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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온 가족이 총출동해 벌인 일

오랜만에 만들어본 눈사람... 너무 빨리 녹지 않길

등록 2021.02.04 16:41수정 2021.02.0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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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국에 막걸리 파티를 한다기에 혀를 찼는데, 남편이 생각보다 일찍 귀가했다. 웬일이냐고 물었는데 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모자까지 뒤집어쓴 패딩 코트에 쌓인 눈이 대신 설명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열고 보니, 세상에! 그새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막걸리 파티에서 몇 잔 들이켜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보니, 아무래도 눈발이 심상치 않아 일찍 술판을 걷었다며 너스레를 떠는 남편은, 나와 딸애에게 일찍 귀가한 포상을 '우쭈쭈'로 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일기예보는 물론이고, 중대본에서 대설 알람 문자까지 보내왔는데 술판을 벌인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지"라는 딸애의 지청구를 먹고서야 씻으러 들어가니 원...

거나하게 마시지 못한 막걸리가 못내 아쉬웠는지, 막걸리 파티에 안주로 마련했던 데친 표고버섯과 막걸리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더니 술잔을 챙겨와 앉는다. 동호회 모임 멤버 중 하나가 아주 맛있다고 소문난 막걸리를 주문했는데, 그게 하필 오늘 왔다고 한다.

내 생각이 나서 막걸리를 짱 박았다며 생색을 내는 바람에, 같이 한 잔씩 나눠 마시게 되었다. TV를 보고 있던 참이라 마저 보고 나니 어언 한 시간쯤 지났나, 문득 거실 창 블라인드를 살짝 제쳐 밖을 보니, 눈이 아까보다 더 많이 쌓여 있었다.

주택 사니 눈이 달라 보이네 

마당에 소복이 쌓인 눈을 보니 설심(雪心)이 동했다. "간만에 눈사람 만들어볼까"라는 내 말에 식구들이 일제히 의기투합한 걸 보면, 각자 펑펑 내리는 눈이 마음에 있었나 보다. 복장을 갖추어 입고 나오니 날은 포근했다.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온 눈이기도 하지만, 주택이 아니었다면 실감하지 못할 눈의 깊이와 높이를 느낀다. 발목까지 오는 방한화가 푹 파묻히는 걸로 봐서 적어도 10센치미터는 쌓인 듯, 눈사람 만들기 제격이다.


눈이 백설기 눈이라 흩어지지 않고 쉽게 뭉쳐졌다. 갓 내린 눈이라 잘 뭉쳐지는데다 워낙 높이 쌓인 지라, 딸애 머리만 하게 뭉쳐진 눈 덩어리를 굴리니 금세 불어났다. 이렇게 수월한 눈사람 만들기도 처음인 것 같다. 오래지 않아 딸애는 눈사람의 아랫부분을 나는 윗부분을 완성해 합체했는데, 눈사람 키가 딸애 키만 해졌다.

자 그럼 이제 단장을 좀 시켜야지. 합체한 몸이 매끈하지 못하니, 파인 곳은 눈을 덧붙여 볼륨을 살려주고 과하게 불퉁한 부분은 깎아 낸다. 나름 균형 있는 몸매를 만들고, 마당에 있는 부품(나뭇가지)을 활용해 눈, 입, 팔을 붙여 생명을 불어 넣어 본다. 딸애가 기어이 뿔을 달아야 한다기에, 열매가 말라붙은 가지로 머리 위 뿔을 심고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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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 pixabay

 
'가만있어 봐. 이 사람은 뭐 하고 있는 거지?' 눈사람 만들기 삼매경에 빠진 딸애와 나는 그제야 남편이 눈사람 만들기에 조력하지 않은 걸 깨달았다. 그래도 눈사람 인증샷엔 아빠를 끼워주자는 딸애 제안에 집 밖으로 나가 보니 세상에, 이 사람, 4미터는 족히 넘을 집 앞 도로를 싹 밀어놓은 것이 아닌가.

허리 잡으려고 뭘 이렇게까지 하냐는 내 말에,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남편의 좀 과한 몰입은 늘 당황스럽다. 하지만 앞집 노부부가 비록 앞 도로일망정 눈 길을 안전하게 걸어 다니실 걸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지난번 눈 왔을 때, 집 앞 도로 눈을 치우는 남편에게 앞집 할아버지가, "요새도 집 앞 눈 치우는 사람이 다 있네"라며 흐뭇해했다고는 했다.

인증샷을 찍다 문득 딸애가 눈사람 오랜만에 만든 것 같다고 한다. 그 말에 각자 기억의 회로를 더듬는다. 또 세상에다. 각자의 기억을 소환해 얼추 맞춰보니, 마지막 눈사람이 딸애 열두어 살 때쯤이 아닌가. 눈이 제법 온 어느 날, 당시 살던 아파트 단지 앞에 작은 동산 같은 공원이 있었는데, 거기를 갔던 날이었다.

눈 쌓인 공원에 가니, 아이들 몇이 눈썰매장에서 타는 눈썰매 보드를 가지고 바쁘게 오르내리는 게 보였다. 경사가 급한 한 곳이 반질반질하게 길이 난 걸 보니, 벌써 수십 차례 타며 놀았던 모양이다. 아이들이 눈 미끄럼 타는 걸 보니 딸애도 타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우리는 눈썰매 보드가 없었다.

남편이 대신 눈사람을 만들자고 제안하자, 우리는 바로 으쌰 으쌰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내린 지 좀 된 눈이라 잘 뭉쳐지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좀 작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 기억 속 마지막 눈사람이었던 것이었다.

딸애가 크며 눈사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이렇게 눈사람과 멀어진 데엔 아파트라는 거주 구조가 주는 물리적 거리감도 큰 몫을 했다. 고층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눈은 그야말로 관상용이다. 고층에서 밖을 내려다보며, 타 건물의 처마나 지붕 등에 쌓인 눈을 눈대중하며, 많이 왔네 적게 왔네 강설량을 짐작할 뿐이니 말이다.

주차장이 지하에 갖추어진 아파트 단지에 살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지 않는 한 동선이 눈 쌓인 밖을 향하게 되지 않으니, 실제로 눈이 와 쌓인 걸 보기는 하는데 경험할 수 없다고나 할까.

이런 아파트에서 줄곧 살다 보니 눈이 와도 조망할 뿐이었는데, 주택의 눈은 그렇지가 않다. 우선 문만 열면 눈 풍경이 들이닥치기도 하지만, 생활면에서도 실재적 눈을 경험한다. 지하주차장을 벙커처럼 들어왔다 나갔다 할 수 없는 주택은 최소한의 동선의 눈을 치워야만 걸어 다니며 생활할 수 있다.

또 눈이 아무리 와도 걱정 없이 주차장에 모셔져있는 차를 타던 아파트 때와는 확연히 다르 것이, 일단 차에 덮인 눈을 대충이라도 제거해야만 차를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주택과 아파트의 눈은 실감되는 격차가 크다. 불편하다면 불편 하달 수 있는 이 작은 차이가 생활과 안전이라는 감각을 새롭게 인지하게 한다.

서로의 기억을 짜깁기하며 우리는 눈 마당에서 기꺼이 인증샷을 찍는다. 이내 서로 알 것 같은 회심의 미소를 주고받기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뭉쳐 던지기 시작한다. 눈공은 만들기는 잘 만드는데 왜 이렇게 목표물 조준이 안 되는 건지, 던지는 게 타깃(식구들의 몸)에 잘 맞지가 않는다.

어려서부터 눈싸움에 도가 튼 남편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이기에 딸애와 나는 암묵적 동맹으로 협공한다. 어릴 적 눈싸움에 이기려고 작은 돌을 넣어 눈공을 만들어 싸웠다는 남편은 협공해도 이기기 어려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장난기가 발동한 우리는 마침내 수영장에서 물 파편을 날리듯 눈을 퍼 날리며 싸운다.

에구구... 나이는 속일 수 없지. 눈사람도 모자라 생각지도 않았던 눈싸움까지 하고 나니 노곤하다. 눈으로 젖은 몸을 털고 들어오니, 또 또 세상에, 자정이 훌쩍 넘어있는 게 아닌가. 세수와 양치를 하고 곤한 몸을 눕힌다. 딸애가 밤 인사를 하러 와서는 옆에 누우며 속삭인다. "엄마 오랜만에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해서 정말 행복했어."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딸애의 감상이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내 마음 속 한 곳은 어느새 우울한 다른 곳으로 흐르고 만다. 그래. 이게 우리 집이면 얼마나 좋겠냐. 아파트 팔았을 때 집을 샀어야 했는데. '벼락거지' 되어보니, 집 없는 설움으로 애달프다. 이 나이에 다시 집 걱정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멘붕'된 멘탈은 이런 속절없는 속엣말을 무시로 비어져 나오게 한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제 만든 눈사람이 한 15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어, 쓰러지면 안 되는데. 아침 커피를 마시고 마당에 나가 기울어진 눈사람을 다시 세워본다.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 산 것 같은 초조함으로 균형감을 잃고 기우뚱해진 내 마음도 이렇게 붙잡아 세워 보고 싶다. 따뜻한 아침볕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연기 같은 입김을 불며 혼잣말을 해본다. 눈사람, 너무 빨리 녹지는 마.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눈사람 #눈싸움 #주택살이 #대설 #벼락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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