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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오라잍140화

새해 계획 묻지 마세요, 4월부터 시작할 테니

[제 신년 목표는 좀 다릅니다만] 모든 결심의 시작이 꼭 1일일 필요는 없으니까

등록 2020.01.05 20:30수정 2020.01.05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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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 다이어트, 영어공부... 새해를 앞두고 또 이런저런 목표를 세우며 긴장하고 계신가요. 다가오는 2020년은 조금 색다르게 맞이해보는 건 어떠신가요. 매해 의무적으로 도전해오던 걸 과감히 내려놓거나, 역발상으로 신년 목표나 계획을 접근하거나. '제 신년 목표는 좀 다릅니다만'는 새해에는 '하지 않기로 한'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편집자말]
방바닥에 흰 도화지를 깔고 그 위에 엎드려 생활계획표를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연초면 정신없이 바빠 밖이 어둑해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도화지에 동그라미를 크게 그리고 저녁 열 시부터 아침 여덟 시까지 빗금을 쳤다. 초승달이나 기차 따위를 그리고는 '꿈나라로'라고 적었다. 

잠자는 시간을 그리고 난 후의 막막함이 생각난다. 아침 식사, 점심 식사, 저녁 식사를 적어도 시간은 넘치도록 많았고, 공부나 휴식시간을 적어도 생활계획표의 빈칸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완성된 생활계획표는 대개 <탐구생활> 교과서와 함께 구석에 처박히기 마련이었다. 계획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계획대로 되는 방학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계획적인 어린이였다면 주말 아침 8시에 하는 <디즈니 만화동산>을 놓치고, 일요일마다 울지는 않았을 거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은 괜히 있는 게 아니어서,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신년이 되면 계획을 짜고 충실하게 그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며 산다. 2019년에는 반드시 운동을 해서 건강해지리라 다짐했건만, 2019년 6월에 받아든 건강검진 결과만 보아도 내가 숨쉬기를 운동으로 착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2018년 1월에는 스페인어를 꾸준히 공부하리라 결심했는데, 듀오링고(교육 애플리케이션)는 내 마지막 접속 날짜가 2018년 2월이란 걸 알렸다.

2017년, 2016년, 아니 이참에 아예 2000년으로 돌아가 볼까. 두둑한 통장을 갖기, 꾸준한 글쓰기, 바리스타 자격증 따기, 자동차 타이어 교체 배우기, 하루에 만 보 걷기, 물 2L씩 마시기, 엄마아빠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하기, 세 끼를 제시간에 챙겨 먹기, 양배추즙 잊지 말고 마시기, '얼평(얼굴평가)'하지 말기,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넷플릭스 끊기. 

새해면 꾸준히 계획을 짰지만 그해의 계획이 제대로 달성되는 걸 본 적은 별로 없다. 부끄러운 고백이다. 인생이 새해 결심대로만 됐어도, 지금쯤 나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으리라.

이러다가는 정말 세 살에서 서른까지 간 버릇이, 여든까지 갈까 걱정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 또한 괜히 있는 게 아니어서, 바늘만했던 헛된 계획이 날이 갈수록 소만해지는 것도 문제다(내 멋대로 해석한 거라면 미안하다). 현실적인 계획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적인 계획이란 무엇일까?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계획이란 달성 가능하며, 측정할 수 있고, 구체적이어야 한단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다. '책 많이 읽기'라는 계획 대신 '한 달에 3권 읽기'로 계획을 수정한다. '두둑한 통장 갖기' 대신 '20만 원 적금 12개월 붓기'로 잡아 본다. 쓰고 보니 바람직해 보인다. 뿌듯한 얼굴로 내가 쓴 계획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도 실행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일까?


모두가 '아침형 인간'이 되는 게 정답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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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은 괜히 있는 게 아니어서, 나는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신년이 되면 계획을 짜고 충실하게 그 계획을 달성하지 못하며 산다. ⓒ unsplash

유명 자기계발서인 <아침형인간>을 읽은 건 대학 신입생 때였다. 저자인 사이쇼 히로시는 이른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고 아침 시간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하루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아침의 1시간은 저녁의 4시간과 같으며,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자연의 섭리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어두웠던 성격이 밝아지며, 부부 사이도 좋아질 수 있다고 한다. 세상에. 이 좋은 걸 이제까지 몰랐다니. 

나는 책을 읽은 다음 날부터 당장 아침 6시에 일어나기 시작했다. 2학기 수강신청은 모두 1교시 수업을 등록해서,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침 수영을 끊고, 오전 영어회화를 들었다. 어떻게 됐을까?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세 살 버릇은 정말이지 여든은 아니어도 확실히 스물까지는 가는지라, 나는 쓸데없는 호기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여전히 수영을 못하고, 아직도 영어가 어렵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장 자주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은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출근하기 위해 새벽 6시 30분에 집 밖을 나서던 때였다. 군데군데 아직 가로등이 꺼지지 않은 스산한 거리를 나서,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를 타면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환했다. 막상 회사에 도착해서 일을 하면 괜찮아졌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은 몇 년을 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내가 '저녁형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새벽에 일하고 오전 느지막이 일어나도 되는 일을 하게 되면서였다. 일이 가장 잘 되는 건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였다. 새벽 4시에 자고 오전 11시에 일어났다.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 고요한 새벽은 최적의 집중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똑같이 7시간을 자도, 11시에 일어나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일상을 누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형인간이 좋다고 사이쇼 히로시가 아무리 이야기했어도, 역시 나는 저녁형 인간이 더 좋다.

사람들이 권하는 '최적의 일하는 시간' 대신 내가 찾은 '나의 최적의 시간'에 일하는 게 좋다. 그건 신년 계획 세우기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계획은 제가 세우고 싶을 때 세울게요

다른 이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1월에 일상을 새로 정비하는 것이 탐탁지 않다. 1월 1일이면 전년 해 동안 한 번도 오르지 않았던 산 정상에 올라 새 다짐이라도 하고 '야호'라도 불러야 할 것 같지만, 12월 31일에 신나게 노는 게 패턴인 나는 결국 침대 속에서 꾸물거리고 만다.

무언가 다 끝난 것 같고, 일들이 다 마무리된 것 같은 12월을 들뜬 마음으로 보내다가, 갑자기 하루가 지났으니 정신 차리고 약수터에 물이라도 뜨러 가자는 제안이 어색하다. 아니, 아직 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아. 나는 천천히 시동을 걸게. 자동차도 예열이라는 게 있잖아. 그렇게 말하고 싶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 않나. 1월 1일을 맞이해 두 주먹 불끈쥐고 한 결심이 일 이주 만에 무너지면, 다시 계획을 세우기까지 에너지를 모으기 쉽지 않다. 모두 다 같이 결승선에서 쭈그리고 앉아, 새해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자,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야. 요이,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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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끝자락인 11월이 되어서야 나는 농구를 시작했다. ⓒ unsplash


나는 나만의 계획표를 갖고 싶다. 나는 2019년에 계획했던 농구를 11월이 되어서야 시작했다. '얼평하지 않기'와 '차별적인 말 하지 않기'는 4월에 계획을 세우고 5월까지 하다 잊어버렸다. 적금은 7월부터 붓기 시작했다. 팟캐스트는 9월이 되어서야 겨우 첫 화를 녹음했다.

모든 결심의 시작이 1월 1일일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하고 싶은 대로. 그 계획이 오래간다. 모든 사람이 아침형 인간이 될 필요는 없듯이, 모두가 새해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당신의 출발선은 당신이 정해도 되지 않을까. 중간까지 걷다 보면 다시 결심하고 싶어질 때가 올지 모르니까. 요이, 땅!
#신년계획 #2020년 #프로딴짓러 #딴짓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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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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