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 18:30최종 업데이트 20.07.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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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현지시간)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의 BOK센터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날 1만9천석 규모의 유세장에는 관중이 3분의 2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 AP/연합뉴스

 
지난달 20일, 3개월여 만에 대선 유세를 재개한 트럼프 대통령은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유세장에 오겠다고 예약한 지지자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자랑하던 대통령 선거캠프는 소방당국 추산 고작 6200명의 참석자를 보면서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 외곽은 고사하고 행사장 내부도 3분의 1밖에 채우지 못한 것. 충격이 크면 원인을 회피하는 걸까? 대통령과 가족의 분노는 선거본부장에게 향했고, 백악관과 선거캠프는 이번 해프닝에 대한 보도의 확대 재생산을 막는 데 급급했다.

미국 언론들은 사건의 배후로 케이팝(K-pop)팬들을 지목했다. 전 세계 주요 언론들은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 갑자기 등장한 케이팝 팬들을 주목했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도 난데없는 사태를 맞아 덩달아 바빠졌다. 미국 정치를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수많은 정치학자, 평론가들의 정치 문법에 케이팝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미국 대선판에 뜬금없이 등장한 케이팝이라는 키워드는 트럼프 대통령의 치명적 약점을 땡볕 아래 고스란히 까발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약점

대선을 만 4개월 앞둔 트럼프 대통령은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물론 그가 겪는 시련의 단초 대부분은 스스로 제공한 것들이다. 코로나19와 같은 예상치 못한 거대한 재난의 책임이 반드시 지도자로 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단합을 호소하고 국론을 모으면 지지도 상승 요인이 되기도 하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시련의 미국을 분열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구호를 '증오의 상징'이라고 말할 정도다. 최근 트럼프는 중국에 대해 화가 많이 나 있는데,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홍콩보안법'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코로나19 확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트럼프의 독특한 상황인식은 미국 내부의 분열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미국을 점점 고립시키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전략'의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된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의 대선 전략을 기존의 외연 확장에서 내구성 다지기로 수정한 것으로 보였다. 공화당 본류마저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만 믿고 따르는 '묻지마 지지층'에게 정체성에 대한 동질감을 보여주면서 충성을 서약하게 하자는 전략이 그것이다. 어찌 보면 '눈에 안 띄는 게 득이 되는' 바이든의 전략보다 '어쨌든 뭔가 보여주려는' 트럼프식의 전략이 정치 문법에 더 맞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한 트럼프 전략에 치명적 독이 있음을 폭로한 이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이 바로 케이팝 팬들이다.
 

방탄소년단(BTS)의 팬클럽 '아미'의 강력한 팬덤 문화를 소개하는 CNN 뉴스 갈무리. ⓒ CNN


케이팝 팬들, 그들은 누구인가

시더보우 세지(CedarBough Saeji) 미국 인디애나대학교 블루밍턴 캠퍼스 동아시아문화학 객원교수는 케이팝 문화 전문가다. 그는 이번 트럼프 대통령 유세장 '노쇼'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케이팝 팬들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시사에 밝고 영어를 구사하는 미국인들"이라고 설명했다. 젊고, 사회적으로는 진보 성향을 보이며, 문화적으로 개방된 사고를 하면서 온라인 플랫폼 활용에 매우 능숙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인 케이팝 팬 니콜 산테로는 6월 22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케이팝 팬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아주 열정적인 사람들"이라며 "(이런 특징은) 사회 문제로도 잘 옮겨진다"라고 밝혔다.

케이팝 저널리스트인 홀리 스미스 기자는 영국 <텔레그래프>에서 "케이팝 팬들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소셜미디어에서 하나로 뭉칠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증명했다"면서 "이제는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싶은 일에 열정과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증언한다.

케이팝 전문가들이 증언하는 이들의 정체는 한마디로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젊은 진보층이며, 개방적이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과 행동을 보이는 미국인들로, 이제는 무엇에 대해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할 준비가 된 집단'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는 오래 전부터 유럽 등 서구의 많은 외신들이 내놓은 케이팝 문화에 대한 평가와는 다소 어긋난다. 그간의 평가는 주로 케이팝의 획일적이고 수동적인 문화에 집중됐다. 일부 서구 언론에 비친 케이팝이란 대형 공장과 같은 기획사들의 맞춤형 상품으로, 아이돌 가수나 그들의 음악도 개성 없는 공산품과 같다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상품인 아이돌은 자신들의 사고를 표현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기획사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말할 뿐이라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발생하고 있는 일부 아이돌 가수들의 불행한 일들과 비리들은 인간 아티스트들을 상품으로 전락시킨 케이팝 산업의 폐해라는 진단 역시 빠지지 않았다.

케이팝의 정체성

같은 맥락에서 지난 6월 26일자 독일의 <쥐트도이치차이퉁>(Süddeutsch Zeitung)은 미국 대선 정국을 휘저은 이번 사건이 케이팝 문화의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보인다. 한국의 제작사들은 보증된 공식에 따라 스타와 히트송을 만들어낸다며 그렇게 나온 예술이 나쁘지는 않다고 이 신문은 평가한다. "안무 연출은 결함 없이 완벽하고, 노래에도 정말 재능이" 있으며 특히 "BTS와 같은 유명한 그룹은 자신들의 메시지도 가지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 매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과 창조적 깊이는 케이팝의 강점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음악적 재능과 멋진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에는 다양성과 창의적 깊이가 없다면서, 오히려 케이팝 문화에는 일정한 표준이 정해져 있는 듯 보인다고 지적한다.

몇 달 전까지 한국의 수도 서울의 거리에서 펼쳐졌던 역동적이고 때로는 시끄러운 사회적 분쟁에 케이팝 스타들은 어느 쪽에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수의 외신들도 한국의 케이팝 스타들은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에 대해 특정 입장을 밝히기를 꺼려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6월 23일자 영국의 로이터통신도 케이팝 팬들은 외국의 당파적 싸움에 휘말릴 위험이 있는 이번 미국 대선 해프닝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의 젊은 연예인들은 팬카페에서도 정치적 논의를 금기시 하고, 그들의 팬들 역시 스타들의 인권 운동과 같은 영역은 지지하고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적 사안에 대해서는 함께 목소리를 내지만 자신들의 우상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은 경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케이팝 문화가 어떻게 미국의 가장 민감한 대선 정국의 한복판에 파문을 던지는 역할을 하게 됐을까?

다수의 외신들이 분석하는 이러한 극적 전환은 국제적 케이팝 팬들의 활동에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6월 29일자 벨기에의 일간지 <레코>(L'Echo)는 케이팝 커뮤니티가 과거에는 정치적 색채를 띠거나 정치적 흐름에 관여한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매체에 따라 수천만이라 추정하기도 한다)에 이르는 이들에게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 전환기는 지난 5월 미국 경찰의 과잉 진압에 의한 조지 프로이드의 죽음이다.
 

1일(현지 시간) 미국 콜로라도 주도 덴버에서 폴 파젠 덴버 경찰서장이 백인 경찰의 가혹 행위에 의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대와 팔짱을 끼고 있다. 2020.6.1 ⓒ AFP=연합뉴스

 
케이팝 팬덤의 극적인 전환

<레코>에 따르면 "세계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케이팝의 아이콘 BTS가 공개적으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에 적극 지지를 표명했고, 이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팬들을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22일자 <뉴욕타임스>도 BTS 등 케이팝 그룹들이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Speak Yourself)는 말에 고무된 팬들이 스스로 행동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감에 대한 메시지에 자극 받은 이들 팬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바로 정치적 소수자들이었던 '여성과 유색인종들'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CNN 역시 6월 22일 인터넷 보도에서 "많은 케이팝 팬들은 유색인종들 또는 소수자 공동체(LGBTQ community)의 일원"이라고 케이팝 팬들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가진 강력한 무기는 바로 조직력과 행동주의다. 호주의 일간지 <에이비시>(ABC)는 6월 27일자 보도에서 <보이밴드의 역사>의 저자 마리아 셔먼의 말을 인용해 케이팝 팬들의 동원력은 전문가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이 점은 앞서 언급한 케이팝 전문가 세지 교수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영국 <텔레그래프>는 6월 22일자 보도에서 케이팝 팬들은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더라도 하나로 뭉쳐서 목표를 달성한다고 분석했다.

이런 놀라운 조직력에 더해 케이팝 문화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보편적 선(Virtue)'이다. 6월 24일 <워싱턴포스트>는 한국의 아이돌 팬들에게는 아이돌을 '키우는' 역할까지 부여된다고 말한다. 소셜미디어를 능숙하게 다루는 팬들의 지원 여부에 따라 아이돌의 인기와 성패가 갈리고, 이러한 팬덤 문화는 아이돌에게 일정한 압력으로 행사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압력은 그들 스타들이 깨끗하고 올바르며 책임감 있는 이미지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 신문은 설명한다.

정치적 실험 결과는?

누구에게나 칭찬받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 선행, 보편적 건전함, 보편적 인권 의식을 가진 케이팝 스타들(의 이미지), 그리고 그들에 대해 기동성과 조직력, 집단적 행동으로 지지를 보내는 팬들의 응답, 이 둘의 결합은 자선 사업을 위한 모금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호주의 경우 초대형 산불을 진압하는데 동원이 되기도 하며,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에 적극 목소리를 내는 등 전 지구적 차원의 보편적 선을 향한 적극적 메시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 20일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 털사에서 열린 트럼프 대통령 유세 현장에서 '부재를 통한 존재감'을 보여준 케이팝 팬덤의 집단행동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 돌발 상황은 대선을 앞둔 트럼프 대통령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미국에서 케이팝 팬들의 행동양상은 앞서 말한 대로 보편적 가치를 향해 움직여온 것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행동반경이 커질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입지는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쪽으로 낙인 찍힌다. 케이팝 팬들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들이 믿는 보편적 가치에 반하는 후보이고,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반드시 낙선시켜야 하는 후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정치적 실험은 앞으로도 주시해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미 이들이 미국 대중문화 속 서브컬처의 한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점이다.

대선을 4개월여 앞둔 미국 정치의 한 복판에 갑자기 등장한 케이팝 팬덤 그룹을 <뉴욕타임스>는 '디지털 전사들의 느슨한 연합'이라고 부르고 <워싱턴 포스트>는 '케이팝 혁명'이라고 부른다. 호주의 <에스비에스>(SBS)는 이들을 '사회운동가'라고 부르고 프랑스의 <르 피가로>는 '21세기 펑크운동'이라고 칭한다.

과연 이들은 20세기 히피 문화와 같은 역할을 21세기 미국사회에서 해 보일 것인가? 혹은 그 이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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