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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송라이터가 된 동자승, 거제도 '챨리'를 아시나요

[사람 사는 거제도 점빵] 챨리의 사연이 있는 음악학원

등록 2020.06.11 11:13수정 2020.06.11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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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할 일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내의 수행을 돕는 정도가 전부이고 그 일도 대기하는 시간이 많아서 항상 손이 비어 있다. 즉 백수다. '노니 이 잡고 노니 염불한다'고 짬짬이 거제 경기의 부활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서 거제도에서 영업하는 곳 중, 추천할 만한 곳을 찾아 소개하려고 한다.[기자말]

학원 내의 챨리 모습 콧구멍만한 학원은 각종 음반과 음악 서적, 기타로 채워져 있다. ⓒ 이승열

거제도의 시청 소재지인 고현에서 삼거마을로 가다 보면 문동폭포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그곳에 성냥갑만 한 3층 건물이 있고, 그 집 2층에 음악학원이 하나 있다. 이 콧구멍만 한 학원은 '챨리'라고 불리는 싱어송라이터가 운영한다. 그의 본명은 따로 있고, '챨리'는 내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다른 이름의 실용음악학원을 연 건 2004년경. 강 원장은 내게 영어 이름을 하나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챨리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 후로, 음악학원 이름에도 '챨리'가 붙었다.

굳이 연유를 따지자면, 나의 군대시절로 되돌아간다. 소총수인 나는 사시사철 군장과 M16 소총만 들고 산과 들로 하루 종일 행군하는 게 일과였다. 그때 중대장 곁에서 무전기를 메고 다니는 통신병 고참이 왠지 부러웠다. "브라보, 브라보, 여기는 챨리"라고 통신하고 있는 모습이 기똥차게 멋있어 보였다. 챨리는 통신 언어였던 셈인데, 자유를 구속당하고 갇혀 살던 청춘의 나에게 강한 인상을 줬던 것 같다.

20대에 처음 만나, 40대에 재회한 챨리

챨리와 나는 젊은 시절의 어느 날, 드럼학원에서 조우했다. 이후 크라잉넛 콘서트를 기획한 그가 협찬을 요청하면서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마 2000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시절에 일운면 망치리에서 펜션을 운영하고 있던 우리 부부는 그들에게 방을 무료로 제공했다. 그 후 챨리는 여러 음악학원 등을 거쳐 현 건물을 매입해 정착했다.

그는 유년기를 장승포의 옥림마을에서 조부모, 부모님과 함께 보냈다. 집 마당에서 장승포 앞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은 슬레이트 집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근처의 '이진암'에 들어가 동자승 생활을 한 해 쯤 했는데, 새벽마다 종을 치는 일이 싫어서 하산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1집 앨범 1집 앨범의 자켓이다. 8곡 전부 거제도를 주제로 했다. 그 중 섬소년은 제법 호응이 있는 편이다. ⓒ 이승열

내가 챨리에게 "너는 불심이 모자란 어린 땡중이었구나"라고 책망했더니, 그는 합장을 하며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답했다. 아는 염불은 이것밖에 없다고 했다. 하긴, 어린 꼬마 아이에겐 새벽마다 일어나는 일이 무척이나 고역이었을 테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현장의 음악을 배우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 크라잉넛의 소속사에서 세션 연주자로도 활동하며 치열하게 음악을 익혔다. 20대엔 늘 가난한 음악인으로 살다가 2002년쯤에 귀향했다.

처음 만났을 때 20대 후반의 젊은이가 이젠 40대 중반이 되었다. 그사이 챨리는 네덜란드에서 재즈 기타를 더 배우고, 정규 앨범도 2장 냈다. 2집에 수록되어 있는 '회어가'의 노랫말은 내가 썼다.

회어(回魚)는 대구의 옛 한자어다. 강 원장이 거제를 떠나던 그때의 서러움, 타향에서 쌓여가던 그리움, 귀향의 희열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직접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회어가'는 챨리가 직접 불러 녹음했다.

그는 고음을 마음대로 소화하는 라커도 아니고,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발라드 가수도 아니며, 민족의 한과 신명을 절묘한 꺾기로 표현해내는 트로트 가수도 아니다. 단지 간결한 창법으로 마음을 통째로 전하는 싱어송라이터이다.

'회어가'를 들으면 까까머리가 뒤돌아보며 거제를 떠나는 뒷모습과 수평선이 보이는 장승포 앞바다가 그려질 것이다. 먼바다에서 해변까지 숨 가쁘게 달려와 고향의 해변에서 비로소 부서지는 파도 소리, 그 파도를 맞이하는 몽돌 소리가 한꺼번에 들릴 것이다.

챨리는 올 연말쯤에는 음반제작자로도 나설 생각이란다. 본인의 노래를 앨범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싶은 아마추어들을 위해 작곡부터 녹음까지 전 과정을 대신해주겠다는 구상인데, 돈벌이하고는 거리가 먼 사업이다. 그의 아내는 '제발 밑지지만 말라'고 사정을 한다. 하긴 학원의 수강생도 손꼽을 정도이니 그런 말을 할 만하다.

비범하지만, '낭만'이 담겨있는 그의 삶 
 

어린이 날 행사 재능 기부 현장 2018년 어린이 날 행사의 동요메들리 부스를 운영하던 시절. 챨리는 곰기타리스트, 기자는 개구리드러머였다. ⓒ 이승열

그는 평범한 중년이 아니다. 범사에 대해서도 비범한 시각으로 받아 들인다. 철학적이기도 하고 엉뚱하기도 하지만 바닥에는 인류애와 자연애가 아련히 깔려있다. 어쩌면 자신이 외면한 고향에 대한 미안함을 그리움으로 승화하면서 스스로 삶을 깨달았는지 모르겠다.

기타와 작곡, 피아노, 드럼을 배우고 싶은 현지인은 물론이고, 거제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해금강이나 학동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 학원을 찾으면 좋다. 거제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생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덤으로, 원숭이 새끼처럼 천지 분간 못하고 산과 바다를 뛰어다니며 놀던 어린 시절에 겪었던 무서운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다. 그가 밤늦게 집으로 오던 길에서 만났던 소복 차림의 할머니 이야기, 바닷가에 자맥질하며 놀다가 물밑에서 본 하얀 여자 고무신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도 모르게 머리끝이 뾰족 섰다.

혹시 시간이 더 나면 그가 동자승 생활을 했고, 할아버지의 영정을 모셔 둔 '이진암'까지 함께 나들이하는 것도 추천한다. '미스터트롯'의 임영웅, 크라잉넛과의 인연도 물어보시라.

그는 45년을 살았지만 100년의 인생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은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이니 안심하고 만나 보시길. 챨리는 건물 3층에서 중학교 사회 교사인 아내와 단 둘이 산다. 철저한 교육자와 음악과 자연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로맨티스트는 의외로 잘 어울린다. 이곳엔 음악은 물론이고 삶의 이야기와 낭만이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저와 아내가 관리하는 밴드와 페이스북에도 올렸습니다.
#챨리스 기타 #백수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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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월에 퇴직한 후 백수이나, 아내의 무급보좌관역을 자청하여 껌딱지처럼 붙어 다님. 가끔 밴드나 페이스북에 일상적인 글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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