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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지원금 덕분에 동생이 다시 출근합니다

[팔순의 내 엄마] '코로나 블루' 낫게 해준 희소식... 생애 처음 신용카드로 삼겹살 쏜 엄마

등록 2020.05.31 10:58수정 2020.05.3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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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팔십 평생 자식들 밥 지어 먹이는 일밖에 몰랐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았을 뿐, 마음대로 사는 것을 애당초 몰랐다. 어느날 엄마가 "그때 내가 어땠는 줄 아니?" 하고 물었다. 그제서야 엄마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뒤늦게 알게 된, 엄마의 저렸던 마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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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한 상점에 긴급재난지원금 사용 가능 안내문이 붙어 있다. ⓒ 연합뉴스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돌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저녁상을 물리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코로나19 감염 확산 이후 '코로나 블루'를 겪었던 엄마는 요즘 들어 다시 활력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세 달만에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자르고 염색도 했다. 코로나 이전의 엄마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듯했다. 외모는 물론이고 기분이나 정서까지도. 

엄마의 그 의미심장한 표정의 비밀은 저녁상을 물리고 소파에 앉아서야 풀렸다.

"네 동생 일 나간단다."

이건 분명 우리 모두에게 희소식임에 틀림없다.

"잘됐네요. 어디로?"
"아르바이트이긴 한데… 직접 물어봐."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 그렇게 좋아?"
"좋지~"

엄마의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몇 달째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는 동생을 보면서 엄마는 말은 안 했지만 속이 답답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잘 발음도 잘 안 되는 아르바이트란 단어까지 써가며 달뜬 표정으로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가게는 어디에 있는데?"
"몰라. 그건 동생한테 물어봐."

엄마에게 '동생이 다시 일을 나간다'는 사실 말고 나머지는 모두 자잘한 사항에 불과해 보였다. 

내 동생은 망한 자영업자입니다

동생은 10년 전 가게를 열었다. 개업한 곳은 내가 사는 도시에서 비교적 번화가였다. 20년 동안 남의 가게에서 일하던 동생의 첫 번째 가게였고, 가게는 그런 대로 잘 굴러갔다. 남의 가게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했다. 가끔 매장에 들르면 심심찮게 손님이 들어왔다. 동생의 점포는 자리를 잡아갔고, 동생도 어엿한 사장님이 되어갔다.
   
그런데 지난 2~3년 전부터 경기가 너무 나쁘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설상가상으로 동생 가게 주변 상권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저쪽 동네와 이쪽 동네 상권을 구분해 주던 굴다리가 허물어지면서 상권은 하나로 통합됐고, 대규모 마트를 비롯한 동생과 동일한 업종의 매장들이 속속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새로 생긴 상권으로 몰렸고 동생이 속한 옛날 상권은 퇴락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에서 잘 되는 상점은 떡볶이와 어묵 같은 저렴한 길거리 음식을 파는 곳뿐이었다. 새로 문을 연 대형 점포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세일과 졸업 기념 무상 증정 이벤트를 이어갔다.

혼자 소규모로 운영하는 동생의 점포가 그런 대규모 매장과 경쟁에서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동생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생전 하지 않던 '힘들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했고 안 하던 혼술도 가끔 했다. 그렇게 1~2년을 버티다 동생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손해를 보고 매장을 처분했다. 동생의 매장 자리에는 어묵집이 들어왔다. 어쩌다 발걸음을 해보면 어묵집은 언제나 인산인해였다. 솔직히 기분은 별로였다. '동생 가게가 저랬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배도 좀 아팠다.

그래도 동생의 마음은 편해 보였다. '그동안 안 되는 가게를 붙들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하는 생각에 짠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런 마음이었으니 엄마 마음은 어땠을지 말해 무엇하랴.

매장을 정리한 동생은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난해 봄에 서너 달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 후로 지금까지 그냥 집에 있었다. 불경기에 나이 든, 경력이 많은, 게다가 사장까지 했던 동생을 불러주는 곳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본인보다 엄마가 더 초조해 했다. 물론 엄마가 그런 내색을 할 리 만무했지만 어쩌다 나오는 한두 마디의 염려 속에는 엄마의 속내가 모두 담겨 있었다.

그러다 이번 일자리가 들어온 것이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비록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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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긴급재난지원금이 지급된 13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용현시장이 이용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 연합뉴스

 
재난지원금이 동생의 일자리로 이어진 사연

동생이 나가기 시작한 경기도의 한 점포는 우리가 사는 곳보다는 훨씬 시골 지역이었지만 새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신도시였다.

"너무 바빠. 손님이 끊이질 않고 들어와."

하루 일하고 돌아온 동생의 일성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그렇게 손님이 많지? 요즘 같은 시기에.

"거기도 지난 세 달 동안 진짜 손님이 없어서 너무 힘들었대. 점포도 몇 개 있었는데 다 정리하고 지금 하는 거 하나만 남겨놓은 거래." 의아해 하는 내게 해 준 동생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우리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비밀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재난지원금에 있었다. 정부의 긴급재난지원금이 풀리기 한 달 전 이미 경기도에서는 '재난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1인당 10만 원에 더해 기초자치단체별로 5만 원~40만 원이 추가 지급됐다. 이 돈은 모두 해당 지역에서 써야 했는데, 그 돈이 5월부터 본격적으로 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이나 정부 긴급재난지원금 등에 관한 일화들이 신문이나 방송 등을 통해 소개되기 시작했다. 재래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안경원, 식당, 신발매장 등이 사람들로 붐빈다는 것이다. 

설마 했는데 그 뉴스는 진짜 뉴스였다! 당장 내 눈앞에서도 똑같은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야 할 정도로 매장에 손님이 넘쳐나고, 그 덕에 집에서 '휴식을 취하던' 동생에게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재난지원금 덕분에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웃픈' 풍경도 일어났다. 간만에 외식을 나갔는데, 저마다 자신의 재난지원금으로 계산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날 음식값은 엄마가 재난지원금이 담긴 신용카드로 계산했다. 엄마는 재난지원금 수령을 위해 생전 처음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이따금 가던 삼겹살집은 그날따라 유독 손님이 많았다. 밖에 대기 손님까지 줄지어 서 있었다.

"여기 왜 이렇게 손님이 많아?"
"그러게, 이상하네."
"맞다. 재난지원금 때문인가 봐. 여기저기 손님이 몰린다더니 진짜네..."

식당 안의 사람들이 표정은 밝았다. 오랜만에 보는 생활의 활력이었다.

일부 정치인과 경제학자, 공무원들이 우려하듯, 국민 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그 돈이 국가 재정을 얼마나 파탄 나게 할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돈은 국민이 낸 세금이며, 국민이 어려울 때는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돈이 돌고 돌아 고용을 낳고, 경제를 돌게 하고, 사람들에게 살아갈 의욕을 불러일으키는데 왜 주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 식구들은 말로만 듣던 공허한 '민생 살리기'가 아닌 '진짜 민생 살리기'를 온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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