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일가족 알몸 고문, 그후... 문재인 정부는 다를 줄 알았다

[김성수의 한국현대사] 박동운 간첩조작 의혹 사건

등록 2020.06.03 15:04수정 2020.06.03 15:04
45
원고료로 응원
 
a

2009년 11월 13일,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나던 날. 오른쪽부터 진도 가족 간첩단 사건 피해자 박동운씨, 한등자씨. ⓒ 진실의힘 제공

 
지난 1981년 초 전남 진도에 살고 있는 박동운의 부친 박영준이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후 남파간첩으로 내려왔다는 미확인 첩보가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에 들어왔다. 그러나 박동운의 부친 박영준은 월북한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 와중에 실종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1년 3월 7일 새벽 6시경, 농협 진도군지부 예금계장으로 근무하던 박동운의 집에 갑자기 안기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안기부 요원들은 세 자녀의 가장 박동운과 그의 모친을 아무 설명 없이 안기부 남산분실로 연행해갔다. 그리고 이틀 후인 3월 9일 그의 동생과 숙부가 같은 방식으로 안기부에 연행됐다. 또 3월 14일엔 그의 고모와 고모부가 끌려왔다. 그리고 4월 6일엔 마침내 그의 숙모까지 총 7명이 영장 없이 모두 안기부로 연행되었다.

지난 2008년 박동운은 필자가 한때 몸담은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당시 안기부에 강제연행 된 뒤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1981년 3월 7일 연행되어 내내 안기부에 구금되어 있다가 (약 두 달 후인) 5월 8일 서울구치소로 송치되었는데 그때까지 한 번도 귀가 조치되거나 외부인과 면회한 적이 없다. 안기부 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되면서 영장 제시나 범죄사실의 내용은 전혀 몰랐다. 안기부 조사실에 들어가더니 저의 옷을 벗으라고 하고는 미리 준비해둔 군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그러고는 다른 조사실로 옮기더니 북한 평양에서 내려왔던 이계장을 포함해 수사관 5명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를 집단구타 했다. 대략 10여 분간 손과 발로 온몸을 구타당하다가 결국 기절했다.

기절했다가 깨어보니 머리와 등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나왔다. 정신이 드니 이계장이 저에게 '너의 아버지가 서울구치소에 잡혀 있으니 너의 아버지를 몇 번 만났으며, 간첩질을 어떻게 했는지 똑바로 말해라'고 하면서 다시 고문이 시작되었다, 이계장이 주도해 전기고문, 물고문, 성기고문 등을 하면서 부친 박영준을 만났다는 것과 제가 이북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자백하라고 했다. 고문이 심해 못 견디면 부친을 만났다, 이북에 다녀왔다는 허위자백을 했다.

그렇게 20여 일 정도 지나서도 제가 계속 허위자백과 부인을 반복하자 이계장이 나의 옷을 모두 벗기고 파이프에 묶은 뒤 '네가 계속 자백하지 않으면 모친도 이렇게 옷을 벗기고 고문을 하겠다. 너의 처자식도 똑같이 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했고, 계속 시인하지 않자 '너를 뱀굴에 처넣어버리겠다'고 협박해 결국 울면서 허위사실을 자백하고 말았다, 증거품을 찾아내려고 이계장과 다른 수사관이 저의 정강이에 경찰 곤봉 같은 것을 올려놓고 잘근잘근 밟았다. 그 고문으로 인해 두세 번 기절했다.

그리고 나면 공의(公醫)로 보이는 사람이 퉁퉁 부은 저의 정강이 두 곳을 수술용 칼로 찢어서 피고름을 빼내고 심을 박아 상처가 나을 때까지 치료를 했다. 그렇게 약 일주일 정도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송치되기 며칠 전 저의 상처에 생소고기를 붙여주고 안티푸라민을 온몸에 발라주면서 안마를 해주었다. 그리고 뜨거운 물로 온수목욕을 시켜주었다. 그렇게 10여 일 정도 하니까 몸에 있던 멍이 모두 없어졌다, 구치소에 송치될 때까지도 저의 정강이에 박혀 있던 심을 빼지 않고 있었다. 구치소에 가자 송치담당 교도관이 자다가 일어나서 저를 보더니 왜 다리가 저렇게 되었냐고 물어보자, 저를 데려갔던 수사관이 안기부에서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다며 확인서를 작성해준 것이다. 책상모서리에 부딪혔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경찰곤봉으로 밟혀서 생긴 것이다.

박동운은 1981년 8월 17일 서울지법 1차 공판에서 안기부에서의 진술은 사실과 다르다며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세 번이나 기절하고 유서를 두 번 쓸 정도로 고생을 했다. 검찰로 송치 전 안기부 수사관이 '검찰에서 이곳과 진술을 일치하게 말하지 않으면 다시 조사받을 것이다'고 말해 사실과 다르게 검찰에서 진술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박동운은 또 1981년 9월 7일 서울지법 2차 공판에서도 "검찰로 송치될 때 안기부 수사관이 '재판 시까지 부인할 생각 말라. 만약 부인하면 다시 조사를 하겠다'고 겁을 주었기 때문에 검찰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진술한 것"이라고 말했다.

안강민 검사

박동운은 진실위에서 당시의 검찰 조사 과정을 이렇게 진술했다.
 
서울구치소로 송치된 후 약 10여 일이 지나자 구치소로 안강민 검사가 서류를 가지고 왔다. 서울구치소 교무과 방에서 안강민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무척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모든 것을 시인해라, 모두 시인하면 정상을 참작해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구치소로 올 때 이 계장이 저에게 했던 이야기였다. 그래서 제가 검사에게 이 조서의 내용은 모두 고문으로 인해 조작된 것이라고 하자 '이 자식, 안 되겠다'고 하며 처음 보는 안기부 수사관 2명을 불렀다. 자꾸 부인하게 되면 재차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 결국 허위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가지고 온 피의자신문 조서에 무인을 하게 된 것이다.

박동운이 쓴 탄원서(1981년 9월 26일)와 항소이유서(1982년 1월 9일)에서도 그는 "안기부 수사관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서울구치소 송치 당시 수사관이 '구치소에 가 있을 동안에도 수사는 계속되며 또다시 불러다가 조사할 수도 있다'고 협박했기 때문에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1982년 1월 9일자 항소이유서에서 박동운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안기부 수사관은 2년간 재수할 당시 (부친) 박영준을 따라 월북하지 않았느냐며 물고문을 했고, 발에 수갑을 채우고 무릎에 경찰곤봉을 넣어 발로 밟는 등의 고문을 했으며, 담요로 온몸을 감아 몽둥이로 때려 기절을 했다. 또한 '이북에 갔다 온 것을 말하지 않으면 너의 어머니를 데리고 와서 옷을 벗기고 고문을 하겠으며, 네 처를 데리고 와서 고문을 하겠다', '말을 하지 않으면 전기고문을 하겠고 뱀굴에 처넣겠다'는 등의 협박을 했다. 계속되는 고문 속에 유서를 쓰라고 해서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작성했으며 '수사하다가 한 사람쯤은 죽일 권한도 있으니'라고 하면서 밖으로 끌고 나가 권총으로 사살할 것처럼 위협했다.
 
위와 관련해 1982년 2월 22일 박동운의 변호인이 서울고법에 제출한 신체감정신청서에서 ① 위 각 피감정인(박동운)의 신체 각 부위에 멍이 든 흔적이나 상해를 입은 사실이 있는지 여부 ② 만일 상해 및 멍이 든 흔적이 있다면 각 수상(受傷)의 부위 그 정도 ③ 그 각 수상의 원인(고문 및 기타 행위 등에 의한 것인지) ④ 수상의 발생일 및 그 수상 후의 경과기일에 대한 내용 등에 대해 조사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법원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박동운은 지난 2006년 11월 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법원 국정감사에 출석해서 아래와 같이 당시 상황을 진술했다.
 
(그때) 재판에서 저희 가족이 전부 다 부인을 하면서 열렬하게 고문에 의해서 그랬다고 얘기하니까 판사 세 분이 딱 앉아서 하는 말이 '안기부에서 여태까지 한 것을 시인을 다 해놓고 여기에서 부인을 해?' 하면서 서류를 들어서 탁자를 때리기도 하고, 어떨 때는 저희들이 얘기하면 코 고는 소리는 안 났어도 졸기도 했으며, 상처의 흔적을 보여주었으나 판사는 본 체도 안 하고 그리고 또 상처가 남아 있을 때 고법 때 신체감정신청서를 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고법에서 기각하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박동운의 숙모 한아무개와 고모 박아무개도 1981년 5월 23일 검찰조사에서 안기부에서의 자백은 "고문에 못 이겨 허위로 자필 진술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끔찍한 성기 고문
 

박동운의 고모 박아무개는 1981년 9월 21일 서울지법 3차 공판에서 당시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내용은 고문에 못 이겨 없는 사실에 대해 진술서를 세 번 작성한 것이고, 반성문도 안기부에서 써 주어 그대로 보고 쓴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고모 박아무개는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팬티만 입힌 채 내버려두고 저녁이면 술을 먹고 와서 다짜고짜 주먹과 몽둥이로 때렸으며, 수사관이 원하는 대답을 미리 적어놓고 내가 모른다고 하면 무작정 때렸다.
 
1981년 9월 3차 공판에서 박동운의 숙모 한아무개는 "(당시) 고문에 못 이겨 수사관이 써준 것을 보고 베껴 쓴 것이고, 반성문 또한 수사관이 써주어 그대로 베껴 쓴 것"이라고 진술했다. 또한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한씨는 '(그때 수사관들이) 옷을 벗겨놓고 막대기에 묶어 천정에 매달아놓은 후 물을 코에 부어 기절했다'고 증언했다.

박동운의 고모부 허아무개는 지난 1981년 5월 29일 검찰 조사에서 "안기부에서의 고문에 못 이겨 진술한 것이고 안기부에서 본인이 직접 작성한 반성문 등도 고문에 못 이겨 작성한 것"이라며 범행 사실을 부인했다. 또한 1981년 9월 26일 작성한 탄원서에서 고모부 허아무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안기부에서 월북했다는 허위진술을 하는 과정에서 성기와 음모에 라이터 불로 고문을 당했고, 유서도 몇 번 작성했으며, 양발을 묶어 공중에 매달고 박영준을 진도에서 만났는가에 대해 물으면서 고문을 해 허위로 박영준을 만났다고 진술했다. 안기부에서 63일간에 걸쳐 조사를 받는 동안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 수사관들이 쓰라고 하는 대로 반성문 등도 작성했다.

또한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고모부 허아무개는 "(그때) 성기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고 신발짝으로 마구 때려 기절했고 철장에 알몸으로 매달고 라이터 불로 체모를 태웠다"고 진술했다.

박동운의 숙부 박경준은 1981년 6월 1일 검찰 조사에서 "남파된 간첩 (형)박영준을 만나고 지령을 받거나 회합한 뒤 (조카) 박동운, (조카동생) 박아무개, (형수) 이아무개 등과 만나 (형)박영준과 회합한 사실은 안기부에서 고문에 못 이겨 진술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1981년 9월 7일 서울지법 공판에서 숙부 박경준은 "안기부에서 고문을 받았고 일방적으로 조서가 작성된 것"이라고 진술했다. 또 탄원서(1981년 9월 26일)와 항소이유서(1982년 1월 7일)에서 숙부 박경준은 "(당시) 온몸을 구타하고 거꾸로 매달아 수십 차례 물고문을 했으며, 무릎 등에서 상처가 나고 발이 부어 걸을 수가 없는 등의 고문을 2개월간 받아 도살장의 짐승처럼 삶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적었다.

박동운의 모친 이아무개는 1981년 8월 17일 서울지법 1차 공판에서 "(남편) 박영준이 월북한 이후 만난 사실, 박영준으로부터 북한 우월성에 대한 선전교양을 듣고 진도 소재 군인들 초소 위치, 비행장 위치 등의 질문에 대답했다는 부분은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때 너무 혼이 나서 허위로 진술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박동운의 동생은 1981년 8월 17일 서울지법 1차 공판에서 "(당시) 안기부에서 조사받을 당시 고문을 받아 허위 진술했다"고 증언했다. 탄원서(1981년 9월 26일)에서 동생은 "잠도 재우지 않고 몽둥이와 주먹 등으로 구타를 당했으며, 옷을 벗겨 거꾸로 매달아놓고 얼굴에 물을 붓는 등의 방법으로 고문을 당했다"고 적었다.

의사의 증언

당시 박동운의 고모 박아무개, 숙모 한아무개, 고모부 허아무개, 숙부 박경준의 상처를 치료했던 진도중앙병원 원장 오아무개는 2008년 진실위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당시 (이분들의) 상황을 보면 첫 번째 아주 피로하게 보이고 두 번째 몸 전체가 심하게 부어 있었습니다. 세 번째, 반점, 까만 점처럼 시커멓게 보이는 멍인데 그걸 보여주더군요. 왜 그러느냐 하니까 거기서 맞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몸 전체가 쑤시고 아프고 관절 이런 데가 아주 죽겠습니다'라고 전신통, 관절통을 호소하더군요. 특히 무릎 쪽이 너무 많이 아프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안기부에서 너무나 심하게 당했다, 두 달 가까이 갇혀서 막대기로,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물고문도 당했다, 심지어는 옷도 벗겨놓고 때리더라' 면서 많이 울더군요. 여자들을 그렇게까지 때리고 했을까 싶었지만, 그런 일을 안 당해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할 리가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자세히 했던 기억이 나고, 또 몸에 반점, 멍이 그걸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약은 주로 관절염에 대한 것을 썼습니다.
 
박동운의 고모부 허아무개, 이웃주민 박아무개는 지난 2008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박경준, 허아무개가 잡혀가고 나서 2, 3일 후에 안기부 직원들이 집으로 직접 찾아와 조사할 것이 있다며 차에 태워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수사관은) (간첩) 박영준이 왔었는지, 박경준, 허아무개 등이 박영준을 만났는지 여부 등에 대해서 물었다. 계속 박영준과의 접촉을 부인하자, 수사관이 왜 박영준을 봤으면서 안 봤다고 그러느냐며 손으로 저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 심지어는 구둣발로 저를 차고 밟고 했다.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나중에) 허아무개가 집행유예로 나왔을 때 집에서 저에게 자기의 몸을 보여주는데 다리 정강이가 땡땡 부어있었고, 몸이 구렁이 감은 것처럼 멍 자국이 나 있는 것도 보았다.
 
같은 이웃주민 김아무개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허아무개는 출소하자마자 보았는데, 제가 '고생 많이 했네'라고 했더니 옷을 벗고 몸을 보여주는데 정말 말이 아니었다. 몸을 뱀이 감고 있듯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지금도 당시 허아무개의 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뱀이 감고 있는 듯이 보인 것이 선명하다.
 
같은 이웃주민 박아무개는 진실위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박동운의 모친은) 안기부에 다녀오고 나서 조사받은 후유증으로 몸도 아프고, 몸살도 나고 온몸이 골병이 나서 거동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집안에서 나오질 못하고 방에서 요양만 했다. 병원에도 자주 다녔다.
 
검찰과 법원의 부화뇌동
 

박동운의 모친 이아무개는 2008년 진실위에서 "(당시) 지휘봉 같은 막대기를 가지고 저의 손이나 엉덩이, 몸을 때리곤 했다. 한 2~3일간은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조사를 해서 시간을 알지 못했다"라고 진술했다.

위와 같은 고문조사를 거쳐 박동운, 그의 모친, 숙부, 동생, 고모부 등 5명에 대해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고모와 숙모는 가혹한 고문만 받고 석방되었다.

이어서 박동운은 서울지법에서 범죄사실이 안기부 수사관들의 고문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지만 1981년 11월 3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박동운은 이에 항소해 1982년 3월 6일 서울고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고했으나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그의 숙부는 7년 형, 모친은 4년 형, 동생은 3년 6월형, 고모부는 1년형이 확정되었다. 박동운은 18년간 복역 후 53세가 되던 1998년 8월 15일 가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도 박동운은 보안관찰대상이 됐다. 그가 출소하고 나서도 `간첩 지나간다' '빨갱이 지나간다'고 동네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아내와 자녀들마저 자신을 간첩으로 보는 시선이 그는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그가 수감되었을 때 태중에 있던 아들은 18년간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아내는 차마 아버지가 간첩죄로 복역 중이라는 말을 자녀들에게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석방 후에도 3명의 자녀들과 거의 교류할 수 없었다.

지난 2009년 1월 진실위 조사결과 박동운의 부친 박영준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되었는데 안기부가 박영준을 남파간첩으로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위는 아래와 같이 박동운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서울지방검찰청은 박동운이 가혹행위를 당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진술하면서 간첩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했음에도 이를 조사하지 않고 안기부 수사내용과 동일한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한 뒤 법원에 기소했다. 박동운은 남파간첩을 만나거나 입북한 사실이 없었음에도 수사과정에서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견디지 못해 허위로 자백했고, 수사기관과 법원은 조작된 범죄사실을 사실로 인정해 박동운이 간첩으로 조작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9년 11월 박동운은 사건 발생 28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박동운은 2012년 7월 국가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 1심에서 승소하고, 배상액의 절반을 가집행으로 받았다. 이어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해 2심까지 승소했다. 그의 모친은 요양병원 침상에서 재심 결과를 들었지만 이미 혼수상태에 빠진 뒤였다. 모친은 그 다음해인 2010년 세상을 떠나기 전 "우리처럼 억울한 사람들 지발(제발)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 박동운씨 ⓒ SBS 갈무리

  
사과 한마디 없다
 

그러나 지난 2013년 12월 12일 박근혜 정권의 대법원 박병대 대법관은 박동운 사건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박동운에게 "1심에서 받은 손해배상금을 법정이자와 함께 돌려내라"고 판결했다. 박병대 대법관은 갑자기 재심 무죄 사건의 손해배상 소송제기 소멸시효를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못 박는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결국 박동운과 그의 가족은 국가배상청구소송에서 2심까지 승소한 뒤 2014년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국가로부터 고문 범죄를 당하고 33년을 기다린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가 박병대 대법관이 갑자기 만든 기준으로 기각됐던 것이다. 그러나 박동운 가족의 손해배상청구가 늦어진 이유도 그 원인은 법원 때문이었다. 손해배상 청구를 위해서는 박동운의 부친 박영준에 대한 실종 선고가 필요했는데, 법원은 실종선고청구를 받아놓고 1년 넘게 끌었다. 

당시 박병대 대법관의 판결은 이후 양승태 사법농단에서 재판거래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사법농단의 실체가 드러난 이후인 지난 2018년 8월 박동운은 헌법소원을 청구해 중대한 인권침해사건에서 소멸시효를 적용할 수 없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다시 받아냈다. 그는 헌재의 결정을 근거로 손해배상에 대한 민사 재심을 시작해서 2019년 4월 승소했다.

그러나 그 후 문재인 정부의 법무부조차도 그의 가족에게 배상을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대법원에 상고했다. 다행히 지난 2월 27일 대법원이 법무부의 상고를 기각했다. 한편, 진실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박동운과 그의 가족 고문 피해자들에게 사과 한 적이 없다.
댓글4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국민권익위윈회 청렴포럼위원 역임.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상상인 사건 조국 뇌물 무관"... 조국 "이제서야" 탄식
  2. 2 "상중에 가릴 게 있고!" 기자에 버럭한 이해찬
  3. 3 한국 언론은 그렇게 '앵커 손석희'를 잃었다
  4. 4 박 시장 자필 유언장 "모든 분께 죄송하다... 모두 안녕"
  5. 5 충격적인 실험... 처참한 대한민국 아파트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