 80년 5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오간 길이다. 동복댐의 물이 광주로 공급되는 길이기도 하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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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남도청 앞 광장과 분수대. 분수대는 광주에 동복댐 물이 공급된 것을 기념해 만들었다. 80년 5월 민족민주화 대성회의 연단으로도 쓰였다. ⓒ 이돈삼

 
전라남도 화순군과 광주광역시 동구의 경계를 짓는 너릿재는 80년 5월 광주항쟁과도 엮인다. 너릿재는 당시 계엄군에 의해 고립된 광주와 광주 밖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광주시민군은 광주의 상황을 외부로 알리기 위해 너릿재를 넘나들었다. 화순과 보성, 장흥, 고흥 주민들은 광주에 살고 있는 자식들을 찾아 너릿재를 넘기도 했다.

계엄군에 의한 민간인 사상자도 나왔다. 너릿재로 오가는 길목인 주남마을 인근에서다. 그해 5월 23일 오전 11공수여단이 18명을 태우고 화순 방면으로 가던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15명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계엄군은 부상자 3명 가운데 2명을 총으로 쏴 죽이고 뒷산에 암매장했다.

광주시 동구,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분수대가 설치된 것도 동복댐과 연결된다. 광주에 동복댐 물이 공급된 것을 기념한 시설이었다. 도청 앞 분수대는 80년 5월 민족민주화 대성회의 연단으로 쓰였다. 광주시민들은 이 자리에서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촉구했다. 항쟁기간엔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어 계엄군의 학살 만행을 규탄했다.

광주의 6월항쟁과 촛불집회의 무대도 이 분수대를 배경으로 차려졌다. 분수대를 품은 도청앞 광장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산실이다. 지금은 '5.18민주광장'으로 이름 붙여져 있다. 빼어난 풍광 못지않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동복댐이고, 화순적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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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화순적벽 전경. 10월 23일 모습이다. ⓒ 이돈삼

#화순적벽 #동복댐 #너릿재터널 #518민주광장 #적벽버스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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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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