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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수첩? 뭐가 문제인지 좀체 모르는 '군'

[주장] 군대 내 성폭력, 리스크 관리로는 해결할 수 없어

등록 2021.08.21 16:38수정 2021.08.21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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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피해자가 '관심병사' 취급을 받아야 하나요?
- 이 중사를 추모하는 온라인 추모공간(https://bit.ly/2T9kWtw)에 한 시민이 올린 글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2010년대까지만 해도 '관심병사'로 분류된 군인들은 스마일 모양 배지를 달고 다녀야 했다. 관심병사에는 질병과 장애를 가진 군인, 성소수자, 폭력적인 군대 내 조직문화에서 적응하기 어려워하는 모든 이들이 분류된다. 

이 제도는 원래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병사'를 특수하게 지정하여 관리하고자 도입되었지만, 오히려 관심병사라는 것이 알려져 따돌림과 폭력을 당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스마일 배지를 차고 있는 군인은 웃지 않았다. 이 지독한 역설 속에서 스마일 배지는 군인들의 주홍 글씨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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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에 나오는 관심병사 '원 일병'. 스마일 배지를 달고 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군대는 사회적 소수자도 내부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편하는 대신 관심병사 제도를 도입했다. 폐쇄적이고 위계적인 문화, 폭력적인 조직의 시스템, 차별과 배제를 개선하기보다 한 개인을 '리스크'로 지정하여 관리하는 것이 더욱 간편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리스크가 되는 곳, 그곳은 군대였다.

'피해자 수첩' 이라는 주홍글씨

2021년 5월, 한 명의 여성 군인이 성폭력 사건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폐쇄적인 조직문화, 가해자를 비호하고 피해자를 비난했던 군 관계자들, 2차 가해를 일삼는 사람들까지. 이 모든 일이 예견된 참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던 사람들의 분노가 꿈틀거렸다. 이전에도 성폭력 사건으로 목숨을 끊은 여성 군인은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 마음이 된 것처럼 변화를 외쳤다. 정치인들은 소리 높여 군대 내 성폭력 근절을 외쳤고, 국방부 장관은 고개를 숙였으며, 특검과 특조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번에는 좀 다르겠지'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었고,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의 결과로 등장한 것은 또 한 명의 여성 군인이 성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현실이었다.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해군 중사는 5월 말 상관에게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는 사건 최초 신고 이후 70여 일이 걸렸다. 업무 배제와 괴롭힘도 따라왔다. 신고를 접수한 상관은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신원을 간접적으로 알리기도 했다. 8월 12일, 두 번째 신고를 접수한 지 사흘 만에 피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모든 일은 5월에 일어났던 일과 판박이처럼 닮아있었다.

스마일 배지는 성폭력 사건 이후 또 다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18일 국방부는 '민관군 합동위원회 제4분과 7차 회의'에서 피해자에게 '피해자 수첩'을 나누어 주는 것을 성폭력 사건의 해결책으로 제안했다. 수첩에는 피해 이후 피해자가 따라야 할 행동 요령과 2차 가해 방지 방안이 수록될 예정이었다.

스마일 배지가 폭력과 낙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지 않았던 때와 같은 무심한 대책이었다. 군대 내 수많은 피해자들은 신고 이후 신원을 보장받지 못하고, 괴롭힘과 따돌림의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이 은폐된 대책이기도 했다.

피해자 수첩이 지급되는 순간, 누가 그 수첩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수첩을 받았는지 더욱 찾아내기 쉬워질 것이 뻔했다. 국방부 성폭력 사건 발생 시 대응 매뉴얼에 적혀있는 "개인 신상 보호와 피해사실 보호"를 국방부가 먼저 도외시한 것이다.

스마일 배지와 마찬가지로, 폭력의 가해자에게 요구되어야 할 것들이 이번에도 피해자에게 요구되었다.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성폭력 사건 이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피해자 수첩' 속 빼곡하게 적혀 있는 행동요령과 2차 가해 방지 방안을 읽는 피해자는 피해라는 짐 외에 자기 검열이라는 짐을 하나 더 떠안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이 진짜 피해자임을 증명해야 하는 수칙들이 들어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 수첩'의 내용을 지키지 못했기에 이 모든 고통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신상 노출과 자기 검열, 바뀌지 않는 조직. 그 속에서 사건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다.

피해는 '리스크'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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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대전 유성구 국군대전병원에서 근조 화환을 실은 화물차가 출입 허가 후 정문을 지나고 있다. 국군대전병원에는 남성 상사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었다는 신고를 한 후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된 해군 여성 중사 빈소가 마련됐다. ⓒ 연합뉴스

 

국방부가 제시해야 할 것은 '피해자 수첩'이 아니었다. '피해자 수첩'으로는 어떠한 피해도 구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뿐인 매뉴얼이 어떠한 이들도 구제할 수 없던 것과 마찬가지다. 스마일 배지도, 피해자의 신원을 오히려 드러낼 수 있는 수첩을 배부하자는 보여주기 식 대처도, 기능하지 않는 매뉴얼도 동전의 양면처럼 똑같이 닮아 있다.

피해를 '리스크'로 여기는 대전제 속에 끊임없이 피해자의 행동과 대처만을 공염불처럼 반복하는 대응책만 담겨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조직에서 피해자가 선택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지란 존재할 수 없다. 조직을 위해 가해를 은폐해야겠다는 생각 속에 어떠한 좋은 매뉴얼도 기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군대 내 성폭력 문제는 단순히 매뉴얼 상 몇 가지 문장을 고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군대 내부에서 모든 것들을 처리할 수 있다고 자부하며 피해를 은폐하는 시도도 막아야 한다. 군 인권보호관을 마련하고, 군사 법원을 개혁하며, 군형법 개정과 더불어 폐쇄적인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한 시도가 이어져야 한다.

성폭력 문제 앞에 군대라는 '특수 상황'이 핑곗거리가 될 수 있는 시대는 끝이 났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군대 내부 성폭력 피해를 말하지 못한 채 고통을 참아내는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두 명의 여성 군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악마 같은 개인'이 아닌 집단적으로 쌓아 올라간 군대 내부의 문화였다. 피해를 '리스크'로 생각하는 문화,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게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 것이 당연한 문화, 마침내 인간 그 자체를 '리스크'로 관리하는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군대 #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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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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