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26 09:00최종 업데이트 19.07.26 15:42
"우리 석윤이 아부지가 뭔 죄가 있겄시유?"
"..... "
"그러지 말구 나랑 같이 경찰서에 한번 같이 갑시다."

김진기(가명)는 도끼눈을 치켜들고 "내가 뭐할라구 경찰서엘 가요?"라며 삿대질을 했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도와줘유." 하지만 김진기는 옴짝달싹 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저자세였던 이용옥이 돌변했다.


"아니 이 아저씨가 너무 하네. 아저씨 때문에 남편이 보도연맹에 가입된 거 아닌가 봐유? 그래서 경찰서에 끌려갔으면 쫌 도와줘야 할 거 아니유?" 김진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듣자듣자 하니까 이 아줌니가 큰일 날 소리하구 있네. 누가 누구를 가입시켰다고 지랄여. 당장 나가"하며 역정을 냈다. 이용옥이 힘으로 남성을 당해 낼 수는 없는 법. 눈물을 머금고 되돌아섰다.

이용옥은 다음 날 일찍 집을 나섰다. 마을 나루터에서 백마강만 건너면 부여 읍내였다. 생전 처음 가보는 부여경찰서였다. 가슴은 콩닥거렸지만, 남편의 생사가 걸린 문제라 독한 마음을 먹었다. 경찰서 정문을 기웃거리자, 보초를 서는 경찰이 물었다. "뭔 일이유?" "예. 사찰과장님 좀 뵈러 왔구만유." 경찰이 안내해 준 곳으로 갔다. 마침 사찰과장이 자리에 있어, 사정을 얘기하고 '남편이 아무런 죄가 없으니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사찰과장의 안색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교육이 있어 소집한 것에 불과하니, 집에 가 있으면 며칠 후에 돌아갈 거니 안심하시오."

사찰과장의 답변이 있었지만, 그녀는 안심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지금 같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살아서 다시 못 만날 것 같다는 불길한 짐작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사찰과장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과장님, 지발 제 남편 좀 살려주시오"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허허 참. 이봐! 이 아줌니 돌려보내." 그러자 사복경찰 여럿이 다가 왔다. 이용옥은 그때부터 악을 썼다.

"야, 이놈들아. 내 남편이 무슨 죄가 있간디 이 난리여. 당장 내놔!"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거기까지였다. 사복경찰 여럿이 그녀의 팔다리를 번쩍 들어 정문 앞에 내동댕이쳤다. 보초를 서던 경찰이 안 됐다는 표정으로 "아줌니. 그라지 말구 집으로 가세요. 여기서 이런다구 남편 분이 나오는 것도 아니구." 이용옥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대성통곡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마을을 향해 걸음을 향했다.

경찰서에 항의한 게 이적행위?

 

송완쇠, 이용옥 부부 ⓒ 박만순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충남 부여를 점령하기 직전 사람들은 피난 짐을 쌌다. 부여군 규암면 신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에 살던 이용옥(1914년생)도 남편 걱정은 잠시 미룬 채 애들 챙기랴, 피난 짐 싸랴 정신이 없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아이들을 앞세워 구두레나루터로 갔다.

나루터에는 흰 옷 입은 이들이 개미 때처럼 몰려 있었다. 한나절을 기다린 후에야 배를 탈 수 있었다. 그녀 일행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부여군 은산면 가루고개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아이들의 고모가 살고 있었다. 가루고개 마을은 산속에 있는 마을로, 백마강을 건넌 후에 우마차를 빌려 30리(12km)를 가야 하는 곳이었다.

당시에 엄마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던 송석윤(1944년생)은 수시로 호죽기(전투기)가 날아다녀 공포에 시달린 기억이 남아 있다. "호죽기가 '쌕'하고 나타나면요. 엄마가 저를 치마로 덮어씌운 후에 바짝 엎드렸어요. 저를 살리려고 한 거지요." 그렇게 고모네 집에서 2개월을 살았던 이용옥 가족은 9.28 수복 때 규암면 신리로 돌아왔다.
며칠 후 경찰 2명이 찾아왔다.

"이용옥씨 있소?"

그녀는 경찰들이 집으로 올 것을 미리 알았는지,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송석윤의 큰 어머니와 마을 아줌마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 앞이라 아무도 소리 내지는 못하고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잠시 경찰서에 갑시다"라며 경찰들이 이용옥의 팔을 이끌었다. '이제 가면 못 올 것 같다'는 웅성거림이 마을 아주머니들 속에서 나왔다. 아랫말 지나 구두레나루터로 끌려가는 이용옥의 뒷모습을 마을사람들은 눈물로 떠나보냈다.

그렇게 끌려간 이용옥은 1950년 12월 11일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며칠 후 계엄사령관 육군 소장 이형근은 사형집행을 명령했고, 그녀는 대전 산내에서 학살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사형선고를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잠깐의 행복

이용옥이 산내에서 학살된 이유는 남편의 예비검속에서부터 시작된다. 남편 송완쇠(1915년생)는 일제강점기에 규암보통학교를 나와 간도에도 다녀왔다. 집에 있는 경우는 별로 없고, 무슨 일을 하는지 늘 밖으로 내돌았다. 집에 있을 때에는 공회당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완쇠가 집에 오는 날은 대부분 장날이었는데, 아들 송석윤의 입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아버지 자전거 뒷좌석에 타, 은산장에 놀러 가기 때문이었다. 장날이면 송완쇠는 큰 홍어를 사, 이웃해 있는 큰집 식구들과 함께 요리해 먹었다. 그의 부모와 형 식구, 그리고 처자식까지 하면 13명의 대식구였다. 먹을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랬던 그가 처남과 함께 좌익 활동에 연루되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6.25 직후 처남·매형은 각각 예비검속되었다. 충남 공주 탄천면이 집이었던 처남은 공주경찰서로 끌려가 공주 왕촌에서 학살되었고, 송완쇠는 부여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대전으로 이송된 뒤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송완쇠 아내 이용옥이 이웃집과 경찰서에 가서 "남편을 살려 달라"고 사정하고, 항의한 것은 송완쇠가 살아 있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경찰을 대상으로 그녀가 싸울 수는 없는 일이었고, 더군다나 피난길 때문에 남편의 생사에 더 이상 메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피난 짐을 싸는 동안 남편과 남동생은 대전 산내와 공주 왕촌에서 학살되었다. 북한군이 부여군을 점령하는 동안 그녀는 부역행위를 한 적이 없었다. 그 기간에 이용옥은 올케가 살던 부여군 온산면으로 피난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적행위'라는 중죄를 뒤집어썼는가?

듣도 보도 못한 법

 

이용옥의 판결문 ⓒ 박만순

      
이용옥이 사형선고를 받은 법은 '국방경비법'이었다.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북한군 점령기에 부역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은 숫자 미상의 사람들이 이 법에 따라 사형선고를 받거나, 실형선고를 받았다. 그럼 이 법이 과연 '합법적'이었는지를 살펴보자.

1948년 7월 5일에 공포된 것으로 알려진 국방경비법은 실체가 없는 '유령'과도 같다. 왜냐하면 이 법은 대한민국 수립(1948년 8월 15일) 이전인 미군정 시기에 만들어진 법으로,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형사처벌의 잣대로 사용됐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방경비법이 정식으로 공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방경비법은 정식 법률 번호도 없고, 몇월 며칠에 공포되었는지 어느 기록에도 없다. 신기철 재단법인 금정굴 인권평화재단연구소 소장은 "국방경비법 자체가 근거가 없는 법률이다"라고 주장한다. 많은 연구자나 법률학자들도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1998년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이 문제에 대해 비상식적인 판결과 결정을 내렸다. "국방경비법이 법으로써 갖추어야 할 문제(정확한 제정시기와 공포과정)를 결여했지만, 법의 안정성을 위해서는 합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즉, 실체가 불분명한 건 맞지만 '관습법'으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정하기엔 이 법은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수없이 앗아갔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사죄하는 것이 마땅한데 '잘못된 법이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달라'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중 잣대를 없애 주시오"
   
 

증언자 송석윤 ⓒ 박만순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의 가족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바로 이중잣대다. 부모를 잃은 송석윤(76,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동)은 "아버지는 보도연맹사건 희생자로 진실규명 되었지만, 어머니는 국방경비법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이유로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기각 결정을 받았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전쟁 통에 국가에 의해 부모를 잃은 송석윤 가족의 삶은 피폐하기만 했다. 그의 형은 머슴처럼 살았고, 송석윤은 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서울 신흥사 적조암에서 심부름을 했다. 중학교는 검정고시로 마쳤고, 한양대학교 뒤편에 있던 한양고등학교 야간을 다녔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한 그는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합격했지만 돈이 없어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1967년 군 입대 후 베트남전쟁터까지 갔다 온 그는 사회생활도 '오뚜기'처럼 했다. 청계천에 있던 경원세기에서 냉동기술을 배워 외환은행에 입사해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2019년 현재 그는 경남여중에서 '노인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평생 손을 놀리지 않고 살았기에 무엇이라도 해야만 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대전유족회 초창기부터 활동해온 그는 "어머니의 명예회복이 제 여생의 바람입니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의 예비검속에 항의한 어머니가 사형선고를 받아, 산내에서 학살당했다. 그런데 국가는 '사형선고를 받아, 집행되었기에 어쩔 수 없다'라며, 나 몰라라 한다. 국가는 언제까지 송석윤의 눈물을 외면할 것인가.

 
'팽' 당한 국방경비법 피해자들
한국전쟁 전후에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이중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들의 절대다수는 2019년 현재까지 '빨갱이'라는 오명(汚名)을 벗지 못했다. 왜냐하면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원회가 '국방경비법'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받은 이들을 진실규명 대상에서 애초에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은 이들에 대한 사건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 후 '기각'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극히 일부 예외가 있었다. 정부수립 전 이승만 선거구인 동대문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 최능진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 선고받았는데도 진실규명 되었다. 즉 진실화해위원회는 최능진이 인공시절에 '정전·평화' 집회에 참석한 것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위배되지 않고,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은 것은 위법이라는 이성(?)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충남 부여군의 전재흥 역시 인공시절 이적행위 명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애초에 전재흥 사건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가, 유족의 이의제기로 '진실규명 결정' 처리했다. 즉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았다는 점과 전재흥 때문에 죽었다는 이가 실제로는 후퇴하는 북한군에 의해 학살된 것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최능진과 전재흥은 '국방경비법'으로 사형선거를 받았어도,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 결정'으로 처리했으며, 유족들은 이를 근거로 국가를 대상으로 재심 청구했다. 결과는 모두 유족들의 승리였다.

그런데 대다수의 국방경비법 피해자 유족들은 국가에 하소연 한마디 못하고 '팽' 당했다. 국가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기상천외한 잣대를 갖고 유족들에게 2차 가해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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