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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나온다던 틈수골, 알고보니 장인 어른이 숨진 곳

한국전쟁 보도연맹사건 희생자 김삼도의 딸 김청자·이장수 부부 이야기

등록 2020.09.11 08:22수정 2020.09.1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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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도 보고서(출처: 제4대국회 양민학살 실태보고서) ⓒ 박만순

 
"틈수골에서 귀신 나온대."

1970년대 초 경북 월성군 내남면사무소(현재는 경주시 내남면으로 편입)로 근무지를 배정받은 이장수는 귀신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내남면사무소에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동료들과 친해질 만할 때 들은 소리였다.

이야기하는 사람의 표정으로 봐 단순한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틈수골 얘기를 처음 듣은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요즘 세상에 뭔 귀신이 있나'라는 생각에서였다.

어느 날 밤 이장수는 면에서 경주 시내로 갈 일이 생겼다. 자전거를 타고 틈수골을 지나는데 무슨 불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의식하지 않았지만 골짜기에 가까워질수록 불빛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장수는 등이 서늘해지고 목이 타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귀신이 있으려구'하며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가 자전거 페달을 밟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골짜기 초입에 이르렀을 때는 불빛이 더 많아졌고, 이장수의 발과 자전거 페달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장수는 죽을 힘을 다해 자전거 페달을 굴려 골짜기를 바람처럼 빠져나왔다. 

다음 날 면사무소에 출근해서 동료들에게 지난 밤 얘기를 하니, 사람들은 '그것 봐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틈수골에는 귀신이 살았을까?

소 팔아서 살아난 사람과 골로 간 사람


1950년 7월. 충북 영동역 역무원이던 김삼도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충북 영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역에 내려 월성군 천북면 신당리로 가는 그의 마음은 분주하기만 했다. 시골에서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일을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김삼도는 "아버님 잘 계셨는교?"라고 안부 인사를 하고는 곧장 옷을 갈아입고 과수원으로 갔다.

사과 과수원은 연중 일이 있지만, 특히 여름에는 파란색 사과인 아오리를 수확하느라 바빴다. 사과는 품종에 따라 수확하는 철이 모두 다른데 당시 여름에는 아오리, 추석에는 홍로, 초겨울인 11월에는 부사를 수확했다. 

8월 8일 그날도 김삼도는 아오리를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청년방위대 대원들이 그를 찾아왔다. "지서에서 조사할 것이 있으니 잠시 가자"는 것이었다. "뭔 일인데요?" "당신이 산사람들 밥 해 줬다는 제보가 들어와서 그러는 거요!"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혀요. 난 영동역에서 근무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한참을 김삼도와 청년방위대원이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총을 든 청년방위대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날 월성군 천북면 신당리에서는 김삼도와 여러 명의 주민들이 천북지서로 연행되었다.

천북지서 유치장에 구금된 이들의 운명이 십여 일 후에 판이하게 달라질 것임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당시 천북면에서는 "지서장한테 돈 갖다 주면 나올 수 있다네"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렇게 해서 김성룡 아버지는 소 판 돈을 김종규 천북지서장에게 갖다 주었고, 그렇게 해서 김성룡은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삼도와 대다수 사람들은 내남면 틈수골에서 1950년 8월 20일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산사람들이 내려와 주민들을 못 살게 굴면 경찰들이 우리를 보호해 줘야지, 거꾸로 빨갱이로 몰아붙이냐!" 김삼도는 이렇게 항의했지만 그의 입바른 소리는 양심 있는 사람에게나 통할 일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직장인 영동역으고 복귀하지 못하고 '골'로 갔다.

1970년 초까지 내남면 틈수골에 나타난 도깨비불은 귀신이 아니라 유골에서 나온 인광(燐光)이었다. 즉, 흰 인은 공기 중에서 빛났는데 어두운 곳에서는 청백색을 띠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귀신이 나타났다고 한 것이다.

아버지는 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였다

김삼도가 학살된 후 아내 최금남은 3남2녀의 자식들을 책임져야 했다. 김삼도가 살아 있을 때는 최금남이 시아버지를 모셨는데, 남편이 죽은 후에는 배다른 시동생이 들어왔다. 이때부터 최금남과 자녀들의 고단한 삶이 시작되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과수원 일을 매일 했지만, 그 수확물은 단 하나도 이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수확물은 최금남의 새시어머니와 그 자식들에게 돌아갔다.

최금남과 자녀들은 머슴보다 못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과수원에서 일을 해봐야 점심과 저녁 두 끼 얻어먹는 게 전부였다. 품삯은 고사하고 쌀 한 톨 주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금남의 자녀들에게 학교는 언감생심이었다. 5남매 중 초등학교 졸업자는 김청자와 동생 둘뿐이었다. 김청자의 둘째 언니 김만호는 초등학교 1학년만 다니다 학교를 작파했다. 김만호는 성인이 되어서도 버스 행선지만 겨우 읽을 수 있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못 배운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셋째 김청자도 억지춘향 격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새할머니가 "학교 가지 말고 일해라"고 타박하면, 김청자는 "네"라고 대답하고는 소를 산 초입 나무에다 묶어 놓고 학교로 달려갔다. 당시에는 담임선생님의 심부름을 받은 반장과 몇몇 친구들이 마을로 수업료를 걷으려 다니기도 했는데, 이들 일행과 만날까봐 숨기도 했다.

김청자는 먼훗날 어머니로부터 아버지 김삼도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처형됐다는 말을 들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 이승만 정부는 남하하는 북한군에 협조할 수 있다며 민간인을 예비검속해, 불법 학살했다. 김삼도도 이같은 예비검속의 희생자였다. 

영양실조로 시력을 잃은 어머니

김삼도가 학살당한 후 그의 집에는 김재환(가명)이 양자로 들어왔다. 딸만 다섯인 집안이라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새어머니의 손자였던 김재환은 집안을 좌지우지했다. 하지만 그가 법적으로는 양자였고,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었기에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지금도 김청자는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자신보다 한 살이 많았던 새할머니의 손녀(사촌언니)는 수업료 걱정 없이 맘 편히 학교를 다녔는데, 자신은 수업료를 낼 때마다 가시방석이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김청자는 중학교 문턱을 간신히 넘었다. 그녀는 경주에서 공장을 하던 고모에게 통사정을 했다. 지역유지였던 고모부 이유근은 1952년 초대 지방선거 때 경주읍의원을 지냈고, 1956년 제2대 지방선거에서는 경주시의원에 당선돼 8년간 경주시의원을 지냈다(경주읍은 1955년 경주시로 승격됐다). 청자는 고모의 도움으로 수업료를 뒤늦게 납부해, 근화여중에 입학했으나 결국 졸업장은 따지 못했다.

문제는 김청자의 어머니 최금남이었다. 하루에 두 끼를 먹으며 시아버지 과수원에서 십수 년을 일한 그녀는 영양실조에 걸려 시력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1960년에 눈이 멀어 시각장애인으로 살다가 1975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는 건강할 때까지 담배 농사, 누에고치, 논농사, 과수원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그렇게 몸이 부서져라 했지만 어느 것 하나 자기 수입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눈이 멀어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됐을 때 최금남의 딸들은 모두 출가한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이 보다 못해 딸들에게 "너네 엄마 데리고 가"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딸들도 생활 형편이 녹록지는 않았다. 결국 최금남은 딸들 집을 돌아가며 살아야 하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장인의 명예회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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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민간인학살 위령탑 앞에 선 김삼도 사위 이장수(왼쪽)과 김하종 경주유족회장. ⓒ 박만순

 
"의장님, 어디쯤 오고 계신교? 아. 다 오셨다고요. 언능 오이소."

경주유족회 김하종 회장이 휴대폰을 내려 놓은 지 10여 분 만에 머리가 하얀 이가 사무실 문을 열었다. 자신이 김삼도의 사위라고 소개한 이장수는 장인이 영동역에 근무하다가 시골에 와서 보도연맹사건으로 학살되었다고 말했다. 자기가 1970년대 초 내남면사무소에 근무할 때 '틈수골은 귀신이 나오는 곳'으로 회자되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피해자의 직계가 아니었고, 결혼 후에 아내 김청자에게 들은 얘기가 전부라 당시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지는 못했다. 결국 기자는 이장수에게 "다음에 사모님(김청자) 모시고 오세요"라고 부탁했다.

다음 인터뷰에서 남편과 동행한 김청자는 아버지의 사연과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증언 내내 그녀의 눈물샘은 마르지 않았다. 아내의 인터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이장수도 장모와 아내가 힘겹게 살아온 대목에서는 눈시울을 적셨다. 이장수는 왜 이렇게 아내의 일에 열심일까?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때문이었다.

그는 수십 년 공직생활 끝에 주변의 권유로 월성군의원에 출마했다. 당시는 1991년으로 1961년 이후 부활된 최초의 지방선거였다. 1995년에 월성군과 경주시가 통합되면서 그해 봄에 통합경주시 시의원 선거가 치러졌는데, 거기에서도 당선되었다. 1991년에는 초대 월성군의회 의장을 했고, 1995년에는 통합경주시 의회 의장을 맡았다.

더불어 경상북도 시·군의장 협의회 회장을 2년간 맡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경상북도 23개 시군을 번질나게 드나들며 각종 행사에 참여했다. 1991년부터 내리 4선, 총 15년 동안 지방의원을 역임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집안일에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를 해 남다른 자긍심을 갖지만, 아내에게는 미안함이 더 크게 남았다.

그렇다고 아내에게 크게 해 줄 것은 없고, 장인의 명예회복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은 것이다. 아내 김청자 역시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엄마의 한스러운 삶을 역사가 기억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틈수골 #영동역 #천북지서 #청년방위대 #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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