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 13:33최종 업데이트 20.12.01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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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 판결 받고 귀가하는 전두환 30일 오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을 나서고 있다. 전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회고록에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이날 1심 재판부로부터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연합뉴스

 
전두환은 5·18 피해자 중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김대중의 정치적 위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한을 품어도 될 만한 인물이 관대하게 용서해준 것에 대한 놀라움이나 감사함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은 그런 마음을 1997년에 표시했다.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1997년 9월 2일 자 주간지 <뉴스메이커>와 한 인터뷰에서 '김영삼 대통령 임기 내에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해야 한다'라고 발언한 게 계기가 됐다.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화해라는 것은 잘못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사과해야 이뤄지는 것이지만 용서는 다르다"라며 "그분들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응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옥중의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해 9월 25일 자 <경향신문> 기사 '사면 관련 DJ에도 감사 뜻 전달'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사면 문제와 관련해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에게도 '고맙다'는 구두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24일 알려졌다"라며 "전씨는 이달 초 이양우 변호사를 통해 김 총재가 사면 문제를 거론해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라고 보도했다.

전두환은 김대중 서거 직전에도 남다른 마음을 표했다. 서거 4일 전인 2009년 8월 14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병문안 가서 이희호 여사에게 "우리 김대중 대통령이 현직에 계실 때 우리 전직들이 제일 행복했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런 뒤 "현직에서 안 봐주면 전직같이 불쌍한 게 없지 않습니까?"라며 "현직에서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보는 눈도 다르고"라며 감사해했다. 자신이 범한 5·18 광주 학살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해준 5·18 피해자 김대중에 대해서만큼은 각별한 마음을 표했다.

김대중에게만 남달랐던 전두환

반면, 전두환은 여타 피해자와 국민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헬기 사격을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와 관련된 사자 명예훼손 사건 재판을 받으러 광주지방법원에 갈 때마다 피해자와 국민들의 상처를 건드리고 있다.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된 지난 11월 30일에도 연희동 집을 나서면서 시위대를 향해 "말조심해! 이놈아!"라고 고함쳤다.

사실, 김대중이 용서해준 것 이상의 관용을 피해자와 국민들은 베풀었다. 사적인 복수를 자제하면서 스스로 참회할 기회를 주고 있다. 그런 피해자와 국민에게 전두환은 "고맙습니다", "제일 행복했어요"라고 말하기는커녕 "이거 왜 이래!", "말조심해! 이놈아!" 같은 망언만 퍼붓고 있다.

그런 그가 1997년에는 형 확정 8개월 만에 사면을 받더니 이번에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를 받았다. 사자 명예훼손 사건이라 중형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전두환과 관련된 사건이고 5·18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가벼운 처분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5·18 때 남편이나 자녀를 잃은 '오월 어머니'들은 광주지방법원 주변에 있다가 집행유예 선고 소식을 듣고 땅에 주저앉으며 "원통하다"라고 울부짖었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은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느냐?"라며 "법도 사법부도 우리에겐 없는 셈이다.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하느냐?"라며 땅을 내리쳤다.

5·18과 전두환으로 인한 한(恨)이 이처럼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것은 광주 학살을 은폐하려는 세력이 곳곳에서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가 형벌 제도 자체가 피해자의 한을 푸는 데 무력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해자는 제3자일 뿐 
 

'전두환은 참회하라' 30일 오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 회원 등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벌을 촉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전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를 회고록에서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이날 1심 선고를 받는다. ⓒ 연합뉴스

 
국가 형벌권은 국가 대 피의자·피고인의 관계에서 집행된다. 이 관계에서 피해자는 제3자에 불과하다. 피해자나 유족이 경찰서로 달려가 피의자의 멱살을 잡으며 통곡을 하면 경찰관은 피해자가 지칠 때까지 기다려주거나 아니면 "고정하세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등등의 말을 하며 피해자를 떼어놓는다.

피해자나 유족이 한을 풀려면 이들의 관점이 어느 정도라도 사건 처리에 반영돼야 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형사사건은 국가의 관점에 따라 해결될 뿐 피해자나 유족의 관점과는 무관하게 처리된다.

죄인이 죗값을 치르는 대상도 국가이지 피해자나 유족이 아니다. 벌금도 피해자가 아닌 국가에 납부한다. 현행 형법 제329조는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한다.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은 재물을 절취당한 '타인'이 아니라 '국가'에 납부된다.

물론 피해자에게 권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고소권을 행사하거나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항고하거나 법정에서 증언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당사자 자격을 갖고 검사나 피고인과 대등한 위치에서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길은 원칙상 열려 있지 않다.

그래서 사실관계 규명과 피고인 처벌 같은 핵심 영역에서 피해자는 어디까지나 제3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해 2012년부터 '피해자 변호사'가 재판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됐지만 이런 제도가 모든 사건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의 법률 체계도 피해자보다는 피의자·피고인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고 있다. 헌법 제12조에는 피의자나 피고인을 위한 권리가 상세히 규정돼 있다. 적법절차에 의한 보호를 받을 권리,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권리,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 등등이 열거돼 있다. 이에 따라 체포나 구속 때 범죄 혐의나 변호인 조력권을 통지받지 못한 피의자는 곧바로 풀려날 수도 있다.

반면 피해자와 관련된 헌법 규정은 언론 출판에 의해 명예나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가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제21조 제4항, "형사피해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당해 사건의 재판 절차에서 진술할 수 있다"라는 제27조 제5항뿐이다. 제27조 제5항에 따라 피해자들은 주로 증인 자격으로 법정에서 진술할 뿐이다. 피의자·피고인을 보호하는 것 못지않게 피해자를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한데도 현행 법체계에서 피해자는 피의자·피고인보다 못한 배려를 받고 있다.

오월 어머니들은 "남편을 잃은,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은 어디서 보상을 받아야 하느냐?"라고 탄식했다. 또 "법도 사법부도 우리에겐 없는 셈이다"라고 한탄했다. 사법체계의 한계도 이런 탄식과 한탄을 낳는 원인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국가가 죄인을 처벌한 최대 이유는 국가 질서에 도전했다는 점에 있었다. 일반 백성이 일반 백성을 살해한 행위도 군주의 권위에 대한 침해로 인식됐다. 생명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인 군주의 위상에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사적인 보복을 금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 고대의 전통이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국가는 범죄로 인해 침해된 국가의 질서나 권위를 회복하는 데 우선적인 중점을 둘 뿐 피해자에 대한 배려를 최우선시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국가 형벌권을 통해 피해자의 한을 푸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1997년 4월에 대한민국은 대법원 선고를 통해 전두환에 대한 무기징역 선고를 확정했다. 그런 뒤 그해 12월 전두환을 사면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전두환은 이미 '용건'이 끝난 사람이다. 대한민국 사법체계에서 전두환은 죗값 치르고 용서받은 사람이다.

대한민국 국가는 전두환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함으로써 국가질서를 침해한 부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뒤 용서를 해주었다. 국가가 주도하는 그 재판에서 피해자는 제3자에 불과했다. 피해자는 방청권을 끊고 방청석에서 구경하는 처지일 수밖에 없었다. 피해자의 한이 재판에 반영되기 어려운 구조였던 것이다. 피해자 치유의 효과 역시 기대하기 어려웠다.

김상덕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이 지난 9월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53호에 기고한 '5·18민주화운동 40주년, 우리는 무엇을 보았고 보지 못했나'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5·18 제40주년을 맞아 전남대 5·18 연구소 등이 공동 주최한 학술대회 때 5·18과 관련된 국가 사법작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부분에서 언급된 대목이다.
 
(현행 사법체계에서) 누군가 법을 어긴다면 해당 범법 행위의 피해자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국가가 된다. 벌금이나 노역도 국가를 대상으로 하게 된다. 또한 죄의 유무에 대한 판단도 국가가 대신하며 그 집행 또한 국가가 관할한다.

결국 현행 사법체계 안에서는 피해자는 사라지고 오직 가해자와 처벌만이 남게 된다. 반면, 처벌이 아닌 피해자의 회복이 목적이 된다면 벌금이나 구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를 위한 사죄와 보상 그리고 과거로부터의 치유이다.
 
제2, 제3의 전두환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전두환씨의 차량이 5.18 피해자와 시민들의 항의로 현장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다. 해당 차량은 전씨가 이날 오전 서울 연희동 자택을 출발할 때 탄 검은색 승용차인데, 재판 후에 전씨는 다른 차를 타고 광주를 떠났다. 전씨의 차량이 계란과 밀가루로 뒤덮인 모습이다. ⓒ 소중한

 
물론 대한민국 국가가 5·18 피해자의 치유에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신한국당 정권 때인 1995년에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5·18특별법)'이 제정돼 피해배상 등을 규정했다. 이 법은 그 뒤 동종의 국가범죄 처리를 위한 모델이 됐다.

하지만 5·18 특별법은 피해자 치유에 한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주로 국가의 관점에 따라 5·18을 처리하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해자의 계승자인 신한국당 정권이 주도적으로 만든 법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급적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가해자의 계승자가 만든 치유 시스템이 완전할 리 없었다.

2009년에 <기억과 전망> 제20호에 실린 정호기 성공회대 연구교수의 논문 '과거사의 상흔 치유와 효과에 대한 성찰'은 "오늘날 한국에서의 과거청산의 전환점을 이룬 5·18 모델의 산파는 5·18의 가해자가 집권하고 있던 정당이었다"라며 "만일 이때 5·18의 청산 작업에 피해자와 민중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었다면, 21세기 한국 사회는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한 뒤 5·18 처리 방식이 여타 국가범죄 처리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뒤 이렇게 말했다.
 
과거사의 상흔 치유가 무력화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퇴보하는 것은 5·18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모델의 창출에 일정 부분 실패하고 대안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가가 주체가 된 제도적 청산 작업에 많은 것을 위탁하고 기대하면서 방관했기 때문이다.
 
5·18 학살 같은 국가범죄의 처리와 관련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국가가 많은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에 과도하게 의존하면, 피해자와 유족들의 한이 제대로 풀리기 힘들 뿐 아니라 제2, 제3의 전두환 때문에 피해자와 유족들이 계속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적이거나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국가는 어디까지나 국가이므로 국가권력의 관점에서 국가 범죄를 다룰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와 국민의 관점에서 국가 범죄 해결을 주도하지 않는 한, 전두환이 무릎 꿇고 참회한다 해도 5·18의 한은 풀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이 피해자 출신의 대통령이 아니라 피해자 개개인에게 진심으로 사죄한다 해도,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국가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한은 피해자와 국민의 한이 온전히 풀리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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