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두 얼굴, 미국의 두 얼굴, 이승만의 두 얼굴

[독서에세이] 이승만이 쓴 '일본의 침략근성'을 읽고

등록 2020.06.05 09:57수정 2020.06.05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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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과 속이 다른 일본

<일본의 침략근성>은 1941년 미국 뉴욕에서 영어로 출판된 책이다. 원제는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지은이는 이승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그 이승만 박사다. 그는 '서론'에서 당시 대한제국의 비참상을 간단히 약술하며 '겉과 속이 다른 나라, 일본의 실상'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누구한테? 미국한테.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하도록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며, 내가 미국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11쪽
 

Japan Inside Out (book cover) 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 by Syngman Rhee ⓒ 이인미

 
이승만은 일본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집요하게 폭로한다. 책의 절반 아니 2/3 이상이 그 주제에 집중돼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승만은, 겉과 다른 일본의 '속'에는 천황의 신도주의가 있다고 보았다. 이를테면 '속 중의 속'이 천황이라는 이야기다. 나아가 이승만은 일본의 대외활동을 "전쟁 제의(祭儀, ritual)"로 설명했다(29쪽). 환언하면 일본은 제사드리듯 거룩하게 전쟁을 한다는 것.

그런데 일본은 이 전쟁 제의를 결코 드러내놓고 수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모른다. 감쪽같이 속아넘어간다. 이승만은 그래서, 바야흐로 서구 열강들이 다함께 일본에 속아넘어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에 따르면, 일본은 거짓말쟁이다. 한번은 일본전함에 승선하려던 한 미국시민이 일장기를 향해 절하도록 강요받은 적이 있었다. 일본이 승선규칙을 팻말로 공지한 후 그것을 강제한 것이다. 오만과 건방의 극치였다. 그때 여러 사람들이 문제를 삼자 일본은 그런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거짓말을 했다. 관련사진이 나오기 전까지는, 일본은 거짓말로 발뺌하기 바빴다(186~197쪽).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다. 하지만,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는 법.

이승만은 일본의 치명적 이중성을 차근차근 기술한다(214~253쪽). 중국에서부터 인도차이나반도, 하와이, 멕시코, 아르헨티나에 이르기까지 국제관계 안에서 '감추되 결국 관철되는' 일본의 잔혹한 호전성을 밝혀낸다. 그러면서 일본이 겉으로 평화를 주장해도 절대 믿지 말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이 방면으로 이승만이 얼마나 조사를 많이 했던지, '아는 것도 많네'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미국


이승만은 다른 서구 열강들과는 달리 미국에게 일정한 역할을 당부한다. 그의 당부는 미국사람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찬사와 더불어 여러 번 언급된다. 그중 앞부분에 나온 것은 아래와 같다. 
 
미국은 이제 적극적인 자세로 서구의 문제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하여 시야를 넓히고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전에 관련한 지구촌의 이슈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미국이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세계에 민주주의가 존속될 수 있을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16~17쪽

공교롭게도 이 책이 나오고 6개월쯤 뒤에 진주만 공습이 발발했다. <일본의 침략근성>은 구체적으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은 이 책의 '예언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겉에선 평화를, 속으론 전쟁을 추구하는 일본의 이중성을 이 책이 시종일관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근성>은 예언서 급으로 인식되며 대번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수십 년이 지난 2020년 현재까지도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다. 한국에는 2015년에 번역 출간됐다.

한편 이승만은 이 책에서 미국사람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 말하며 다소 친미스러운 발언을 이어가는 듯하지만, 미국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 비판의 칼날은 끝으로 갈수록 더욱 날카로워진다.

실제로 미국정부는 비판받을 만했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일본과 이익을 교환하며 사이좋게(?) 지냈다. 19세기말(1882년)에 조선과 우호적 조약을 맺어놓고 1905년에는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선을 일본이 집어삼키도록 허락(?)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했다.

이승만은 1882년의 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을 거듭 거론한다. 그 조약을 미국이 열심히 지키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따진다. 이승만의 비판의 요점은 이것이다. 미국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그때와 지금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 이승만은, 미국이 자본주의적 국익을 우선하느라 배신했다고 본다.
 
대량생산으로 인한 새로운 시장개척과 이를 위한 막대한 자원과 원료공급원의 개발은 인류애와 인도주의 원칙을 잠식하였고, '달러 외교'는 다른 나라를 배려하는 이타주의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316쪽

<일본의 침략근성>에서 이승만은 미국정부와 미국사람들을 분리해서 다룬다. 이승만은 미국정부의 친일적 행위(조선에 대한 배신행위)에 대하여 가차없이 비판한다. 그러나 미국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 정신을 환기하며, 자극하며, 한일관계에 적극 관심 가져줄 것을 요청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이승만

<일본의 침략근성>의 지은이 이승만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책이 별로 읽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근성>은 이승만에 대한 일말의 부정적 선입견이 있을지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다. 번역도 깔끔하다. 군데군데 맞춤법 교정이 조금 부실한 페이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양호하다.

실제로 몇 장만 넘겨봐도 이 책이 허투루 쓴 게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이 당시의 국제정치 역학관계를 살피며 해석하는 수준은 탁월하다. 아마 1940년대에 이승만만큼 국제정치 흐름에 밝았던 사람은 드물지 않았을까.

이승만은 미국정부를 향해 거침없이 도덕성 촉구를 역설하고, 미국 선교사들과 교회들이 보여주는 배려와 참여를 증언하는 등 입바른 소리를 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버젓이 이중결혼을 했다고 한다. 첫 번째 부인과 적법하게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외에서 덜컥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것이다. '무책임'이라는 단어가 얼른 떠오른다. 미국의 책임성을 책에서 그렇게 반복적으로 웅변하던 사람이...

또, 이 책에서 일본의 침략근성을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비판하던 사람이 불과 4년 뒤 초대대통령이 되었을 때 보인 행동은 더 의아하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확고하게 지원하지 않았다. 책을 보면 '반민특위' 활동을 그 어떤 일보다 우선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따르면 침략근성을 지닌 일본에 붙어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근성 면에서 일본을 닮은 인물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당한 처벌을 받아야 했었다. 따라서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은 친일잔재 청산을 깔끔하게 마무리했었어야 했다. 하지만 해방정국에서 충분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승만은 오히려 <반민특위>가 무력화되는 데에 개입했다. <반민특위>가 흐지부지 활동을 접은 데에는 이승만정권의 조직적 방해가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에게서 말과 행동이 괴리를 보이는 지점은 또 발견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피난하지 말라 방송했지만, 자신은 얼른 도피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본에 망명정부를 설립할 계획을 했단다. 아니 해방된 지 몇 년이나 지났다고, 하필이면 일본에다 망명정부를? 그것도 10여 년 전 역작 <일본의 침략근성>을 쓴 분이?

두 얼굴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참으로 다양한 심상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다. 독자들은, 겉과 속이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싶게 일본의 이중성의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 대 국익'을 따질 때 '국익' 쪽 비중을 일관되게 더 무겁게 유지하는 미국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그 일관성 때문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1882년과 경술국치 이후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다르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는 점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말과 행동이 절묘하게 어긋나는 이승만의 모습도 사색할 수 있다. 이 책은 일본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도록 독자들을 이끈다. 또 미국이 자행하는 친일적 행위를 성찰하도록 촉구한다. 그렇지만, 정작 지은이는 친일청산에 미적거렸고, 한국전쟁 때는 일본으로 도피하고자 했다.

그렇다. <일본의 침략근성>에서 독자들은 일본의 두 얼굴, 미국의 두 얼굴, 그리고 이승만의 두 얼굴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각각의 두 얼굴을 묘사하여 직면케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각각의 두 얼굴을 직면하는 독서경험은 비판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해준다. 지은이의 웅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이다. 합리적 이성의 힘을 건강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격려한달까··.

 

<일본의 침략근성> 책표지 이승만, <일본의 침략근성>, 김창주 옮김, 행복우물, 2015. ⓒ 이인미

 
이승만이 쓴 이 책의 원제는 'Japan Inside Out'이다.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Japan 자리에 U.S.A.를 넣어도 되고, 이승만을 넣어도 될 것 같다.

일본의 침략근성 - 그 실체를 밝힌다

이승만 (지은이), 김창주 (옮긴이),
행복우물, 2015


#일본 #침략 #미국 #반민특위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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