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중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장군의 기록

<임진란 학술 총서> 제 1권 '박홍장 구국 활동 연구'

검토 완료

정만진(daeguedu)등록 2020.12.05 14:53

임진왜란 중 대구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로 활약한 박홍장의 항일 활동을 밝힌 <임진란기 농아당 박홍장의 구국 활동 연구> 표지 ⓒ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임진왜란 당시 대구 부사와 조선통신사 부사 등을 역임한 박홍장(朴弘長, 1558-1598)의 활동을 담은 《임진란기 농아당(聾啞堂) 박홍장의 구국 활동 연구 -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임진란 학술총서 1'》이 출간됐다. 이 책에는 책명과 같은 제목의 논문 〈임진란기 농아당 박홍장의 구국 활동(정해은)〉,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는 박홍장 관련 기사, 박홍장 사적, 논문 〈임진란기 순천 지역 지방관과 관군의 역할(이은영)〉, 〈동사록(東槎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동사록〉은 전쟁 중에 통신사 부사로 선임되어 바다를 건넜던 박홍장이 자신의 약 5개월에 걸친 직접경험을 담은 기록이다. 〈동사록〉은 1999년 7월 간사이(關西) 지방 고서점에서 발견되었다.

나고야 박물관이 560만 엔을 주고 구입해 보관 중인 이 문서에는 사절단이 부산을 출발하기 한 달 전에 사카이(沙盖)와 교토(京都)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여 중국에서 온 사신단 일행 등 1만여 명이 사망한 사실, 휴전 교섭을 주도했던 고니시 등이 강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하는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40일 항해 끝에 일본에 도착

〈동사록〉에 따르면 박홍장은 1596년 8월 8일 부산을 출발해 쓰시마, 시모노세키, 효고를 거쳐 40일 동안 항해를 계속한 끝에 윤8월 18일 사카이에 도착했다. 통신사 일행은 사카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쓰시마 무장 소 요시토모 등의 출영을 받았다. 조선통신사가 도착했다는 기별을 들은 도요토미는 매우 기뻐하면서 "9월 2일에 만나겠다"고 알려왔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통신사가 조선의 왕자를 데리고 오지 않은 사실을 알고는 크게 화를 내면서 접견을 거부했다. 결국 통신사 일행은 9월 10일 귀국길에 올랐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칠성1길 5-12 무아당 종택의 야경 ⓒ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박홍장은 23세이던 1580년(선조 13)에 무과에 급제했다. 뒷날 경주성 탈환 등 큰 공적을 세우는 세 살 위 형 박의장(朴毅長, 1555-1615)도 3년 전인 157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당시 박홍장은 종5품 제주 판관 3년 임기를 마치고 막 육지로 귀환하려던 시점이었다. 조정은 박홍장을 제주 목사를 보좌하는 조방장으로 임명했고, 그는 향후 2년 동안 더 제주도를 지켰다.

5년 제주 생활 후 박홍장은 전라도 영암 군수로 부임해 두 달 동안 근무했다. 그 이후 박홍장은 1594년 말경 대구 부사로 승진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일본군의 재침에 대비해 대구를 군사 요새로 소생시키는 일이었다. 박홍장은 대구 부사로 1년6개월 정도 일하면서 무기를 준비하고, 둔전을 개발하여 군량미를 비축하고, 백성들을 구호하는 과제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류성룡의 증언이 남아 있다.

"대구는 서울로 가는 직로이며,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 대구와 청도 사이는 땅이 매우 비옥합니다. 금년에 농사 크게 짓고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으면 진(鎭)을 이루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신임 부사 박홍장은 박의장의 아우로 무신 중에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다른 일을 시키지 말고 대구부를 수리하고 돌보는 일에만 마음을 쓰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순찰사에게 농우와 곡식종자를 특별히 조치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소서. (류성룡, 《서애선생문집》 권8)"

박홍장이 대구 부사로서 진력을 다하고 있는 중에 조정에서는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는 문제로 한창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강화 논의는 명과 일본 사이의 현안이었다.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고, 이어 2월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이 승리한 이래 전쟁은 1596년 12월까지 약 4년여에 걸쳐 반쯤 휴전 상태였다. 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죄를 하면 일본 국왕으로 봉하겠다면서, 일본은 한반도 남반부를 자신들에게 양도하면 종전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결사반대였지만 일본의 통신사 파견 요구를 받아들이라는 명의 '지시'를 끝까지 물리칠 수는 없었다.

휴전을 하고 싶은 명나라와 일본

조선 조정은 329명의 통신 사절단을 구성하면서 정사에 문신 황신, 부사에 무신 박홍장을 임명했다. 그 무렵 조선 관료가 일본에 가는 것은 죽음을 불사하는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모두들 기피했다.

게다가 박홍장은 제주도에서 영암으로 올라온 이래 비장과 위장에 큰 병을 앓고 있었다. 오죽하면 그의 어머니 영양 남씨는 비변사에 글을 올려 "홍장의 병세가 위중해 언제 죽을지 분간이 가지 않는 형편"이라면서 아들을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친척들이 일본에 가지 말라고 만류한 것은 당연했다. 그는 "임금의 명을 제대로 받들지 못할까 하여 근심을 해야 하는 상황에 어찌 내 몸의 생사를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다.

실제로 통신사 일행은 일본에서 처형 협박과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땅바닥에 불을 피워놓고 조선 통신사 일행을 태워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모두들 두려워 떨고 있는 중에 박홍장이 "내가 옷을 벗고 불 위에 앉겠다"면서 맞섰다. 조선인들이 "모두 불에 타 죽게 생겼다"면서 울부짖자 박홍장이 "우리는 임금의 친서를 일본 관백(關白, 일본왕을 대리하는 권력자,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죽을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서 죽는 것이 두려우냐?"면서 우는 자들에게 매를 쳤다. 일본인들이 이를 보고 기가 꺾였는데, 마침 비가 쏟아져 불도 꺼졌다.

조정은 통신사를 파견하면서 일본의 재침 의사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고니시와 강경파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사이를 이간하여 우리에게 유리한 전투 상황을 만들 수 있을지 알아보고자 했다. 황신과 박홍장이 이끈 통신사는 일본의 재침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조정에 제출했다. 조선은 이를 토대로 정유재란 발발에 많은 대비를 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 대비에 많은 도움이 된 통신사의 정세 파악

박홍장은 귀국 후 순천 부사로 발령을 받았다. 그때 대구 사람들이 조정에 그를 대구 부사로 보내달라고 중앙 정부에 상소를 올렸다. 조정은 허락을 했지만 그는 대구 부사로 부임하지 못했다. 일본에 다녀오느라 깊어진 병이 더욱 위중해져 고향으로 돌아가 요양을 해야 했다. 조정은 다시 박홍장을 상주 목사로 발령내었지만 그는 그곳에도 가지 못하고 1597년 1월 3일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 돌아온 지 불과 40여 일 만이었다.

최현(崔晛, 1563-1640)은 일본으로 떠나는 박홍장에게 "그대는 무과 급제 후 서북방에서 오랜 기간 수자리를 했고, 얼마 되지 않아 제주도 판관으로 몇 년을 지내다가 난리 중에 부모님 상을 당해 육지로 나와 상을 치르지 못했는데, 겨우 수 개월 지나 대구 부사가 되어 황폐한 땅을 개척해 둔전을 마련하고 남은 백성을 모아 생업을 안정시켰다."면서 "그런데 지금 또 부사로서 일본에 가게 되니 원수의 나라와 화친하는 것이 성공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위험함은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홍장이 귀국 후 넉 달 만에 별세하고 말았으니, 무과 급제 뒤 봉공(奉公)만을 향해가던 박홍장의 신념을 잘 나타내준 그의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고 말았던 셈이다.

정해은도 논문 〈임진란기 농아당 박홍장의 구국 활동〉의 '박홍장에 대한 평가' 마지막 부분을 아래와 같이 끝맺어 비슷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박홍장에 대한 기억은 무과 급제 뒤에 북방으로부터 제주도까지 남들이 꺼리던 지역에서 근무한 이력이다. 그리고 임진전쟁기 대구 부사로서의 치적도 높이 평가된다. 여기에 더해 임진전쟁 중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태에서 적국인 일본으로 왕명을 받들고 떠난 용기와 나라를 위한 구국의 정신뿐이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