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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젖은 YS-DJ, 그 틈 파고든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 (43)]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④

등록 2020.06.08 16:26수정 2020.06.0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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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 선언을 하는 노태우 후보 ⓒ 자료사진

   
6.29 선언

1980년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정권을 탈취했다. 세월은 마치 활시위에서 벗어난 화살과 같아서 전두환 대통령의 7년 단임 임기는 금세 끝나갔다. 그러자 신군부 세력은 88 서울올림픽을 빙자해 1987년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헌법에 따른 대통령 간접선거로 5공 정권을 연장하려는 꾀였다. 하지만 당시 대다수 시민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원했다.

야당은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약속하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그 여세로 1986년 새해 초부터 '개헌 1000만 명 서명운동'을 펼치자 그 기세는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기도 하고, 민주 인사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1987년 박종철 고문사건의 진상이 속속들이 드러났다. 6월 항쟁이 시작됐다.

그해 6월 10일, 전두환은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차기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이에 야권 및 학생, 시민들은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조작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로 맞섰다. 

시위현장에는 학생들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동참하는 모습도 보였다. 온 나라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6월 29일, 마침내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후보의 입을 통해 직선제 개헌, 김대중의 사면 복권 등 8개항으로 된 6.29선언을 발표했다.

얼핏 보기에 6.29선언은 신군부의 항복으로 비쳤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치밀한 사전 공작에 따른 대선 필승작전으로, 은밀한 재집권 시나리오의 서막이었다. 신군부의 6.29선언 핵심 전략은 김대중 사면 복권으로 야권을 분열시키는 데 있었다. 
  

13대 대선 벽보 ⓒ 자료사진

 
13대 대선

1987년 7월, 김대중이 사면복권 되자 누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느냐에 이목이 쏠렸다.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는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해 10월 말 김영삼과 결별하고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사실상 독자 출마를 선언했다.

김대중 측은 '김영삼과 노태우는 영남 표를 서로 나눠가질 것이며, 김종필은 구여권 표와 충청 표를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면 호남 표와 우세한 수도권 표를 가져온다면 유리하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른바 4자필승론이다.

이는 여당에서 1명이 출마하고 야당에서 3명이 출마하면 반드시 여당이 이긴다는 신군부 측의 4자필승론과도 같았다. 여당은 이런 4자 격돌의 판세를 유지하기 위해 갖은 공작정치로 자금의 열세인 김대중 후보를 지원한다는 유언비어까지 떠돌았다.
 

여의도 유세장에 모인 인파 ⓒ 자료사진

 
1노 3김의 각 후보들은 대선 경주가 시작되자 기선 제압, 지지세 확보를 위해 청중 동원에 사활을 걸었다. 양김 모두 100만 명 이상 청중을 동원하자, 노태우 후보는 이에 뒤질세라 천문학적 선거자금을 뿌려 여의도에 150만 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노태우 후보 측은 군사정권의 권의주의에서 벗어나고자 '보통사람'이란 표어를 만들어 내세웠다. 

"노태우는 보통사람이다. 노태우는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열겠다. 앞으로 세상은 보통사람들의 시대가 된다."

'보통사람'이라는 표어는 노태우의 딱딱한 군인 이미지를 벗겨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관훈클럽에서는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자를 초청해 토론회를 열었다. 그때 나는 네 후보자의 토론을 지켜본 바, 가장 준비를 많이 하고, 각종 매스컴의 덕을 많이 본 후보는 노태우였다.

토론에 임하는 노 후보는 회의용 노트를 들고 나와 일일이 기록하는 장면을 보여 줬다. 이 장면을 다른 후보에게서는 볼 수 없었다. 유권자에게 준비성과 치밀함을 호소했다. 

토론진행자가 "노 후보가 젊은 시절 헤르만 헤세의 시를 좋아했다고 들었는데 한 구절을 들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노태우가 기다린 듯 헤세의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이 암송은 딱딱한 군인 이미지를 씻어내는 데 주효했다. 하지만 군정 종식을 바라는 야권의 열기도 만만치 않았다.
 

동상이몽의 야권 두 지도자 김대중, 김영삼 ⓒ 자료사진

 
끝내 이루지 못한 야권 단일화

12.12사태로 신군부에게 밀려난 정승화 전 계엄사령관이 민주당 김영삼 후보 진영을 지지하고 나서자 노태우의 기세가 꺾이고, 김영삼의 인기가 치솟았다. 야권은 유세 연단에 군화를 올려놓고 청중들에게 '군정 종식'을 외쳤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장면이다. 결국 군정 종식을 위한 첫 관문인 후보 단일화는 끝내 이루지 못하고, 신군부의 작전에 휘말린 채 각자 돌이킬 수 없는 '동상이몽'에 젖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세 후보가 백중세이던 선거 종반 무렵인 1987년 11월 29일, KAL 858기가 인도양 상공에서 폭발해 115명 승객과 승무원이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안기부는 사고 직후 '북한 테러설'을 언론에 흘렸다. 이 돌발사건은 정국 안정을 바라는 유권자의 표를 노태우로 향하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1987년 12월 16일, 시민들이 직접 뽑는 대선이 실시됐다. 개표 결과 노태우 36.6%(828만 표), 김영삼 28.0%(633만 표), 김대중 27.1%(611만 표), 김종필 8.1%(182만 표)의 득표율로 노태우가 대권을 거머쥐었다. 
  

김대중 후보의 유세장 ⓒ 자료사진

 
이희호의 회고
 
"여론은 두 김씨 중, 김대중에게 더 많은 책임을 물었다. 투표 이틀 전 후보 단일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4자필승론' '승리는 필연'이라고 끝까지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날 보라매공원의 흥분이 독이 됐던 것이다. 회한에 젖은 그(김대중)는 '국민들의 염원을 위해 내가 양보했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생각이었다. 나 역시 역사와 국민 앞에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 이희호, <동행>, 286쪽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강준식 지음 <대한민국의 대통령> / 등 수십 권의 참고자료와 그 시대 신문 및 여러 사람들의 증언으로 쓴 기사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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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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