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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난아기 16명 낙인 찍어 사살... 통탄할 사건

[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함평 11사단 사건

등록 2020.11.01 11:13수정 2020.11.0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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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민간인 학살 위령비 ⓒ 진실위

 
한국전쟁 시기인 1950년 11월 20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전라남도 함평군, 광산군, 장성군 인근에서 국군 11사단 군인들에게 민간인 249명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되는 참상이 일어났다. (관련 기사 : 민간인학살 추정지서 유골5기·탄피 등 발굴 http://bit.ly/6V4lWY)

필자가 한때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는 지난 2006년 이 사건을 조사했고 그 결과 희생자들은 모두 비무장 비전투원인 민간인, 즉 농민들이었음이 밝혀졌다. 희생자 중엔 여성이 64명으로 25.7%, 20세 이하가 93명으로 36.5%, 61세 이상이 11명으로 4.4%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호적 미등재자) 16명도 '빨갱이'란 죄로 국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어떻게 해서 아기 16명과 여성 64명을 포함한 함평지역 농민들은 국군 11사단에 의해 무차별 학살된 것일까?

당시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에 살던 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 12월 6일 새벽 일곱 가구가 살던 장교마을에 약 20명의 11사단 군인들이 들이닥쳐 집마다 불을 지르며 "살고 싶으면 마을 앞으로 나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 고함에 쫓기다시피 몰려나온 주민들을 선별과정도 없이 국군들은 총살했다.

당시 군인들은 장교마을 주민들이 빨치산 활동을 한 이유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실위 조사결과 사건당일 이른바 좌익은 마을 내에 있지 않았고 학살희생자들은 좌익과는 전혀 무관한 농민들이었다.

엉덩이까지 총알이 뚫고 나갔다

당시 안종필은 모친 등에 업혀 모친과 함께 총에 맞았지만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의 형 안종탁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지난 2007년 안종필은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형님은 고환에 총알이 관통해 현장에서 죽었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업고 있어서 어머니 팔과 옆구리를 뚫고 제 엉덩이까지 총알이 뚫고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그 후로 한쪽 팔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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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위의 불갑산 유해 발굴 현장 ⓒ 진실위

 
쌍구룡 학살현장에 있던 박용원은 지난 2006년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군인들은 1950년 12월 31일 해보면 대창리 성대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을 에워싼 채 불을 지르며 '죽지 않으려면 모두 나와'라고 해 주민을 해보중앙초등학교 부근 쌍구룡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 끌려나온 주민들 중 남자들을 골라 해보중앙초등학교 옆 길가에 앉혀놓고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 때 주민 중 장진섭이 일어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왜 죽이느냐'고 항의하자 군인은 대검으로 그의 가슴을 찌르고 총살했다. 이렇게 마을 남자들이 모두 죽자, 군인들은 여자들을 밭으로 한 명씩 가도록 한 후 한 명씩 총으로 쏘았다. 한 주민이 '군경가족도 죽이느냐'고 묻자 그때부터 군경가족을 한쪽으로 골라낸 다음 총살을 계속했다."
 
함평군 나산면 이문리에서는 "좌익 협력자가 마을에 거주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이 군인들에게 학살되었다. 그러나 진실위 조사결과 당시 이 마을의 경제력 있는 주민은 광주 등 대도시로 군인들이 학살을 자행하기 전에 먼저 피난했고, 좌익 활동을 했거나 빨치산에 협조적이었던 주민들은 이미 주위에 있는 불갑산으로 입산했다. 그래서 현장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은 빨치산 협력이나 좌익 활동과는 전혀 무관한 농민들로 밝혀졌다.


아이 업고 있는 여자에게도 총격을

당시 학도연맹원이었던 정현모는 지난 2006년 진실위에서 "나는 쌍구룡에 가서 주민을 죽이는 것을 목격했는데 중대장이 관상 보듯이 골라내 모아놓고 기관총으로 갈겼습니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에게도 총격을 했습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다른 학도연맹원 윤채병도 진실위에서 "(군인들이) 빨치산과 교전을 벌이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죽였습니다. 군인이라고 볼 수도 없고 공비들에게 쫓기면 화풀이로 주민을 죽이고 불을 지른 것으로 생각됩니다"라고 당시 학살상황을 회고했다.

구국연맹원 윤홍병은 2006년 진실위에서 "당시 학련(아래 학도연맹원) 대장이 서아무개 였습니다. 학련 감찰반에 문아무개, 신아무개, 이아무개 등이 있었는데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고 폭행했습니다. 특히, 문아무개는 대창으로 찔러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군인들이 학련을 길잡이로 앞세워 마을에 가서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임화수는 지난 2006년 진실위에서 자신이 목격한 학살 장면을 이렇게 진술했다.
"군인 한 명이 소를 끌고 가는 저에게 '진작부터 끌고 왔느냐'는 말을 경상도 말로 물어 못 알아듣고 그냥 '예'했습니다. 그 군인은 '너는 빨리 가'하면서 엉덩이를 걷어차려는 것을 피하고 도랑을 건널 때 총소리가 나 뒤를 보니 군인들이 일행 중에 임광진, 김병수, 심달섭, 김종섭, 임봉수씨 등 12명을 3열로 세워놓고 총을 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군인들은 이어 20대에서 40대 사이의 남자들을 선별한 다음 신죽마을 앞에서 3열로 정렬시킨 후 모두 총살했습니다."

형들의 학살 장면을 멀리서 목격한 탓에 제대로 모습을 보지 못한 정재윤은 2006년 진실회에서 "동생 재선이 '전하마을 뒷산에서 한 사람은 죽어 있고, 세 사람은 군인들 앞에서 손을 들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총으로 죽이는 것을 봤다'고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울면서 '너의 형들이 죽었다'고 해 그때 형님이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라며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불갑산 유해 ⓒ 진실위

 
목격자 윤주원은 군 상부의 '할당제 학살지시'와 군인들의 약탈행위에 대해 "군인들이 이발소에서 주민들 집에서 금반지, 분첩(화장할 때 분가루를 찍어 바르는 기구) 등을 가져왔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으며, 분첩은 주고 가기도 했습니다. 1950년 12월 크리스마스 전이었는데 군인들이 '상부로부터 하루에 공비 50명씩을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라고 진실위에서 증언했다.

당시 주민 곽상덕은 "군인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불을 지르며 큰소리로 주민들을 동네 앞으로 모이라고 해,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나머지 주민은 동네 앞 논으로 들어가라고 한 뒤 논으로 들어간 남자들을 총살했다. 그리고 남은 주민들에게 성냥을 나누어 주며, 마을에 내려가 미처 타지 않은 집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며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또 다른 증인들은 "1951년 1월 12일 군인들은 대창리 성대마을에서 가까운 인근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 주민을 집단총살 했는데,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가 집집마다 불을 지르며 '살려면 쌍구룡쪽으로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는 나오는 대로 총을 쏘았다"며 당시의 끔찍한 장면을 진실위에서 회상했다.

목격자 이계백은 1951년 1월 14일 군인들이 "나산면 우치리 소재마을에 와 집 안에 있던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집결시키고 무차별적으로 총살했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진실위 조사에 따르면 학살이 일어났던 수해리 2구 신죽마을과 월곡, 양현 마을까지 합하면 70여 가구의 마을 중 절반 가까운 집들이 불에 탔다. 특히 신죽마을의 경우 군인들이 거의 모든 집들을 불태웠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임양수와 김수성 등 두 명의 주민은 월야면과 삼서면 경계에 있는 대도천에 다다른 군인들로부터 넘치는 냇물을 업어서 건너게 해달라는 명령을 받고, 이들을 업어서 건네주고 바로 그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악악소리 지르며 쓰러졌다

학살 현장 생존자 정남숙은 남산뫼 학살에 대해서 지난 2006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남산뫼에 모이게 한 후 어린 학생들은 불을 지르라고 마을에 내려가게 한 후, 남아있는 주민들을 총으로 학살했습니다. 모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악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습니다. 1차 총격 이후 살아남은 사람은 살려준다고 다시 일어나라고 해 주민 몇 명이 일어나자 중대장은 이들을 마을에 내려가 불을 끄라고 한 뒤, 뒤에서 또다시 사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저는 1차 총격에는 총을 맞지 않아서 살아있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일어나라고 할 때도 일어나지 않아서 총을 맞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려주겠다고 일어서게 한 후, 3차 총격을 가해서 모두 학살했습니다. 그 후 군인들에게 시체 사이를 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사람은 모두 확인해서 사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정귀례는 국군 중대장이 언니를 중대본부로 끌고 가려하자 아버지가 강력히 항의했고 이에 군인들이 아버지와 언니를 향해 총을 쏘아 살해했다며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군인들이 언니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 하니까 아버지가 군인을 가로막으면서, 죽으면 죽었지 우리 딸은 데리고 가지 못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군인이 아버님과 언니를 그 자리에서 총살시켜 버렸습니다. 그 외에도 군인들이 여성 두 명을 어디론가 데리고 가서 욕을 보였다고 마을에 소문이 났습니다."
 
정상수도 군인들의 부녀학살 행위에 대해 이렇게 진술했다.
"주민 중 남자들은 15세 이상 45세까지 모두 나오라고 해서 한 쪽으로 모았고 여자들은 남편 없는 사람들을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처녀 7, 8명을 골라냈습니다. 처녀들을 골라내는 도중 5중대가 동산마을 정맹모의 딸을 데려 가자 정맹모가 군인들을 가로막으며 '나를 죽이고 데리고 가라'고 항의하자 정맹모와 그의 딸을 동시에 총격하여 사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남편 없는 사람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입산자 가족으로 취급당하자 '남편은 결핵으로 몇 달 전에 죽었다'고 군인들에게 말했으나 오히려 '거짓말 하지 마라'며 개머리판으로 폭행을 당한 후 실신한 채로 15세 이상 45세 이하의 사람들이 모여 있던 쪽으로 끌려갔습니다."

금덕리 두루샘 인근에서 학살현장을 목격한 정재선에 의하면 마을 앞 도로에 불려나온 주민들은 가족단위로 모여 있었다. 군인들이 10대 후반에서 20대로 보이는 주민 20명을 불러내자 청년 정기복은 군인들이 나오라고 지목해도 머뭇거리면서 "부역한 사실도 없는데 왜 불러내느냐"고 항의했다. 군인은 곧바로 정기복을 사살했다. 정기복을 현장에서 총살한 군인들은 나머지 주민 19명을 해보면 금덕리의 중대본부 쪽으로 끌고 갔다. 보름 후 군인들이 철수했을 때 금덕리 두루샘 부근에서 군인들에 의해 살해된 17구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덮어놓고 죽이라고 했다

1950년 12월 월야지서 토벌중대장이었던 오정인은 "당시 중대장은 권준옥이었으며, 작전회의에는 3번 정도 참석했습니다. 월야와 삼서면 경계지역 작전회의에 참석했는데, 대대에서 내려온 공문을 보고 중대장이 공산주의자라고 인정된 사람과 부역한 사람은 무조건 50명씩 죽이라고 했는데, 결국은 덮어놓고 죽이라는 얘기였습니다"라며 지난 2006년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5중대 화기소대원이었던 김공원은 지난 2007년 진실위에서 "당시 마을에 가면 도망가는 사람이 많이 있죠. 그러면 도망가는 사람을 불러요. 불러서 돌아오면 살려주고, 도망하는 사람은 총으로 쏘았어요. 여러 명이 도망하는 경우가 있어요"라고 회상했다.

20연대 1중대원 학도의용군 김길용은 "미처 올라가지 못한 진짜 빨치산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산으로 도망간 민간인들이 많았습니다. 토벌작전 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도망간 민간인이었습니다"라고 진실위에서 회고했다. 
 

함평 민간인 학살 기사 ⓒ 진실위 자료

 
진실위 조사결과 함평지역에서 이렇게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학살사건의 가해부대는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로 확인되었다. 가해부대의 지휘명령계통을 보면 국군 11사단 사단장 최덕신 준장, 20연대 연대장 박기병 대령, 2대대 대대장 유갑열 소령, 5중대 중대장 권준옥 대위였다. 5중대장 권준옥 대위는 사건현장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도록 지시 명령한 지휘관이었고, 20연대장과 2대대장은 5중대의 이 같은 행위를 알고 있어도 전혀 제지하지 않았다. 또 최덕신 11사단장은 민간인 희생이 따르는 무리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아기 16명과 여성 64명을 포함 죄 없는 민간인 249명이 군인들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 학살 희생자들은 국군 11사단 5중대의 빨치산 토벌작전 과정에서 빨치산 내통자 또는 협력자라는 이유로 집단 총살되었다. 하지만 진실위 조사결과 249명의 사망자 가운데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빨치산에게 협력한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희생자들은 빨치산과 국군사이에서 밤낮으로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마을에서 그저 꿋꿋이 농사를 짓고 있던 순박한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이후 5중대장 권준옥 대위가 문책성 인사로 추정되는 연대 병기장교로 전보조치가 있었을 뿐 함평지역 민간인 학살 사건과 관련해 이승만 정권의 정부인사는 물론이고 11사단의 지휘명령계통 상 어느 누구도 처벌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진실위는 확인했다.

지난 2007년 진실위는 함평 11사단 사건에 대해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함평 11사단 사건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는' 국군이 긴박한 전투상황이 아닌데도 주민을 빨치산 토벌 작전이라는 명분으로 불법 총살한 민간인 집단총살 사건이었다. 빨치산 토벌이 매우 중요한 작전이었다 하더라도 비무장, 비전투 민간인을 그것도 어린이와 노약자까지 포함된 지역 주민을 재판 등의 절차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총살한 것은 반인륜적 집단학살이며 명백한 위법행위였다."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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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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