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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딸 폰에 저장된 연락처 '좀 급한 듯'... 뭔가 봤더니

가족 번호를 저장한 뜻밖의 이름... 외로움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을까

등록 2021.01.15 12:28수정 2021.01.15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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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딸의 핸드폰을 바꿔 주었다. 요즘 중학생들은 사과 한 입 배어 문 회사의 핸드폰이 아니면 꺼내기도 창피하다는 말이 괘씸해 안 사줄까, 했었다. 그런데 딸이 기말고사를 잘 보면 원하는 폰으로 바꿔달라는 협상안을 제시해온 것이었다.

요것봐라? 맹랑한 배수진에 고민하다 이왕 바꿔주어야 할 딸의 핸드폰 상태를 감안하여 우리의 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협상안을 먼저 제안했던 딸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여 결국 원하던 그 회사의 폰을 손에 넣었다.

문득, 새로 산 핸드폰에 엄마 번호를 무슨 이름으로 저장했는지 궁금해졌다. 딸은 그냥 '엄마'라는 이름으로 저장을 했다고 한다. 그냥 '엄마'라니... 이게 이렇게 안심되는 거였구나. 내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1년 전 딸의 구형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내 이름이 너무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그냥 '엄마'는 너무 밋밋한 거지.

중학생 딸아이가 가족 핸드폰 번호를 저장하는 법
 

아빠에게 전화오면 뜨는 발신자. ⓒ 오마이뉴스

 
1년 전 쯤, 핸드폰에 엄마 이름을 '미친*'이라고 저장했다는 10대 여중생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딸이 나를 어떻게 저장해 두었나, 알고 싶었다.

"혹시 너도 핸드폰에 엄마를 '미친*'으로 저장한 거 아니야?"라는 내 물음에 픽, 웃는 딸을 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뭐라고 저장했는지 보여달라고 하니, "아니, 그냥, 뭐, 별 거 아니야"라고 딸이 한참을 뜸을 들였다. '엄마'라고 저장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다, 엄마는 진짜 '미친*'만 아니면 뭐라도 괜찮다' 했더니 그건 아니란다. 그럼 안 보여 줄 이유가 뭐가 있냐고 몇 분 옥신각신하다 딴 말 하지 않기, 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겨우 확인한 딸의 핸드폰 엄마 자리에 저장된 이름.

'안 받는 게 좋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나, 자네?'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뭐지? 싶었다. OOO 이름 세 글자나 기껏해야 '초등 친구', 'OO 선생님' 정도를 연락처 이름으로 사용하는 나였기에, 이런 문장형의 문구가 이름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이게 '엄마'를 대신한 이름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후에도 이게 '미친*'보다 나은 건지 빠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웃겨서 웃긴 했는데,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복잡한 심정이었다.

"엄마에 대해서 이렇게 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만큼... 엄마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증거인 거지~."

더듬거리다가 끝말을 빠르게 붙여 끝내는 것은 딸이 뭔가 애매한 상황을 항변할 때 말하는 습관이다. 딸이 나의 복잡한 얼굴 표정을 보니 뭔가 쉴드를 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던가 보다.

딴 말 하지 않기, 라고 약속했지만, 이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어쨌든 엄마 전화를 안 받고 싶다는 뜻 아닌가? 엄마 전화가 받기 싫었던 거냐, 평소에 이렇게 생각한 거냐, 정말 순수히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라고 딸의 진짜 속마음을 알고 싶어진 나는 말이 많아졌다.

"아니, 그냥. '엄마'라고만 하면 재미없잖아."

딸이 씩, 웃었다.

"좋은 뜻이야, 좋은 뜻~"이라고 덧붙이면서. 나는 정말 엄마 전화를 받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재차 확인받은 뒤에야 애매한 마음을 접기로 했다. 한창 사춘기를 통과 중인 딸이 '미친*'으로 저장 안 한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며.

그때 아이 마음이 어땠을까, 몰라줘서 미안해

다른 가족 이름은 어떻게 저장했는지도 궁금해서 확인해 보니, 아빠 이름은 '좀 급한 듯', 남동생 이름은 '응, 끊어'였다. 평소 아빠가 딸에게 전화할 일이 별로 없으므로 아빠로부터 전화가 온다는 것은 엄마와 통화가 되지 않을 때 해결해야 할 급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다. 사춘기 누나가 남동생을 어찌 생각하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입력된 문구대로, '너하고는 말 섞기 싫다'는 뜻이다.

엄마의 전화는 받지 않는 게 좋을 듯하고, 아빠는 급할 때 아니면 전화할 일이 없으며, 남동생은 통화하기 싫은 대상이라면, 딸아이는 누구와 속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닌 게 아니라 당시에 딸아이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초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와 헤어져 새 친구를 사귀지도 못하였고, 새로운 중학교 환경에 적응하기도 힘들어했다. 학습지나 악기를 배우러 다니는 것을 제외하고는 학원도 많이 안 다녀본 아이가 매일 저녁 늦게까지 학원을 다니게 된 스케줄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딸이 핸드폰에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붙였던 이름은 가족을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과 느낌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아이는 재미라고 둘러댔지만, 저 표현을 만들어 저장했을 때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핸드폰의 가족 이름들이 아이 마음속 아우성의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보는 엄마 마음이 또 서늘해진다.

다행히 딸의 사춘기 터널이 7부 능선을 넘은 듯하다. 말도 많아지고 애정 표현도 예전처럼 많아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젠 좀 '신박한' 이름으로 '엄마' 자리에 저장되고 싶다는 욕심, 조금은 내어 봐도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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