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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행 당하고 있어"... 9년만에 드러난 20대 청년 의문사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박태순 사건

등록 2020.06.20 11:23수정 2020.06.2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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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 박태순 열사의 묘. 아직도 그의 죽음은 까닭을 알 수 없다. ⓒ 한미숙

 
박태순은 전두환 정권기인 지난 1985년 3월 한신대 철학과에 입학 후 반독재민주화운동, 노동자권익운동을 지향하는 서클에 가입했다. 그리고 1985년 5월 한신대 총학생회에서 주도한 시위, 1986년 6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학생시위, 1986년 9월 아시안게임 반대 시위 등에 참가했다.

그는 또한 1986년 12월 학생운동권 친구들과 노동운동을 준비하는 서클을 조직해 활동했다. 한신대 철학과 친구들의 소개로 수원지역 노동운동조직에도 가담했다. 이어서 1987년 5월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에 있는 금속공업회사, 1988년 4월 경기도 용인군(현 용인시)에 있는 열교환기 회사에 형 이름으로 위장취업 해 임금인상 등 노동자 권익을 위해 활동했다.

1989년 5월 20일 그는 수원지방 검찰청사에서 "학살원흉 민중생존권탄압 노태우 정권 해체하라"는 구호가 게재된 유인물, 태극기, 화염병 등을 감추고 들어가 공안검사실을 점거하고 "공안합수부 해체 및 이철규 열사 사인규명"을 요구하면서 시위했다. 그 결과로 1989년 5월 22일 그는 구속되어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의 죄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후 1990년 11월 18일 만기 출소했다.

출감 후 박태순은 1991년 3월~4월 '수원지역노동자 친목산악회'를 조직한 후 수원에 있는 대영정밀, 필립기계, 가야정기 등 중소회사에 다시 형 이름으로 위장취업 했다. 부친의 소개로 1992년 8월 16일 부천시에 있는 수영기계에 취업해 의문사한 1992년 8월 29일까지 선반공으로 일했다.

박태순은 1992년 8월 29일 오후 6시 30분경 수영기계에서 일을 마치고 공장사무실에서 약 2시간 동안 직원들과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밤 9시경 직원과 함께 걸어서 역곡역에 도착해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는 혼자 구로역에 내려 수원행 1호선 전철로 갈아탔다. 9시 31분경~47분경 시흥역에 내려 역 구내에서 약 10분 동안 머문 것으로 보인다.

왜 집과 반대 방향으로 갔을까

이어 밤 9시 55분경 시흥역 경부하행선 서울 기점 17.1㎞ 지점 저상홈 선로변에 있다가 서울발 광주행 열차의 앞부분 왼쪽 승강대 손잡이에 부딪혀 선로좌측으로 튕겨나가 두개골 파열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경찰은 사고현장 감식 후 신원을 확인할 수 없다며 박태순을 신원 미상의 변사자로 처리했다. 이 때문에 박태순은 의문사위가 밝힐 때까지 한동안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박태순이 평소 이용하던 석수역에서 내리지 않고 시흥역에서 내려 형의 집 반대 방향인 구로 방향 일반홈을 지나 저상홈 약 35m지점까지 이동한 경위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국군기무사령부(아래 기무사,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는 1991년~1992년 사이 좌경세력에 대한 군내 좌경의식오염 및 확산방지차원에서 군내 좌경전력자에 대한 동향관찰 등 일명 '마파람사업'을 했는데 그 대상자를 A, B, C급 등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었다.

이아무개는 박태순의 한신대 철학과 85학번 동기로, 박태순과 함께 1989년 5월 20일 수원지검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되어 1990년 11월 징역 1년 6개월의 수형생활을 마치고 1991년 4월 육군사병으로 군복무를 시작했다. 서울 지구 기무부대에서는 마파람사업의 일환으로 1991년 5월부터 신원조회, 공안기관의 정보제공 등을 통해 이아무개를 'A급 좌경 관련 동향 관찰 대상자'로 선정했다. 그리고 기무부대 상사 추아무개는 이아무개의 좌경 혐의점을 포착하고자 기초 내사를 했다.

추아무개는 이아무개에 대한 기초내사 과정에서 그의 친구인 박태순의 인적사항을 파악했다. 또한 추아무개는 1991년 8월 15일 안성에서 수원 지역 노동운동가들의 M.T. 현장을 탐문했고, 같은 해 10월~11월 수원경찰서 대공과, 경기지방경찰청 공안분실, 한신대 경찰상황실 등을 방문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러면서 추아무개는 박태순과 그의 친구들이 위장취업 한 대일화학·금호전기·가야정기·삼성전자 등의 공장을 방문하는 등 집중적으로 사찰했다.

당시 기무사는 박태순 등이 군인이 아니라 모두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사찰했다. 추아무개 등은 1991년 11월 7일 오전 10시 30분경 박태순과 함께 수원시 자취방에 기거했던 백아무개(한신대 86학번, 수원지검 점거농성 사건 관련자)를 미행하다가 자신들의 미행이 노출되자, 현장에서 백아무개를 검거하고 관할 수원세류파출소에 이첩했는데 검거 당시 추아무개가 백아무개에게 "박태순은 어디 있느냐?"고 추궁했다.

필자가 2000년대 초반 몸담았던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아래 의문사위)는 추아무개가 지난 1992년 1월 18일 경찰청 정보기록실을 방문해 박태순과 그 친구들의 정보기록을 열람한 사실을 확인했다.

대선 앞두고 공안 업무 강화한 경찰

한편 1991~1992년 경찰은 1987년 이후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노동현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자 1989년 대공2계 내에 있던 좌경의식화반을 대공3계로 독립해 좌경의식화 사범에 대한 내사공작 업무를 강화했다. 그리고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안업무를 대폭 강화했다.

의문사위는 경기지방경찰청 공안분실, 수원경찰서, 화성경찰서 보안과 등을 대상으로 박태순에 대한 내사활동 여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의문사위는 이 기관들이 1991~1992년경 박태순과 그 친구들이 수원지역에서 위장취업을 해 노동운동을 한 것을 파악하고 이들에 대한 내사·검거 업무를 집중적으로 수행한 사실을 확인했다.

의문사위는 박태순 열차 사고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박태순 사망 당일을 전후해 그의 주변 인물과 정황을 집중 조사했다. 

우선 박태순이 자살할 만한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죽음을 암시하는 징후나 유서 등도 발견된 것이 없었다. 당시 사고 열차 기관사는 "변사자(박태순)가 비틀거리면서 선로변에 근접해 서 있었다"라고 진술했는데, 선로변에 갑자기 뛰어들거나 누워 있는 등 일반적인 자살 유형과 다른 점으로 보아 박태순이 자살한 것은 아닌 것으로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박태순은 사망 당일 부천에 있는 수영기계에서 일을 마치고 공장 사무실에서 직원 4명과 함께 술 한잔을 하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귀가하는 중이었다. 사고 열차 기관사는 당시 작성한 진술서에서 "200m 전방에서 변사자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면서 선로변에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변사자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정황이 아니었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또한 의문사위는 현장에 출동한 시흥파출소 직원, 서울남부경찰서 변사 담당 형사, 검안의, 사체를 수습한 영안실 직원, 시흥역 부역장에게서 사망 현장에서 공안기관원을 목격했다는 진술도, 다른 타살 정황에 대한 진술도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의문사위는 박태순이 음주 후 취한 상태에서 귀가 중 단순 열차사고로 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박태순 ⓒ 의문사위 자료

  
"기관원의 미행이 있어 약속 시각에 늦었다"

하지만 박태순이 사망 2주 전 중학교 동기 등과 경기도 광명시 한 호프집에서 만났을 때 기관원의 미행이 있어 약속 시각에 늦었다고 말한 점, 또 당시 그가 귀가하려면 집과 가까운 석수역에서 내려야 하는데도 시흥역에서 내려 집 반대 방향인 저상홈 철로변에서 사망한 점은 석연치 않다고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또 당시 변사 사건을 처리한 경찰이 박태순의 바지 주머니에서 전철 정액권 외에는 일체의 소지품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의 지문상태가 선명하면서도 특이했는데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등 타살과 은폐에 대한 의혹도 있다고 의문사위는 판단했다.

지난 2001년 의문사위에서 박태순에 대한 내사여부를 조사받던 서울 지구 기무부대 방첩과 좌경계 소속 군무원 이아무개는 이렇게 진술했다.
 
당시 기무사 요원 추아무개가 1992년 2월 대구지역 파견반 전출을 가고 나서 몇 개월 후에 첫 휴가 시 오전 10시에서 11시경 기무부대 방첩과 좌경계 사무실에 찾아와서 '전에 우리가 내사했던 박태순이 전철역에서 죽었다. 오늘 기차를 타고 올라오다가 수원에서 내려 수원지역의 경찰들을 만나고 올라왔는데 경찰들 이야기가 박태순이 죽었다고 하더라'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같은 날 추아무개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오류동의 한 식당에 가는 도중 일부러 부천 역곡역 인근에 있는 수영기계 공장에 들렀는데 여기에서 추아무개는 '여기가 박태순이 근무한 공장이다'라고 하고 역곡역을 가리키면서 '이쪽 방향으로 출퇴근했는데, 이 도로로 역곡역에서 전철을 타고 다니다가 죽었다.'
 
철로 사고 후 신원 미상의 변사자로 처리되어 행방불명 되었던 박태순의 사망 사실과 수영기계 근무 사실을 사망 당시 기무사 요원 추아무개가 알고 있었다는 이아무개 진술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의문사위는 추아무개를 조사했다. 그 결과 추아무개는 1992년 하반기 여름휴가 중 서울 사무실에 방문한 사실이 없고, 동료 이아무개에게 "박태순이 전철역에서 죽었다"고 말한 사실도 없다고 적극 부인했다.

그러나 기무사로부터 입수한 1992년 추아무개의 여름 휴가명령서에는 휴가기간이 "1992년 9월 2일부터 9월 6일까지(5일간)" 휴가 행선지는 "서울강서지역"으로 기재되어 있어 추아무개의 진술은 진위가 의심스러웠다. 따라서 의문사위는 추아무개의 이외 행적(알리바이)을 확인하고자 주변 인물과 증거 자료를 수집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0년이나 지난 일이라 추아무개의 행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당시 의문사위의 조사 권한으로는 추아무개의 금융거래 내역 조회, 통화 내역 조회 등을 할 수 없었다. 의문사위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통해 추아무개 진술의 신빙성 여부를 판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추아무개와 이아무개가 모두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 불응했다.

이아무개의 진술만으로 추아무개가 박태순의 사망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또 박태순이 열차 충돌로 사망한 현장을 목격 또는 인지한 공안기관원이 있었다는 증거나 정황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의문사위는 '진상규명불능'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자료협조 거부한 기무사와 법무부 검찰과

기무사는 의문사위가 7개월간 3회에 걸쳐 요청한 마파람사업에 대한 자료를 끝내 공개하지 않았다. 경기지방 경찰청 공안분실은 내사 공작 관련 문서를 폐기해 관련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법무부 검찰3과는 공안조회에 대한 회신이 대외비라며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의문사위는 권한 제약과 위 기관들의 비협조로 관련 자료를 입수하지 못해 박태순 사건에 대한 조사를 충분히 할 수 없었다.

당시 서울남부경찰서는 박태순의 사망에 대해 신원을 알 수 없는 변사자가 무단횡단을 하다 열차에 충돌해 두부 파열로 현장에서 사망한 단순 사고사로 보고했다. 서울남부경찰서 변사 사건 담당 형사는 1992년 8월 29일 박태순의 사고 현장에서 변사자의 바지 주머니에서 전철 정액권 외에 소지품 일체를 발견하지 못해 변사자의 인상 착의를 토대로 서울남부경찰서 상황실 계통으로 신원 수배하고, 열손가락의 지문을 채취해 경찰청 지문감식과에 신원 조회를 의뢰했다.

그러나 1992년 10월 8일 '지문 불발견' 통보를 받고 구로구청에 연락해 행려사망자로 사체 인도를 의뢰했다. 그 결과 박태순의 사체는 구로구청과 서울장묘사업소를 거쳐 1992년 10월 27일 경기도 벽제리 묘지에 행려사망자로 가매장되었다.

벽제리 묘지관리소는 1984년 4월 20일부터 무연고 사망자 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해 매장지 확보난 해소와 개장지 재활용 등 효율적인 묘지관리를 위해 박태순이 가매장된 지역의 무연고 사망자 약 300여 구를 일괄적으로 개장해 화장했고 사체는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납골당)에 유골 상태로 안치했다.

의문사위는 1992년 8월 29일 전후 서울시 행려사망자 212명에 대한 변사 자료를 검색하던 중 구로구청에서 1992년 8월 29일 오후 9시 55분경 시흥역 구내에서 열차사고로 사망한 신원을 알 수 없는 변사자의 사체를 가매장 처리한 기록을 발견했다. 의문사위는 당시 변사자로부터 채취한 신원조회용 열손가락 지문을 경찰청 과학수사과 지문계에 재확인 의뢰했다. 그리고 2001년 2월 13일 경찰청으로부터 변사자의 지문과 박태순의 지문이 동일인임을 통보받아 실종자 박태순의 사망사실을 확인했다.
 

박태순 실종 포스터 ⓒ 의문사위 자료

 
아들의 사망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유족들은 처음에는 박태순이 곧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연락이 없었다. 유족들은 박태순이 다녔던 수영기계에 수차례 찾아가 행방을 수소문했고, 박태순의 퇴근 후 행적을 알아보고자 구로역, 석수역, 석수파출소 등 인근 전철역과 경찰을 찾아다녔다. 그 외에도 유족들은 1992년 11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한겨레신문 등에 박태순을 찾는 광고를 내었고, 1993년 2월에도 어느 잡지에 박태순을 찾는다는 광고를 냈다. 그러면서도 경찰을 신뢰할 수 없어 가출이나 실종신고를 하지는 않았다.

결국 유족들은 박태순의 사망 사실도 알지 못한 채 9년이 지난 2000년 12월 28일 의문사위에 박태순을 찾아달라고 진정했다. 2001년 2월 16일 의문사위가 박태순이 시흥역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통보하자 유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001년 4월 9일 유가족, 한신대 민주동문회, 한신대 교수평의회, 영등포고등학교 동문 등이 참여한 가운데 '박태순 의문사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발족했다. 2001년 8월 19일에는 박태순의 유골을 인수해 경기도 가평군 마석 모란공원에서 장례식을 했고, 2002년 10월 1일에는 추모행사를 하고, 박태순의 추모비를 제작해 한신대학교 교정에 세웠다.

필자와 의문사위와 진실화해위원회 직장 동료였던 안경호 4·9평화통일재단 사무국장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까운 친구였던 박태순의 실종사건이 지금까지 자신이 과거사 청산 운동을 벌이는 계기가 됐다고 토로한다.

안 국장은 "1992년 당시 노동운동을 하던 친구 박태순과 영등포 한 허름한 술집에서 만나고 보름 후 태순이가 기무사 추적을 받다가 실종됐는데 그 후 무려 10년 동안 가족, 친지들도 그 친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랐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조만간 설립되면 친구 박태순 사건도 꼭 재조사해 주기를 희망했다.
#박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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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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