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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메랑이 된 박근혜 말...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75)]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②

등록 2020.09.25 17:48수정 2020.10.0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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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근혜 부녀 ⓒ 대한민국 정부


박근혜의 행적

2020년 한국에 살고 있는 60대 이상이 그동안 살아오면서 대한민국 여성 중 가장 많이 들어본 이름을 꼽으라면 육영수 여사와 영애 박근혜일 듯하다.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15 경축식장에서 서거했다. 그 때문에 가장 오랫동안 귀에 익은 여성 이름은 아마도 박근혜일 것이다. 1961년 5.16쿠데타에서부터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으로 재임 중 탄핵으로 물러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수많은 추종자들이 피켓을 들고 교도소 밖에서도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는 현실이다.

앞선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사람이 남의 시선을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건 한편으로는 독이 되기에 박복하다. 그래서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도 생겨났나 보다. 대통령의 딸로 태어나 양친 모두 비명에 잃고, 훗날 대통령이 돼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 부녀 대통령, 게다가 헌정 이후 최초로 탄핵된 불명예를 안은 대통령은 앞으로도 좀처럼 나오기 힘들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행적을 기록해본다.

박근혜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서 군인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이었다. 이후 아버지가 서울 신당동에 집을 마련할 때까지 아버지 부임지를 따라 자주 이사 다녔다. 첫돌 무렵에는 전남 광주시 동명동 셋방에서 살았으며, 1953년 여름에는 서울 동숭동으로, 다시 이듬해에는 광주로 내려가 1955년 7월 아버지가 사단장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말씨는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섞인 서울 말씨였다. 이는 충청도 옥천 출신의 어머니 육영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근혜가 아홉 살이던 1961년 5월 15일 밤, 아버지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위해 집을 나서는데 부인 육영수가 "근혜 숙제 좀 봐주고 가세요"라면서 가족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을 마련했다. 육영수는 그날이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몰랐기에 그렇게 말했을 듯하다. 그러자 박정희는 묶던 군화 끈을 풀고 근혜 방에 가서 격려해주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그 이튿날 새벽 쿠데타의 성공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자 박근혜는 대통령 딸 영애로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자랐다.


성심여자중학교 2학년 때 세례성사를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영향 탓인지 불교에도 심취했다. 대통령 영애였지만 학교 동창생들에게 비친 그의 이미지는 '소박하고 검소하며 촌스러운 엄친딸'로 기억됐다고 한다. 이는 부모의 가정교육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치마 길이는 늘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고, 도시락에는 보리쌀 밥에 멸치볶음, 달걀부침이 주된 메뉴였다고 한다.
  

육영수 영부인 운명 장면 ⓒ 자료사진

 
첫 번째 시련


1967년 서울 성심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같은 재단의 성심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70년 성심여고 졸업 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서강대 이공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유학 중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기념식장에서 어머니 육영수의 피격 소식에 급히 귀국하던 중 신문기사를 통해 어머니의 비보를 전해들었다. 그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지 6일 뒤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로 참석했다. 그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어머니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로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지냈고, 전국의 학교를 돌면서 '새마을운동' '새마음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나는 아버지를 보필하는 일에 주력했다. 아버지가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방문할 때 수행했다. 아버지는 훌륭한 선생님이었고, 나는 착실한 학생이었다." - 박근혜 지음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삼아> 중
 
그 무렵 박근혜는 청와대 안주인으로, 퍼스트레이디로, 그리고 사회봉사자로 1인 3역을 소화하면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 영정 앞에 분향하는 박근혜. ⓒ 자료사진

 
두 번째 시련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잠결에 긴 전화벨이 울렸다. 단잠에서 깨어나 수화기를 받자 가라앉은 비서관의 음성이 들렸다.

"어서 일어나 몸단장을 해주십시오."

그 순간 박근혜는 서늘한 기운과 함께 5년 전의 악몽이 스쳤다. 아버지가 저격을 당한 것이었다. 양친 부모를 모두 총탄으로 잃는다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인 1979년 11월 21일 박근혜 형제자매는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옛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인생 만사 무상함을 또 한 번 느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 당시 내가 알고 있었던 그들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 한결 같은 경우가 그야말로 드물었다.

모두가 변하고 변하여, 그때 그 사람이 이러저러한 배신을 하고 이러저러하게 변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지금의 내 주변도 몇 년 후 어찌 변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 박근혜 지음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1991년 2월 10일 일기 중

이 시기 그는 인간에 대한 배신과 그로 인한 실망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으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는가. 세파를 겪지 않은 이로써 보는 안일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는 은둔생활로 18년 동안의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은둔, 정치인, 선거의 여왕, 그리고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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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19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 마련된 선거종합상황실에서 축하꽃다발을 건네받은 뒤 손을 들어보이고 있는 모습. ⓒ 유성호

 
1997년의 IMF 위기 당시 박근혜는 이회창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고문 자격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놨다. TV 찬조출연 이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유권자들의 박정희 향수가 크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이듬해 4월 대구 달성지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입후보해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인 엄삼탁 후보를 가볍게 제치고 국회에 입성했다. 그리하여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차떼기 당'이란 오명으로 난파 직전의 한나라당 당대표를 맡아 '천막당사'를 꾸려가며 당을 위기에서 탈출시켰다. 그뿐 아니라 여러 번의 재선거와 보궐선거에서 모두 압승했다. 그리하여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마침내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 2012년 12월 19일에 실시된 대선에서 51%의 득표율과 역대 최다 득표수를 기록하며 대통령에 당선했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2월 25일에 출범해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나머지 임기 약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불명예로 끝났다. 그가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을 때 나는 '과연 그가 제대로 대통령직을 수행할지' 많이 염려됐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사회적 약자 계층을 잘 보살피길 기대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 집권 18년 동안 억울하게 죽어간 많은 유족들을 위로하고 감싸주며, 그에 상응한 보상을 해 국민대화합을 이루기 바랐다.

하지만 출발부터 내 기대는 사라졌다. 청와대 비서실장부터 지역감정을 조작한 이, 유신헌법을 만들고 공안을 조작했던 이였다. 박근혜에게 청와대는 어린 시절 살았던 옛 집으로, 그는 재임 중 대통령이라기보다 '유신 공주'로 '퍼스트레이디'로 사저처럼 안일하게 지냈다.

2014년 연두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는 대국민 연설을 하고도 전임 대통령들이 애써 만든 개성공단을 단박에 폐쇄, 다시 냉전시대로 돌려놨다. 2014년 4월 16일 승객 300여 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 때 그의 행적은 애매모호해 시민들을 격노케 했다. 대한민국 국정을 아무런 직책도 없는 한 민간인의 농간으로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에 대다수 시민들은 참담함을 금할 수 없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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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3일,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총선 공천을 "한마디로 정당정치를 뒤로 후퇴시킨 무원칙한 공천의 결정체"라며 "대표와 지도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모습. ⓒ 이종호


 그의 임기 중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항간에 나돌 때 난 '21세기 민주국가에서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 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리스트에 내 이름도 나오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21세기 대한민국에 부활해 지식인의 입에 재갈을 물린 것이다.

지식인의 사회 비판은 자동차의 제어장치와 같은 것이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얼마나 위험한가. 그 결과 박근혜 정부는 임기조차 채우지 못하고 벼랑에서 추락하고 말지 않았는가.

이번 박근혜 편을 쓰면서 많은 생각과 쓸 거리를 머릿속에 준비해 뒀다. 하지만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금도에도 어긋나는 것 같아 후일 후배작가에게 미루면서 넘어가려 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1회 기사가 뜨자 많은 독자들이 댓글을 달아주고, 메일로 전화로 제보해 주셨다. 한 독자는 "이 세상에 단 셋 남은 혈육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 이가 무슨 대통령이냐"고 그에게 꼬박 속아 표를 준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아직도 그의 주변을 맴도는 태극기 부대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사실 나도 태극기 부대에 대한 비판의식은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까지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아직도 우리 시민들이 식민지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친이명박계가 친박근혜계에 대한 공천 배제를 전방위적으로 가했을 때 박근혜가 한 말이다. 이 말 한 마디로 박근혜 대통령 편을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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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은 지난 2017년 7월 17일 오전 37차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호송차를 타고 도착한 뒤 법정으로 향하고 있는 모습. ⓒ 권우성

 
(*이상으로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를 모두 마칩니다. 다음 회는 '연재를 마치면서'라는 기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입니다.)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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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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