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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년 만에 '6.25 전사자' 인정, 전쟁이 만든 부부의 비극

93세 아내가 들려준 고 박규원 소위 이야기...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결정적 역할

등록 2020.06.25 07:36수정 2020.06.25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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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고 박규원 소위(1924년생, 1951년 4월 15일 사망)의 아내 이봉희(93)씨가 강릉 자택에서 <오마이뉴스> 만나 사실과 다른 남편의 사망 기록에 대해 억울함을 토로했다. ⓒ 유성호


빛바랜 흑백사진 속 앳된 부부. 아내는 93세 할머니가 됐지만, 기억 속 남편은 여전히 스물일곱의 얼굴을 하고 있다.

1951년 멈춰버린 남편의 시간을, 그녀는 여전히 기리고 있다. 남편이 숨을 거두던 날의 황망함을, '나만 두고 왜 먼저 갔냐'는 원망의 마음을 지금도 머릿속에 품고 있다. 언제부턴가는 하늘에서 만날 남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이다.

누구도 흐르는 시간을 붙들 순 없다. 하지만 아무리 재빠른 시간이라도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마저 흩트리진 못한다. 오히려 기억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6.25전쟁 70주년을 이틀 앞둔 지난 23일, 고 박규원 소위(1924년생, 1951년 4월 15일 사망)의 아내 이봉희(93)씨를 강릉 자택에서 만났다.

"그땐 밤낮 우는 게 일이었지요. 전쟁통에 피난을 왔으니 먹고 살 것도 걱정인데, 남편까지 그렇게 됐으니, 하이고야. 다 옛날 추억으로 생각하고 산다지만 그게 그렇게 살아집니까. 부처님 아니었음 하루도 못 살았을 겁니다."

두 사람은 1947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지만 6.25전쟁은 3년 만에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놨다. 강릉농고 교사이자 배속장교로 있던 박 소위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나자 제자들과 함께 경주로 이동해 8사단에 입대했다. 남편은 스물세 살 아내와 세 살 아들을 남겨둔 채 전장으로 나가야 했다.

같은 해 8월 8사단 16연대 작전참모 보좌관에 임명된 그는 9월 영천전투에 참전해 북한군 15사단과 맞섰다. 국군은 9월 13일까지 벌어진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고, 9월 15일 유엔군과 함께 인천상륙장전까지 성공시키며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만큼 의미가 깊었던 영천전투에서 박 소위는 포탄 파편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고, 동래에 있던 제59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남편 찾아 떠난 피난길
  

69년 만에 전사자 인정된 고 박규원 유가족 “병원에 있는 형님, 육군 기록에는 소집해제?” ⓒ 유성호


강릉에 머물고 있던 아내는 한동안 남편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다 남편과 함께 경주로 후퇴했던 학교 제자로부터 그가 부상당했단 이야기를 듣게 됐다. 학도병에 지원했던 그 제자는 전세가 역전돼 북진하는 도중 박 소위의 소식을 가족들에게 전했다. 이듬해 1.4후퇴 때, 아내는 남편의 동생 2명과 함께 피난 겸 병문안 길에 올랐다. 당시 상황은 당시 15세였던 박 소위의 남동생 박흥원(84)씨가 명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버스가 있어요, 뭐가 있어요. (강릉시내에서) 묵호까지 걸어갔죠. 어렵게, 어렵게 조그마한 발동선 하나 얻어 탔는데 중간에 배가 고장 나서 표류하게 된 거예요. 어휴, 거기서 죽게 생겼잖아요. 근데 멀리서 발동선 한 대가 오더라고. 마침 우리 배에 해군사령부 전령이 타고 있었거든요. 그 전령이 호루라기를 막 불었죠.

근데 그 배가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전령이 이젠 총을 타다당 쏘더라고. 그제야 그 배가 우리 쪽으로 오더라고요. 그 배가 우리가 탄 배를 인양해서 후포(현재 울진에 속한 항구)까지 갔어요. 거기서부터 또 걸어서 경주로 갔다가 언양(현재 울주군에 속한 지역)까지 가서 겨우 피난처를 구했죠. 언양의 무슨 버스매표소 같은 데 앉아 있었는데 버스회사 사장이 우릴 안타깝게 본 모양이에요. 자기가 사는 기와집의 행랑채를 내주더라고요."


박 소위의 아내와 두 동생은 다음날 곧장 제59육군병원으로 향했다. 전쟁통에 동래의 한 여관(온천장)에 차려진 병원이었다. 박 소위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겠더라고요.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얼굴에 살갗만 붙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포탄 파편에 맞은) 가슴을 이렇게 훑으니까 응고돼 있던 피가 두부처럼 후두둑 떨어지더라고요. 요즘 같았으면 수혈도 해서 살릴 수 있었겠지만 그때 무슨 치료가 있었겠어요. 그때 저희 형님과 중위 한 명, 대위 한 명이 같이 있었는데 다 같이 붙잡고 울고불고 그랬죠."

이후 박 소위는 양산의 통도사로 옮겨졌다. 동생 박씨는 당시를 1951년 3월 정도로 기억했다. "국군이 북진하면서 경환자는 원대복귀시키고 중환자는 통도사로 옮겼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박 소위의 아내와 함께 통도사에도 몇 차례 면회를 갔던 그는 "형과 같은 중상자들이 주로 수용돼 있었다. 날씨가 추웠음에도 마땅한 병실이 없어 마루에까지 환자를 눕혀놨었다"라고 떠올렸다. 얼마 후 박 소위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져온 돈도 다 떨어져서 제가 그때 엿장사를 시작했어요. 나중엔 미군들 상대로 양담배도 팔고, 쪼꼬레뜨도 팔고, 츄잉껌도 팔고 그랬죠. 그런데 어느 날 일 마치고 피난집에 가보니 형님이 와 계시더라고요. 4월 14일이었어요. 통도사에서 큰길까진 차를 타고, 거기서부터 피난집까진 버스를 타고 왔다 그래요. 위생병이 계속 부축하면서요. 내 생각엔 형님이 오래 못 살 것을 예감하고 가족 품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게 오셔서 하룻밤 주무시고 4월 15일에 돌아가셨어요."

인정받지 못했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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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규원 소위는 6.25 전쟁 당시 영천지구 전투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부산 제59육군병원을 거쳐 양산 통도사에서 치료를 받다 1951년 4월 15일 사망했지만, 육군에는 1951년 1월 27일 소집해제 됐다는 기록으로 전사자로 인정을 못 받았다. 고 박규원 소위의 유가족은 2020년 3월 9일 사후 69년만에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진상규명을 통해 명예회복과 전사자로 인정을 받았다. ⓒ 유성호


박 소위는 가난한 농부 집안의 7남매 중 장남이었다. 소작농이었던 아버지는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 교육에 열성이었고, 특히 박 소위는 춘천사범학교를 졸업(2회)할 만큼 수재였다. 동생은 큰형이 세상을 떠났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부터 난다.

"형님은 우리 집의 기둥이었어요. 기둥이 무너진 거예요. 저희 아버지가 소작농이었거든요. 쌀 10가마 지으면 반은 주인주고, 우린 반만 갖고 먹고 살았어요. 그렇게 순 농사만 짓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시던 분이 저희 아버지셨죠. 그 어려운 살림에도 자식 교육은 빚까지 얻어 다 시키셨어요. 맏이를 잃고 부모님이 너무 힘들어하셨어요.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한이었죠.

저도 형수님과 함께 피난지에서 형을 잃었잖아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막막했는데 다행히 피난집 주인이 화장을 도와주셨어요. 뼛조각을 항아리에 모으는데, 참 정말 얼마나 서럽던지... 제 몸에 있는 눈물의 절반을 그때 다 흘렸어요. 내 맘도 그랬는데 우리 부모님, 그리고 우리 형수님은 또 어땠을까요."

하지만 박 소위는 69년 넘게 '전사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가 1951년 1월 27일 소집해제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박 소위가 4월 15일 세상을 떠났으므로 군인사법상 '군 복무 중 사망한 자'가 아니라는 게 그동안 국방부의 논리였다.

백방으로 알아봐도 벽에 막혀왔던 가족들은 2019년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아래 위원회)'의 존재를 알게 됐다. 2018년 특별법 제정으로 만들어진 위원회는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중 의문이 제기된 사건에 대해 진상을 명확히 규명하고 그 관련자의 피해와 명예회복, 나아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회복과 인권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위원회는 지난 2019년 9월 "망인(박 소위)의 사망구분에 관한 사항을 전사자로 심사할 것을 국방부장관에게 요청한다"고 결정했다. 각종 군 기록 확인, 현지답사(언양 기와집, 통도사 등), 참고인 면담(학도병, 임관 동기생 등) 등을 이어간 결과물이었다. 6개월 후인 지난 3월 국방부는 결국 박 소위를 전사자로 인정했다. 박 소위 사망 후 69년 만이었다. 아래는 위원회의 결정문 내용 중 일부다.

"망인의 군 인사명령지 상 1951년 1월 27일 소집해제 된 것으로 확인되지만, 그 당시 망인은 영천전투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후송돼 제59육군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인 상황이었다. 이후 1951년 3월 경 군이 관리하는 통도사 임시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던 중 사망한 것으로 당시 망인은 소집해제된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군의 관리 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군인이 소집해제되면 당사자 또는 가족에게 소집해제 소식을 통보한 후 당사자를 귀가 조치(당사자가 부상으로 혼자 거동이 어려운 경우엔 가족들에게 신병을 인계)한다. 하지만 당시 군 병원에서 치료 및 관리하고 있었던 사실에 비춰보면 사망 당시 망인은 실질적으로 군인의 지위와 신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망인은 6.25전쟁의 전사자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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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용화전 불상에서 나온 연기문에 6.25 전쟁 때 제31육군병원이 통도사에서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고 박규원 소위가 통도사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진술의 신뢰성이 입증되었다. ⓒ 유성호


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조사 쟁점 중 하나가 '통도사에 임시 병원이 꾸려졌는지' 여부였는데, 군에는 이를 증명할 기록이 없는 상황이었다.

위원회는 "당시 상황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1960년 통도사에 입적해 6.25전쟁을 직접 경험한 노스님들로부터 상세하게 그때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는 성파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성파스님은 "6.25전쟁 당시 육군병원이 통도사에 주둔해 중환자를 치료했다. 당시 3~4월 추운 날씨임에도 마루까지 부상자를 수용할 정도로 넘쳐나 난방을 위해 사찰에 있던 각종 서책, 경책을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매일 10명 가량의 군인이 사망해 시신을 화장했다"며 자신이 노스님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위원회가 성파스님을 만난 직후엔 이를 증명할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2019년 9월 통도사 용화전의 미륵불소조좌상의 복장유물(불상을 만들 때 가슴 안쪽에 넣는 유물)에서 '용화전 미륵존불 갱 조성연기'라는 제목의 문서가 나온 것이다. 이 문서에는 "불기 2974년 경인(1950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입사해 2979년 임진(1952년) 4월 12일에 퇴거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는 박 소위의 전사를 증명하는 핵심 자료일 뿐만 아니라, 6.25전쟁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69년 만에 꿈에 나타난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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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강원도 강릉에서 고 박규원 소위의 아내 이봉희씨와 아들 박상훈씨, 동생 박흥원씨가 <오마이뉴스>와 만나 69년만에 전사자로 인정 받은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아내는 최근 "희한한 경험"을 했다. 국방부로부터 전사자로 인정받은 직후, 남편이 처음 꿈에 나타난 것이다.

"(남편) 죽고 나서 처음 꾸는 (남편) 꿈이에요. 군복 입은 청년, (사진을 가리키며) 딱 저 모습이었어요. '장인한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으니 명태 한 마리 사다 (장인) 제사를 좀 지내 달라'며 손에 뭘 쥐어주더라고요. 그리고 쫓아갈 새도 없이 후딱 저 멀리 갔어요. 꿈에서도 정신이 없어서 손을 꼭 쥐고 있었더니 뭘 쥐어줬는지도 모르겠어요.

잠에서 깼는데 어찌나 놀랬던지, 이전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사람에게 영(혼)이 없단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본인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나 봐요. 결혼하고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으니까, 그게 제일 불쌍해요. 이제 명예를 찾았으니 아미타불 따라 잘 가시라고 기도하는 게 제 일이죠. 나도 곧 가야 하니까... 요즘은 나도 어서 데려가라고 기도해요."

동생은 '이제야 전사자로 인정된 형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요청한 기자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눈물과 함께 말을 쏟아냈다.

"형님, 6.25전쟁 일어나고 70년이 지났습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인정을 못 받고 이제껏 지내왔는데 이번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이라도 편안히 눈 감으시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진정 접수 기한은 2020년 9월 13일까지이다
#6.25전쟁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박규원 #소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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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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