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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과 군무도독부 창설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12회] 3ㆍ1혁명은 특히 만주와 노령지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장독립전쟁의 계기를 만들었다

등록 2021.01.18 17:32수정 2021.01.18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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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국치 9년 만에 거족적으로 봉기한 1919년 3ㆍ1혁명은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특히 만주와 노령지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장독립전쟁의 계기를 만들었다.

국내에서 독립시위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렀거나 '3ㆍ1혁명의 세례'를 받은 청년들이 국경을 넘어 만주와 노령에서 속속 독립전쟁에 참가하였다. 이 시기 만주에는 독립군 단체가 그야말로 우후죽순격으로 조직되었다. 북간도 방면의 독립군 단체이다.(괄호 안은 책임자와 병력)

대한국민회(회장 구춘선, 독립군 450명), 정의단(서일, 중광단의 후신), 북로군정서(총재 서일, 단원 1600명, 독립군사령관 김좌진, 정의단의 후신), 대한독립군(단장 홍범도, 단원 400명), 대한광복단(단장 김성극, 단원 300명), 군무도독부(총재 최명록, 단원 600명), 의군단(산포대장 박만홍, 단원 400명), 의민단(단장 망우룡, 단원 300명), 의군부(단장 이범윤, 단원 400명), 대한신민단(단장 김규면, 단원 3만 명), 야단(단장 신보, 단원 약 2만?), 도독부(임시독판 겸 군무총지휘관 홍범도), 단원 330명), 애국청년혈성단(단장 김국조), 대한청년단(단장 김성권), 신대한청년단(회장 이경호, 회원 350명), 복황단ㆍ창의단(단장ㆍ이범모), 급진단ㆍ청년맹호단(단장 김상호), 보황단(김승), 충열단(단장 김학수), 조선국민의사회(회장 김영학), 건국회(황병길), 자위단(단장 최경호), 자유공단(단장 서일),  대한국민의회지부(회장 이명순), 대한국민회동부지방총회(총회장ㆍ양도헌), 철혈광복단(지부장 김병흡), 신국민단(단장 마보), 소년단 북간도지부, 동 팔면둔 지부, 동 하얼빈시지부, 동 길림지부, 간도청년회(회장 서성권), 조선인특별대대(500명), 군정사군무부(독판, 서일), 대의순의사회(회장 김석규의 의용대원 170명), 의형제단(이자성), 용정촌상무회(회장 배동희), 대한학생광복단(단장 천임백), 관리병(두목 문 모), 독립단 총재무도(회장 박여준), 대한독립회(회장 박선풍), 대동단(회장, 구춘선), 오숭단, 정명단, 서북청년회, 대한구국단, 대한공의단, 국민대한의사회 전이권), 모험대, 한족독립의사회, 여영단, 노동단, 의용군, 구제단 등 57개 단체. (주석 4)

 
이와 같은 당시의 상황을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년 3월 소우(3ㆍ1혁명 - 필자)의 시기에 당하여 정치적 불평을 가진 도(徒) 속속 이주함에 이르러 지나와 아울러 일본의 위력 충분치 않음을 틈타서 일반 이주자에 대한 불온사상을 고취하였다. 때문에 간도는 작일의 낙토가 아니고 불령선인의 소굴로 화함에 이르렀다. (주석 5)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북간도와 노령에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국경을 넘어 독립군이 되었다. 물론 앞서 소개한 단체 중에는 이름만 있는 경우가 있고, 병력수도 차이나 오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이다. 
 
최운산 형제들이 조직한 부대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이다. 큰 형 최진동의 이름으로 60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뒷날 봉오동전투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 군무도독부는 최운산 형제들이 조직한 무장독립운동의 전위기관이다. 

1919년 중국 지린성 왕칭시엔 봉오동에서 최명록(일명 崔振東)이 결성한 독립군 부대. 일명 '독군부', '총군부'(總軍府)라고도 한다. 일찍이 중국에 귀화하여 중국인 지주의 양자가 된 최명록은 봉오동 일대의 많은 토지를 물려받아 대지주가 되었다. 최명록은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활용하여 독립군 부대를 창건하였다. 초기의 편제는 총재에 최명록, 참모장 박영, 대대장 이춘승, 중대장 이동춘(뒤에 강우홍ㆍ강채정), 소대장 최문인 등이었다. 
 
초기 병력은 100여 명이었는데, 기관총과 소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였다. 강우흥과 강채정은 나자구(羅子溝) 사관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1919년 말 한 때 간도국민회군에 편입되기도 했다. 1920년 3월에서 6월 초까지 여러 차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로 진입하여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였다. (주석 6)


최운산 형제들은 1910년대부터 무장독립운동을 기도하면서 부대를 창설하는 등 많은 기여를 하고도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1919년 창립된 군무도독부라는 독립군 부대는 최진동ㆍ최운산ㆍ최치홍 3형제가 주도한 단체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동만주지역 민족주의운동 단체는 대한국민회와 그 군대,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중심으로 언급되어 왔을 뿐이다. 그 이유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고정화된 이미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주석 7)

독립운동가 김승학(1881~1965)의 기록이다.

"(군무도독부는-발표자) 3ㆍ1독립선언 후 일어난 단체로서 본부를 왕청현 석현에 두고 최진동(일명 명록) 삼형제가 주동이 되어 활동한 단체이다. 독립군 오백여 명 장총 오백여 정을 갖고 있었으며 군복은 중국군인 복색과 같은 회색을 착용하였으므로 중국 군인과 구별하기 곤란하였다. 부장에는 최진동(함북 온성출신이며 중국 군대에서 다년간 전투경험이 있음). 사령관 이봉남, 부사령관 이원, 참모장에 김호석이었다." (주석 8)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1920년 경의 상황에 대해 "일찍이 정착하여 생활기반을 굳혀 놓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 전쟁의 장비며 군량 등을 보급하여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한 최진동의 동생 최운산과 최치흥 등 3형제의 업적은 봉오동 전투 등을 비롯하여 당시(경신년) 대일 항전에 절대적으로 이바지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주석 9)


주석
4> 오세창, 「만주한국독립군의 편성과 활동」, 『한국민족독립운동사의 제문제』, 140~141쪽, 범우사, 1992. 
5> 조선총독부 경무국, 『간도-불령선인단의 상황』 제1, 서론, 대정(大正) 9년 10월.
6> 장세윤, 「군무도독부」, 『한국독립운동사사전(3)』, 460쪽, 독립기념관, 2004.
7> 신주백, 「독립운동과 최운산」,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자료집, 2016. 
8> 앞과 같음.
9>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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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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