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9 13:54최종 업데이트 22.09.29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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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가 28일 일본 도쿄 아카사카 영빈관에서 기시다 총리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강제징용(강제동원)뿐 아니라 위안부 소송에서도 일본 자산 현금화가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덕수 국무총리가 '이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라는 인식을 간접적으로 표시했다. 

아베 신조 국장에 참석하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면담한 한덕수 총리는 28일 데이고쿠호텔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국제법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이해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건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대한민국의 신인도에 손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라고 발언했다. "꾸준히 소통해 크레딧이 돌아오도록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2018년에 파기한 일이 국제적 신뢰관계를 해쳤다는 한 총리의 발언은 위안부 소송 현금화가 진행 중인 고 배춘희 사건 등에 영향을 줄 여지가 많다. 한국 정부가 '이 문제는 끝났다'는 입장을 자꾸 표명하게 되면, 위안부 피해자 12명을 위해 배상 절차를 진행하는 법원 재판부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간을 달라는 취지의 외교부 의견서를 받은 뒤로 대법원은 강제징용 현금화 절차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이에 관한 대법원의 해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 한 총리의 발언은 유사한 상황이 위안부 소송 현금화에서도 나타날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든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이미 비협조적이다. 여기다가 한국 정부마저 법원에 부담을 주게 되면, 절차가 지연되는 정도가 아니라 또다시 세월이 하염없이 흘러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위험성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은 이 문제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사고방식이 피해자 측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데서도 절감할 수 있다. 28일 간담회에서 표출된 한 총리의 인식도 윤 정부 내의 그 같은 사고방식과 맞닿아 있다.

물론 국회 비준을 거친 조약이 아닐지라도 국가 간 합의를 파기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파기할 수밖에 없는 국제합의도 있다는 점 역시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이 주권자인 민주국가에서 국민의 뜻을 어기고 체결됐다면, 그런 국제합의는 당연히 폐기돼야 마땅하다. 군주가 주권을 갖고 있었던 왕조시대에는 '백성들이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주가 국제합의를 파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국가는 다르다. 처음부터 국민의 뜻에 어긋나는 조약이었다면, 외교적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정부가 파기하는 게 당연하다.

역사적 맥락 도외시한 한덕수 총리
 

지난 8월 31일 정의기억연대 주최로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부근에서 열린 제1559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가한 일본 단체 콜라보(Colabo) 회원들이 동시통역기를 귀에 꽂은 채 팻말을 들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에도 그랬고 2015년 위안부 합의 때도 그랬고, 일본 정부는 한국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국 정부를 합의 체결로 유도했다. 대한민국 주권자들이 명확히 거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합의를 유도한 일본 정부가 합의 파기를 이유로 신뢰관계를 운운할 수 있는지 따져보게 된다.

한덕수 총리가 말한 국가 간의 신뢰는 일차적으로 국민과 정부의 신뢰에 기초한다.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하지 않은 사안을 내용으로 정부는 외국과 계약을 체결하고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하지만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하는데도 외국과의 합의 체결을 강행했다면, 이런 합의가 파기된 것을 두고 신뢰관계 파탄을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위안부 합의는 이른바 '1965년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한일기본조약과 그 부속협정인 청구권협정·재일교포협정·어업협정·문화재협정 등으로 구성된 이 체제는 '식민지배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지 않으면서 국교파탄 상태를 복구했다'는 특징을 띠고 있다.

2015년 위안부 합의는 공식 사과 및 배상 없이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했다. 또 일본 정부가 제공한 금전을 제3자인 한국 재단이 배상금이 아닌 지원금 명목으로 피해자에게 지급하도록 했다. 일본 정부가 가해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했다는 점에서 1965년 체제의 특징이 위안부 합의에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이 합의의 기초가 된 1965년 체제는 한국 국민들의 명확한 반대 속에서 강행됐다. 이는 1964년 6·3운동 혹은 6·3사태로도 표현되는 한일협정 반대투쟁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 투쟁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대응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서 박정희 하야 구호가 등장한 1964년 6월 3일, 박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발포했다. 박 정권은 이것으로도 상황이 진정되지 않자, 협정 체결 2개월 뒤인 1965년 8월 26일 서울 지역 위수령을 발포했다. 경찰 병력으로는 시위를 막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육군 병력까지 서울에 투입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국민들이 명확히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독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속에서 1965년 체제가 등장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을 훤히 지켜보면서도 한국 정부를 부추겨 합의 체결로 이끌었다.

1965년 체제의 이 같은 생성 과정은 거기서 생겨난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은 물론이고 위안부 합의 같은 것이 과연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한국 국민과 한국 정부 간의 신뢰관계가 파탄된 상태에서 체결된 1965년 체제가 한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구속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만약 한국 국민들이 반대하지 않는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일본과 합의를 체결한 경우라면, 뒤늦게 이를 파기한 행위에 대해 신뢰관계를 이유로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한국 국민들이 극렬히 저항하는 속에서 체결된 1965년 체제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위안부 합의를 깬 것은 신뢰를 깬 것이라는 한덕수 총리의 발언은 이 같은 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김종필의 뒤늦은 후회
 

2016년 3월 10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자신의 책 <김종필 증언록>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1965년 체제가 올바르지 않다는 점은 이 체제를 잉태한 주역 중 하나인 김종필의 뒤늦은 후회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2016년 3월 4일 출간된 <김종필 증언록>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이 잘못됐으며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외면한 사실을 인정했다.

증언록 제1권에서 김종필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슈지만 한일회담에서 거론되지 않았다"라고 한 뒤 "1962년 11월 내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청구권 담판을 벌일 때도 이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라고 회고한다. 그는 자신이 이 문제를 알면서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문제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일본의 잘못을 덮어주자는 뜻도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김종필은 35세 때인 1961년에 5·16 쿠데타를 주도한 뒤 위안부·강제징용·강제징병 등을 덮는 방향으로 한일관계 복원을 추진했다. 그랬던 그가 75세 때인 2001년 요미우리신문사 사장실에서 일본 언론인들의 위안부관을 호되게 질책하는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본군에 딸린 민간인들이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감언이설로 여성들을 모집한 일을 거론했다. 증언록에 따르면 그는 "이 장면들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라며 "이렇게 모집한 여성들을 일부는 생산기관에 배치했겠지만 대부분은 즉각 강제로 중국으로 보내 가지고 위안부 노릇을 시켰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 꾸며낸 일이라고?"라며 <요미우리신문> 간부들을 나무랐다

이 일을 회고하면서 그는 "이건 내 머릿속에 사진처럼 남아 있는 나의 중고교 시절 고향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라고 한 뒤 "일제시대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의 누이들을 두 눈으로 직접 본 나의 호통에 와타나베 회장은 물론 논설위원 누구도 대답을 못했다"고 적었다.

한국 여성들이 위안부로 강제연행되는 장면을 기억하면서도 일본과의 협상 과정에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은 김종필의 모습은 1965년 체제의 주역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알려준다. 이는 이 체제가 올바른 기초 위에 서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할 일은 문제를 바로잡는 데 앞장서는 것이다. 한덕수 총리처럼 국제적 신뢰를 운운하며 문제를 덮으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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