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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사는 광주 여자' 우리 엄마의 생애 첫 촛불집회

오늘 대구에서 서초동으로 버스 8대 올라갑니다

등록 2019.10.12 10:05수정 2019.10.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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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대구에 사는 광주 여자가 조국 사태를 만났을 때

11일 금요일 저녁 7시, 나는 어머니와 함께 대구 2.28 공원으로 향했다. 검찰개혁과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3차 촛불 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어머니는 육십 평생 한번도 집회에 참여하신 적이 없지만 검찰개혁을 위해 용기를 내셨다.


우리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어머니는 체력 비축을 위해 낮잠을 주무셨고, 찰보리빵과 바닥에 깔고 앉을 노래교실 교재를 가방에 넣으셨다. 나는 지난 집회부터 직접 만들어 들고 다니던 종이 팻말을 챙겼다.
 

종이팻말 직접 제작한 종이팻말. 광장에서 내가 외치고 싶은 구호다. ⓒ 이정민

 
십여 분 일찍 집회 장소에 도착했다. 시작 전이라 어수선했다. 갑자기 어머니가 공원을 둘러보고 오겠노라며 시야에서 사라지신다. 어머니 표정에서 어색함이 읽힌다. 나는 주최 측 부스로 향했다. SNS를 통해 일제불매 1인릴레이시위를 이어나가던 대구 시민들이 '사법적폐 청산 대구시민연대'를 조직하여 촛불 문화제를 주최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마이크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시민들이 열을 맞추어 바닥에 앉기 시작했다. 어느새 어머니가 옆에 와 계신다. 왜 사라졌냐고 여쭤보니, 사진 찍힐까봐 앞에 앉기 싫으셨단다. 교복 차림으로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는 남학생, 어머니와 함께 온 청소년 두 명이 시야에 들어온다.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아이가 세 살일 때 광우병 집회부터 데리고 다녔단다. 어머니의 광장 정치 역사가 곧 아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사이 하성협 대구 민변 사무국장과 김진규 영남이공대 교수, 이승렬 영남대 교수회 의장이 발언을 이어나간다.
 

3차 대구 촛불 문화제 금요일 (11일) 저녁 7시, 대구 2.28 공원에서 검찰개혁을 위한 3차 촛불 문화제가 열렸다. ⓒ 이정민

  
어머니는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발언자에 시선을 고정하다가 구호를 외칠 때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닥에 놓아둔 검찰개혁 팻말을 만지작거리신다. 아직 집회에 적응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뒤에 앉은 여자분과 보도블록에 걸터앉은 할머니가 혼자 오신 것 같다. 두 분이 주위 사람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먼저 뒤돌아 앉았다.

"대구에도 진보적인 사람이 꽤 되잖아요. 목소리를 안 내서 그렇지."


오십 대 초반 여성은 함께 참여하기로 한 지인이 바빠서 혼자 왔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서도 단단함이 느껴진다.

혼자 앉아 계신 할머니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예순아홉 할머니는 지난 주에 손녀 돌본다고 집회에 못 나온 게 아쉽다는 말씀부터 꺼내셨다. "왜 집회에 나오세요?" 여쭤보니 "신문 보고 열 받아서 안 나올 수가 있나"라고 하신다. 지난 토요일에는 서초동 집회도 영감님과 다녀오신 모양이다. 대구 토박이 할머니는 박정희 시절부터 다른 목소리를 내셨다고 한다.
 
"대구 사람들, 박정희 좋아하잖아요. 싫어하게 된 이유가 있어요, 할머니?"
"인혁당, 그게 잘못됐다 아이가. 내 그때부터 박정희 싫어하게 됐다."


검찰개혁 집회에서 45년 전 인혁당 사건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영감님은 어디 가시고 혼자 오셨냐고 다시 여쭤보니 "서울은 같이 갔는데 영감은 친구 만나러 갑삐서" 하신다. 영감님과 할머니가 오 년 전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녀오신 이야기도 마저 듣고 싶었는데 혼자 앉아 있는 어머니가 마음에 걸린다.

시민발언을 위해 중년 여성이 무대로 올라왔다.
 

시민발언 대구 3차 촛불 문화제에서 시민이 검찰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시민은 "세 아이의 엄마로서 검찰을 꾸짖겠다" 라고 했다. ⓒ 이정민

 
'세 아이 엄마'라고 자신을 소개한 윤미경씨는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은 왜 가져갑니까. 일반 가정의 부모도 하지 않는 짓을 이 나라의 검찰이 해도 됩니까"라고 외친 뒤 "엄마로서 이 나라 검찰의 한심한 작태를 꾸짖겠다"고 발언했다. 시민들은 환호했고, 어느새 어머니도 팻말을 손에 들고 흔드는 게 보였다. 시민 엄마의 목소리는 다른 엄마인 내 어머니를 빙그시 웃게 했고, 어색함 없이 광장정치에 녹아들어 가게 했다.

12일 대구에서 서초동으로 여덟 대의 버스가 올라간다고 한다. 꿈쩍 않고 집회에 몰입한 어머니는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나는 여기까지다"라고 하셨지만, 서초 네거리에는 대구, 광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밝히는 촛불이 넘실거릴 것이다. 광장에서 더 많은 여성들과 엄마들이 발언하고 정치에 참여하고 연대했으면 좋겠다. 검찰개혁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으로 이뤄나가리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어머니의 정치 #어머니의 첫 집회 #엄마들의 광장정치 #밥상정치에서 벗어난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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