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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역 '직장내 성폭력' 살인사건, 분노하고 말해야 합니다

[지하철 여성 역무원의 글] 안전하지 않은 일터에서 발생한 사건... 이제 바꿔야 합니다

등록 2022.09.18 18:32수정 2022.09.1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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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역 직장내 성폭력 살인사건'의 근본 원인과 올바른 대책과 관련해 한 지하철 여성 역무원의 글을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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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회의실 앞 복도에 마련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 추모 공간에 권인숙 여성가족위원장과 의원들이 쓴 추모 메시지가 붙어 있다. ⓒ 공동취재사진

 
고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합니다. 누군가의 죽음 뒤에 글을 쓴다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다시는 이러한 죽음이 반복돼서는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말합니다.

저는 고인과 같은 여성 역무원입니다. 처음 사건 소식을 접했을 때 비통함과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부끄럽고 미안하지만 '내가 죽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출근해서 취객 등 소란자를 상대할 생각에 무서웠습니다. 피해자를 노린 집요하고 계획된 범죄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판사가, 경찰이, 회사가 지켜주지 못했음에 분통했습니다.

이번 일은 불특정 승객에 의한 역무원 폭행이 아닌, 계획된 범죄였습니다. 하지만 근무환경이 안전했다면 일터에서 일하다가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성적 인력 부족... 2인 1조가 되지 못하는 상황

같은 역무원이었던 가해자는 피해자가 야간 근무를 하며 혼자 노출되는 가장 취약한 시간과 장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으로 이례적 상황에 출동할 때 '2인 1조'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순찰업무는 당연히 단독으로 하고 있습니다. 순찰업무를 혼자 하지 않았다면 가해자가 공격할 생각은 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피해자가 홀로 화장실 내 비상호출벨로 위험을 알리는 상황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어쩌면 그날 죽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안전하지 못한 노동조건에서 발생한 산업재해이고 동시에 명백한 젠더폭력입니다.
서울교통공사와 서울시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노동자로서 같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근무조건을 제공하지 않은 채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젠더갈등을 방치하고 성차별적 인식을 방조해 왔습니다.

모든 역에 남성 직원 침실은 있는 반면 여성 직원 침실은 그렇지 않아서, 침실이 없는 여성 직원들은 막차와 첫차를 타고 침실이 있는 다른 역으로 이동하느라(이때도 혼자 무방비로 노출됩니다) 첫차, 막차 감시 업무를 하지 못합니다. 안전발판 등 각종 무거운 작업도구는 경량화 되지 않았습니다. 소란자 상대 업무도 남성 직원이 주로 맡습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여성 직원과 같은 조를 하면 남성 직원만 힘들다'는 불만이 나옵니다.


역무원들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각종 안전사고와 민원상황에 혼자 대처해야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충분한 인원이 있다면 위의 일들을 함께 나눠 할 수 있고, 혼자 대처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성과 여성을 구분지을 것이 아니라 같은 일을 하는 노동자로서 안전하게 함께 존재할 수 있도록 공사와 서울시가 책임져야 합니다.

성차별에 기반해 발생했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지켜지지 않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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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9월 18일 한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 연합뉴스

죽음으로까지 가기 이전에 사내 성폭력과 스토킹 범죄에서 완전한 분리와 보호가 이뤄졌다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구속영장을 기각한 사법부, 보호감시를 해제한 경찰, 피해자가 일하는 공간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공사 모두 여성의 호소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공사의 일률적이고 형식적인 성희롱성폭력예방지침과 처리 과정은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피해자(신고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합니다. 경찰 조사 중인 사건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변명입니다. 분리 조치 이후에도 가해자는 피해자의 근무지와 근무형태 등을 너무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가해자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안전한 근무지에서 일할 수 있도록 조치해야 했습니다.

조직 내부의 특성과 문화는 경영진도 잘 알 것입니다. 서울교통공사는 구성원 내부 세대 격차가 크고, 여성은 소수이며, 그동안의 크고 작은 직장 내 성폭력 사건 처리 과정에서 미흡한 대응도 있었습니다.

2차가해 방지는 사건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하지 말고 오히려 잘못된 소문이 퍼지도록 방치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희롱, 성폭력에 해당 되는 행위임을 명백하게 밝혀 피신고인을 옹호하거나 신고인을 예민한 사람 취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피해자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조직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불특정인에 의한 소위 '묻지마식' 범죄가 아니었습니다. 구조적인 성차별에 기반하여 발생했고, 안전하게 일할 노동자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은 사건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젠더갈등으로 변질되고, 내부 동료들로 하여금 무력감과 패배감을 느끼게 하진 않을까 우려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애도하고, 분노하고, 말해야 합니다. 정부와 공사에 책임을 묻고, 제도와 인식을 바꾸기 위해 고민하고 연대할 때입니다. 서울시와 사법부가 책임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신당역스토킹살인사건 #지하철노동자 #지하철 #서울교통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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