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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총살 당한 남자, 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경산 코발트광산 피학살자 손세종의 아들 손계홍의 파란만장 인생

등록 2020.09.25 21:31수정 2020.10.0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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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기록 사진. ⓒ 미국립문서보관소

 
1950년 7월 어느날, 경북 경산읍 남천면. 이곳 산전동 마을에 난리가 났다. 경찰과 이장(당시 구장)이 마을을 뛰어다니며 "집에 있는 이들은 공회당 앞 들판으로 모두 나오시오. 한명이라도 안 나오는 집은 알아서 하시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누구 엄명이라고 안 나가겠는가. 손계홍(당시 4세)도 엄마의 등에 업힌 채 할머니와 함께 들판에 나갔다.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100여 명의 주민들이 공회당 앞 들판에 빠짐없이 나왔다.

그곳 들판에는 나무기둥이 세워져 있었고 거기에는 정지우(가명)가 뒷결박을 당한 채 포승줄에 묶여 있었다.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파르르 떨리는 입술이 마을 사람들 눈에도 보였다. 군인 10여 명이 '앉아 쏴' 자세를 하고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고, 남천지서 경찰들이 군인들 뒤에 정렬해 있었다. 이윽고 군 장교가 소리쳤다.

"자, 지금부터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너, 누구네 집에서 빨치산(산사람)과 연통했어?"

군인은 정지우에게, 어느 집을 연고지로 해서 산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쌀과 음식물을 산으로 날랐는지를 이실직고하라고 했다. 벌벌 떠는 정지우 입에서 모기소리만한 말이 흘러나왔다. "안 들려. 이 자식아. 더 크게 얘기해!"라고 군 장교는 고함을 쳤고 그 소리에 정지우의 몸이 움찔했다. 덩달아 모여 있던 주민들도 오금을 저렸다.

눈 앞에서 본 총살,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손 서기 집입니다." 정지우의 이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아"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손 서기는 남천면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던 손세종을 말하는데, 다름아닌 손계홍의 아버지였다.

그 자리에 나와 있던 손세종의 처 조기야와 어머니 박씨는 화들짝 놀랐다. 박씨는 '야, 이놈아! 니가 언제 우리 집에 왔어야. 이런 죽일 놈을 봤나'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누구 앞이라고 그런 소리를 하겠는가. 생각대로 말을 했다가는 자신은 물론 며느리에, 귀한 손주까지 죽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장교가 부하에게 "야! 담배하고 물 좀 줘라"라고 했다. 방금 전까지도 벌벌 떨던 정지우는 순간 입매가 올라갔다. '이제는 살았구나'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정지우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타들어가던 담배가 반쯤 남았을 때, 장교가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렸다. 그 신호에 맞춰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정지우는 입매가 올라간 채 목이 꺾였다.

'손 서기'라 불린 손세종이 살던 경북 경산군 남천면 산전동 뒤편에는 청도로 넘어가는 생기산이 있다. 당시 생기산에는 빨치산 아지트가 있어서 군경 토벌작전이 빈번했다. 그러다 보니 '밤에는 인공(인민공화국) 세상, 낮에는 대한민국 세상'으로 불리며 주민들은 양쪽의 요구와 협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 날 총살당한 손남수도 빨치산에 협조해 정보와 음식, 물자를 제공하다 걸려 말뚝에 묶이게 되었다. 사건은 그가 군장교의 취조에 '혹시나 살아날 수 있을까'하는 심정으로 연락 거점을 손서기 집이라고 허위진술하면서 시작됐다.

손남수의 허위 진술이 낳은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이후 손세종은 경찰들에게 연행되었고 며칠 후 그의 어머니 박씨가 구장(이장)에게 찾아가 물었다. "우예 되었노?" "아재(손세종)는 3일 동안 지서 옆 창고에 갇혔다가 어제 쓰리쿼터에 실려 코발트광산으로 갔다카데예." 집안 조카뻘 되는 이장이 박씨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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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직후 민간인들이 대량 불법학살된 경북 경산시의 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 오마이뉴스

 
그렇게 해서 남천면사무소에 성실하게 근무하던 손세종과 마을사람 25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학살되고 말았다. 물론 코발트광산에서 학살된 산전동 사람들이 모두 손남수의 허위 증언 때문은 아니었지만, 허위증언이 일정 영향을 끼친 것 또한 사실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950년 7, 8월 경북 경산·청도·대구·충북 영동군의 보도연맹원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일부 등 최소 1800명에서 최대 3500명이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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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국회 양민특위에 제출된 손계홍의 아버지 손세종 신고서 ⓒ 박만순

 
그로부터 4년 후. 가마솥에서 기차 소리가 났다. '칙칙'하는 김빠지는 소리다. 손계홍은 솥뚜껑 손잡이를 옆으로 젖히고 찬물을 부었다. 다시 한차례 찬물을 붓고는 국자를 떠 간을 보았다. 국수에 흰 색깔이 없어진 걸 보니 면이 적당하게 익은 것 같아 면을 건져 냄비에 담았다. 국물은 다른 냄비에 담았다.

"끙"하고 머리에 냄비를 이고 손에는 또 다른 냄비를 들었다. 등에는 동생을 업은 손계홍이 논에서 일하는 부모에게 새참을 준비해가는 길이었다. 손계홍의 나이 여덟 살 때 일이다. "참 갖고 왔심더." 계홍의 말에 엄마가 "고생했데이"라고 대꾸했고, 아버지는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만 떼어내고 젓가락질 하기 바빴다.

"계홍아, 내일은 수제비 좀 준비하거래이." "예." 부리나케 국수를 먹은 엄마는 동생에게 젖을 물렸다. 잠시 후 엄마로부터 동생을 건네받은 손계홍은 그릇과 냄비를 챙겨 되돌아왔다.

남편 손세종이 죽은 지 3년이 지나고 손계홍 나이 7세 때 어머니 조기야는 재혼을 했다. 결혼 후 그녀는 경북 칠곡에서 살게 되었는데 일년 후에는 아기도 태어났다. 문제는 새로 결혼한 남편이 생활 무능력자라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농사는 엄마 몫이 되었고 의붓아버지는 모심기나 벼베기 할 때 손을 얹는 정도였다. 집안 살림과 나중에 태어난 동생들 돌보기는 첫째인 손계홍의 일이었다. 손계홍이 농번기에 학교를 한두 달 결석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결국 그는 경북 칠곡군 동명면 동부국민학교(초등학교)를 끝으로 배움을 작파해야 했다.

계홍은 초등학교 때부터 지게질을 했는데 나무 스무 단을 지고 20리(8km)를 걸어 장에 내다 팔았다. 한겨울에도 구멍난 양말에 파랑 고무신을 신고 장에 갔는데 어른들보다 시간이 두 배가 걸렸다. 엄마 조기야는 나무를 지고 가는 아들 계홍에게 "올 때 성냥 사온나. 글구 쌀이랑 누룩, 주모(酒母)도 사온나" 했다. 주모는 효모를 집중 배양한 초기의 술을 말한다. 아직 나무를 팔지도 않았는데, 엄마의 주문사항은 한둘이 아니었다. 

월급 가로채기 바빴던 의붓아버지
 

손계홍 증언자 손계홍 ⓒ 박만순

 
돈을 벌어야 했던 손계홍은 1960년대 초반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중국집 죽림반점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월급이 아예 없었는데 숙식제공에 기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몇 개월 후부터는 그나마 알량한 월급이 있었는데, 그것을 손에 한 번 쥐어보지 못했다. 월말이면 귀신같이 의붓아버지가 찾아와 계홍의 월급을 채갔다. 어린 소년은 사장이나 의붓아버지에게 항의 한 번 하지 못했다.

중국 음식점을 3년 만에 그만 둔 손계홍은 집으로 들어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살림살이와 어린 동생들의 돌봄이었다. 17세에 그는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농번기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도 했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술집에서 살며 술내기 윷놀이와 화투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술내기 윷놀이를 하던 이와 싸움이 붙어 칼부림까지 가 재판까지 받아야 했다.

의붓아버지가 일을 하지 않자 집안 형편은 급속히 악화됐다. 쌀이 없어 배곯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는 지옥 같은 집안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래서 대구에 있는 자전거 재생공장에 취직했지만 마찬가지로 월급은 받을 수 없었고 배 곯기는 변하지 않았다. 하루는 점포 안에 걸어 놓은 메주덩어리를 훔쳐서 먹는데, 목이 메어 다 먹지 못했다.

일을 해도 배가 고팠던 손계홍은 결국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집안 친척이 하는 자동차부속가게로 갔다. 한 겨울에 휘발유로 중고자동차부속을 씻다보면 손이 터 피가 줄줄 났다. 장갑도 없었고, 일을 안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손의 쓰라림에 손계홍은 눈물이 절로 났다.

일한 지 몇 개월 만에 시골에 사는 의붓아버지가 서울로 올라왔다. 손계홍의 월급 3000원을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의붓아버지와 공장을 운영하는 친척아저씨는 결탁해, 계홍에게 월급을 적게 주는 대신 그 돈을 의붓아버지에게 직접 주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이었다.

이번에는 평화시장으로 직장을 옮겼다. 원단을 구매하고, 완성품을 전국의 소매상에게 화물로 보내는 관리직이었다. 하지만 평화시장에서 7년을 일하는 동안에도 월급을 한번도 손에 쥐어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앞서의 중국집과 자동차부속가게와 마찬가지로 의붓아버지가 가로챘기 때문이다.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그는 결국 시골로 내려와 여러 일을 전전했다. 농사일부터 석공, 법인택시 운전기사 등의 일을 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과수원과 논농사를 짓고 있다. 지난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아버지 손세종의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그는 매년 추석이 다가오면 경산 코발트광산 근처 벌초를 한다. 벌초를 할 때마다 "아버지가 여기서 학살될 때 심정이 어땠을까?"하고 생각한다.

손계홍은 아무쪼록 아버지와 같은 시기에 학살된 수천 영령들이 해원 안식하기를 기도한다. 평생 힘들게 살아온 손계홍의 삶이 코발트광산에서 아직도 해원되지 못한 영령들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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