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박물관에 영구 소장된 바둑판, 그걸 만든 '여자 목수'

[인터뷰]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 유진경

등록 2019.06.24 21:46수정 2019.06.24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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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경 목수가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 최수진


지난해 한국식 전통 기법으로 복원한 바둑판이 독일의 응용 미술 박물관에 영구 소장됐다. 이 바둑판을 만든 사람은 '유진경', 20년 차 여성 목수다.

유진경 목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로 전통 바둑판을 복원하는 유일한 목수다. 다섯 가지 전통 기법으로 현대에 맞는 가구를 제작하는 그녀는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다.


"우현히 본 바둑판 도판 해설... 완전히 꽂혔어요"

- 전통 바둑판을 복원하는 유일한 목수라고 들었습니다.
"처음 복원한 바둑판이 프랑크푸르트에 응용 미술 박물관에 영구 소장 됐어요. 저는 원래 전통 목가구를 만듭니다. 20년 동안 목수 일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바둑판은 만들지 않았어요. 2013년 우연히 최순우 관장의 도록 <한국의 목칠가구>에서 전통 바둑판의 도판 해설을 봤는데 완전히 꽂혔죠.

'천판에 바둑알을 놓으면 그 울림으로 철사줄이 떨리는 가냘픈 소리가 들리게 되어 있다'는 설명을 읽는데 피아노 생각이 났어요. 피아노는 건반을 누르면 줄이 띵하고 울리잖아요. 한국의 전통 바둑판이 그 원리인 거예요. 악기처럼 만들어진 거죠. 충격을 받아 읽고 또 읽고 열 번쯤 읽은 것 같아요. 그 뒤 전통 바둑판을 복원하는 목수가 있나 찾아봤는데 아무도 없었죠. '내가 해야겠다, 이거 나한테 하라는 소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구나 히든카드가 필요하잖아요. 바둑판은 제게 히든카드예요."

좋은 바둑판이라고 하면 흔히 일본식 바둑판을 떠올린다. 바둑을 아는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문화 탄압으로 한국식 전통 바둑판의 맥이 끊어졌다고 여긴다. 그녀는 우리나라 바둑판을 쓰지도, 복원하려 들지도 않는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한다.
 

유진경 목수가 복원한 전통바둑판 ⓒ 최수진


유진경 목수는 2000년 목공에 입문했다. 당시 IMF 체제가 닥쳤고 동료들이 정리해고당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철밥통이라 믿었던 직장을 잃는다는 두려움은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에게 더 크게 와 닿았다.

어느 날 정처 없이 동네를 걷고 있는데 한 상가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은은한 향내가 풍겨졌다. 가만히 안을 들여다보니 사람들이 나무를 톱질하고 있었다. 늦가을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그 순간이 굉장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그곳에서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유진경에게 목공을 배운 계기를 물으니 '우연'이라고 답했다. 우연이 운명처럼 찾아올 때가 있다. 운명을 받아들이면 숙명이 된다. 그녀에게 목공은 숙명이었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 목수는 손가락 한 마디가 없다. 전통 목가구를 배울 때 사고를 당해 오른손 검지 한 마디를 잃었다.

- 목공 일은 거친 작업입니다. 언제 힘들었나요?
"입문하고 7년쯤 지나 원형 톱에 손을 다쳤습니다. 결국 한쪽 손마디는 살려내지 못했죠. 10주 동안 네 번 수술했어요. 목공은 이런 위험에 자주 노출됩니다."

트라우마로 남았을 법한데, 그녀는 목공을 계속한다. 한동안 원형 톱 소리만 들어도 무서웠지만 다시 톱을 잡았다.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목공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크게 다친 후 그만두고 싶진 않으셨나요?
"목수를 오래 하신 분들 중 손이 멀쩡하신 분은 거의 없어요. 당시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저를 가르친 박명배(국가무형문화재) 선생님도 손가락 한 마디가 없으세요. 퇴원하고 온 저를 보고 '이제야 목수 같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다시 톱을 잡았죠."

'여자목수'로 산다는 것
 

유진경 목수가 아들이 선물한 대패로 대패질 하는 모습 ⓒ 최수진

 
유진경 목수는 2014년에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 보유자인 박명배 선생님 밑에서 3년 동안 수학하고 시험 네 번을 치른 끝에 얻은 결과였다. 목공예기능사, 가구제작기능사 등 관련 모든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목수로 인정받기 위해 그녀는 악착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작품을 전시할 때 사람들이 제가 옆에 서 있는데도 '이거 만든 작가님은 어디 계시냐'고 물어봐요. 남자가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저는 일하면서 젠더 의식을 별로 느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전시회를 열면 사람들이 일깨워주죠. 그게 힘들어요. '정말 잘할 수 있겠어?'하는 시선 말이에요. 그래서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을 꼭 취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녀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디테일이 돋보이는 가구를 만든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 또래 대부분의 여자는 생활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남자보다 높아요. 살림살이를 고민하는 엄마 뒷모습을 보고 자라 침대 높이나 가구의 손잡이 높이가 어디쯤 있어야 편할지 등을 고민하니까요. 하다못해 마른 걸레 하나를 수납하는 공간에 대해서도 고민합니다. 가구엔 그런 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가구를 만들 때 예쁘게 만들 생각보다 이 물건을 어디에 놓을지 먼저 생각해요. 아파트 어디쯤에 놓아야 쓸모 있고 아름다울지 말이죠."

그녀는 가구를 만들 때, 생활의 부가가치까지 고민한다. 이 점이 섬세한 디테일을 갖춘 가구를 만드는 힘이 됐는지도 모른다.

"백년 후에도 남아 있는 가구"
 

유진경 목수가 사용하는 공구들 ⓒ 최수진

 
유진경 소목장은 조선시대 사용한 다섯 가지 기법으로 현대식 가구를 만든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작품을 만드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지금 박물관에 있는 전통 가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주로 썼던 물건입니다. 훗날 박물관에 들어갈 현대 가구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수입 가구겠죠. 수입 가구가 아니라 우리 가구를 백 년 후에도 남기고 싶어요. 그래서 선조의 지혜가 담긴 기법으로 사람들이 즐겨 쓸 수 있는 편리한 가구를 만들어 대중화시키고 싶습니다."

- 현대 가구와 차별화되는 전통 목가구의 장점은 뭔가요?
"만드는 과정이 전부 친환경적이에요. 친환경이니까 사람한테 나쁜 건 하나도 없죠. 수입 가구는 화학 도료(물건의 겉에 칠해 그것을 썩지 않게 하거나 외관을 아름답게 하는 재료)를 써서 나무의 숨구멍을 막는 반면, 전통 가구는 미네랄 순수 오일만 발라 마감해 화학 재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썩지 않고 대를 물릴 수도 있을 거예요."

오늘날 전통가구를 찾는 사람들은 적다. 스웨덴 가구 조립 기업 '이케아'의 등장으로 전통 목가구가 자리할 시장은 더 좁아졌다.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에 따르면, 가구산업은 전통적으로 숙련공들에 의한 집약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사업으로 인식됐지만 최근 원가경쟁력을 극복하고자 대기업을 중심으로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다고 한다. 숙련공들에 의해 제작되는 전통 목가구는 원가경쟁력에서도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유진경 목수에게도 전통 가구 시장의 침체는 큰 걱정거리다.

- 전통 목가구 시장의 위기라고 볼 수 있는데, 장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정부나 기업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목수는 목공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할 수 있다면 정부에서 예산을 아끼지 않고 전통 기술을 고증해줬으면 해요. 또 목공을 배울 기관과 학원이 많아져서 저 같은 목수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힘들지만, 여럿이 가면 길이 되고 그 길이 희망으로 이어지니까요."

한편 유진경 목수는 올 하반기 출간 예정인 단행본 <여자목수>의 공동저자다. 지난 5월 출판 기념으로 공동저자 중 9명의 여자 목수와 함께 <최소의 의자; 展>전시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유진경 #전통바둑판 복원 #여자목수 #소목장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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