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하수상한 시대에 금수저 물고 태어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3회] 부계나 모계가 조선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명문집안이었다

등록 2021.03.04 17:14수정 2021.03.04 17:14
0
원고료로 응원
인물은 시대의 산물이다. 허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난 1569년을 전후한 조선 사회상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551년 불교계에 일대 변화가 일었다. 개국 이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일관해온 정부가 '숨어사는 현자'로 불리는 승려 보우(普雨)를 문정대비의 비호로 봉은사 주지에 임명하고 도첩제와 승과를 부활시켰다. 
 
문정대비가 죽은 뒤 보우는 대피했으나 붙잡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제주 목사가 구실을 붙혀서 매를 때려 죽이고, 조정에서는 다시 승과ㆍ도첩제를 모두 폐지시켰다. 이를 계기로 불교에 대한 유교측의 척불사상은 더욱 강화되었고, 승려들은 더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a

소설 <임꺽정>의 배경이 되었던 안성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로 위 사진은 '병해대사와 임꺽정 7두령', 아래는 '해소국사와 7인의 도적'. 소설 <임꺽정>의 배경이 되었던 안성 칠장사 명부전의 벽화로 위 사진은 '병해대사와 임꺽정 7두령', 아래는 '해소국사와 7인의 도적'. ⓒ 이성인

 
1558년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 임꺽정(林巨正)은 양주의 백정 출신으로 작은 산적패로 시작하여 세력이 커지자 관청과 악덕 부자를 털어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의적활동으로 민심을 얻었다. 명종 때에 외척이 권력을 잡으면서 부정부패가 극도에 이르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유랑민이 되거나 산도적패에 들어갔다. 
 
임꺽정은 이런 자들을 모아 경기ㆍ황해ㆍ평안ㆍ강원도까지 무대를 넓히고 개성과 서울에도 출몰하였다. 힘이 쎄고 성격이 급해서 부모가 걱정이라고 하다가 '꺽정'이라고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뒤늦게 세금을 줄여주는 등 백성들의 도적패 가담을 막고자 시도하였다. 임꺽정은 3년 만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의 모티브가 되었다.
  
a

임꺽정 상/고석정 풍광과 어울리지 않지만 밉지는 않다 임꺽정 상/고석정 풍광과 어울리지 않지만 밉지는 않다 ⓒ 김정봉

 
1561년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지었다. 풍수도참설을 비롯하여 각종 비과학적인 비설이 난무하던 시대에 토정 이지함은 『주역(周易)』에 뿌리를 두었으나 괘(卦)를 얻는 방법과 괘가 크게 다른,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게 하는 내용을 담아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토정비결』은 당대의 어떤 서책보다 백성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1563년 조선시대 최고의 기녀 황진이(黃眞伊)가 태어났다. 미모에 노래도 잘했으며 총명하고 예술에 대한 재능도 뛰어났다. 서경덕을 스승으로 하여 학문에 열중하던 중 이웃 총각이 자신을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죽자 회의를 느껴 15세에 기생이 되었다고 한다. 「깊은 밤」이란 제목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린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주석 1)


허균이 태어나고 두 해 후에 선조가 등극하였다. 그의 생애는 선조 시대에 40여 년 살고 뒤를 이은 광해군 시대에 10여 년을 살다가 목숨을 빼앗겼다. 격동의 시대이고 견변의 사회였다. 남달리 총명하고 영발했던 그로서 평범하게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균은 1569년(선조2) 11월 3일 외가인 강원도 강릉에서 아버지 허엽(許曄, 1517~1580)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등을 지내고, 어머니는 예조참판을 역임한 김광철(1498~1550)의 딸이다.
 
a

강릉 '초당마을숲'과 경포호가 만나는 곳에 있는 다리 장식. 허균의 대표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이 손을 흔들고 있다. ⓒ 신한슬

 
허균은 자기가 태어난 강릉 외갓집 터를 이렇게 설명했다.

강릉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되는 곳에 사촌(沙村:사천의 옛 지명)이 있다. 동쪽으로 큰 바다를 마주하였고, 북으로는 오대산ㆍ청학산ㆍ보현산 등 여러 산을 바라보는 곳이었는데, 큰 냇물 한 줄기가 백병산에서 나와 마을 가운데로 흘러들었다. 이 냇물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위아래 수십 리에 걸쳐서 수백 호나 되었다. 이 집들은 모두 양쪽 언덕에 기대어 있었는데, 냇물을 바라보며 문을 내었다.
 
개울 동쪽의 산줄기는 오대산 북쪽으로부터 용처럼 꿈틀거리면서 내려오다가 바닷가에 와서 사화산의 수(戍)자리가 우뚝 솟았다. 그 아래로 예전에는 큰 바위가 있었고, 개울이 엇갈리는 곳의 밑바닥에 늙은 이무기가 엎드려 있었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어느 가을날, 이무기가 그 바윗돌을 깨뜨리고 사라져버렸다. 바위가 두 동강이 나면서 문처럼 구멍이 뚫렸으므로, 사람들이 교문암(蛟門岩)이라고 불렀다. (주석 2)
 

부계나 모계가 조선사회에서 빠지지 않는 명문집안이었다. 허씨 가문은 고려 말 재상이었던 문정공 허공(許珙)의 혈통을 받아 대대로 고관대작을 이어오고, 어머니 집안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이다. 
 
아버지 초당공(草堂公) 허엽은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한 청주한씨 부인에게서 2녀 1남을 낳았다. 장남이 허봉(許篈), 딸이 허초희(許楚姬), 막내아들이 허균이다. 첫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은 허성(許筬)이다.
 
허균은 뒷날 자신의 가문과 학문에 자부심을 가졌고 중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는 글을 지었다.

우리 선대부(초당 허엽)의 문장과 학문과 절행을 사림에서 높게쳤다. 큰형(약록 허성)이 경전을 전해 받았고, 문장도 간략하면서 무게가 있었다. 작은 형(하곡 허봉)은 학문이 넓고 문장이 매우 고고하여 근래에는 견줄 사람이 드물다. 
 
누님(난설헌 허초희) 시는 더욱 맑으면서 장하며 높고 고와서 개원開元(당현종의 연호) 대력大曆(당태종의 연호) 시대 사람들보다 뛰어났다는 명망이 중국까지 전파되어 천신사부(薦紳士夫)가 모두 칭찬한다. 
 
재종형 체씨는 고문을 공부해서 시격이 매우 높고 굳세며 부는 더욱 뛰어나 국조 이래 그 짝이 드물다. 
 
나도 불초하나 또한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아서 문예를 담론하는 사람 중에 이름이 들어가고 중국 사람에게도 제법 칭찬을 받는다. 그리고 네 부자가 함께 제고(制誥)를 받았다.    

아버님이 작고하자 형이 또 호당(湖堂)에 사가(賜暇)되었으며 삼형제가 모두 사필(史筆)을 잡기도 하였다. 작은 형과 나는 함께 과거에 장원을 했으며, 나는 또 세 번이나 원접사(遠接史)의 종사관이 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당시에 문헌하는 집으로는 반드시 우리 가문을 첫째로 꼽았다. (주석 3)


주석
1> 문정희 엮음, 『기생시첩』, 28쪽, 해냄, 2000.
2> 허경진, 『허균 평전』, 33쪽, 돌베개, 2002.
3> 허균, 『성옹지소록』 하권, 여기서는 장정룡, 『허난설헌 평전』, 65쪽, 새문사, 2008.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본대로 기록한다'의 참상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부인 김건희의 '미대' 미스터리
  2. 2 "그래도 남편은 살아왔잖냐"... 비밀 단톡방의 슬픔
  3. 3 "아파트 2층 찾는 사람은 없어요" 알지만 샀습니다
  4. 4 "농촌에 쓰레기 쌓아 수천억 버는 사람들, 이건 미친짓"
  5. 5 다단계 사기면 어때? 위험천만 '힙 투자' 빠진 사람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