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편의점에 앉은 '검은 양복'의 사내들

[편의점 소통 일지 ②] 대리기사, 폭력배... 편의점에서 마주하는 사람들

등록 2019.06.16 11:24수정 2019.06.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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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주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한 지 4개월. 주중에는 돈이 되든 말든 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주말 밤과 새벽 시간을 활용, 매달 지출 필수 항목인 임대 주택 월세와 대출금 상환액을 벌려는 목적(근래 최저임금 상승으로 단시간 알바도 생활에 꽤 도움이 된다)이다.

하지만 이런 목적 외에도 편의점이 가진 독특한 매력 때문에 나는 이 일을 꽤 좋아한다. 이유는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 그저 지나쳐버리기엔 꽤나 재미있고 교훈적이고 때로 뭉클하기까지. 그 단편들을 기록해 나누고자 한다. - 기자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채 한 달이 안 된 어느 주말, 인상적인 풍경 하나를 사진에 담았다. 비가 내리고 있던 탓에 손님을 기다리는 대리 기사 네댓 명이 각자 제일 싼 음료나 빵을 하나씩 사서 편의점 시식대에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조금씩 시차를 두고 들어왔고 연령대도 달랐는데 입고 있는 옷만은 모두 검정색 양복이었다. 자세히 보면 양복이나 안에 받쳐 입은 와이셔츠 모양이 다 다르긴 했는데 분명 저렴한 기성복임엔 틀림 없었다. 백발의 어느 기사 분의 그것은 주인만큼 늙은 듯했다. 
 

비를 피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앉아 있던 검은 양복의 대리 기사들 ⓒ 이명주

5월 18일

오늘도 사진 속 그날처럼 비가 온다. 약한 소나기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는 새벽, 20대와 60대로 보이는 익숙한 검은 양복의 대리 기사 둘이 들어왔다. 둘 다 편의점에서 제일 싸고 양 많은 과일향 음료를 샀는데 20대 기사가 자신이 계산을 하겠다고 웃으며 고집을 부렸다. 

키가 큰 어린 기사는 유난히 얼굴이 작고 말랐는데 아직 앳돼 보이면서도 표정이나 말투에 세상 풍파를 많이 겪은 듯한 아우라가 풍겼다. 머리가 하얗게 샌 60대 기사는 처음 한 번은 부드럽게 거절을 하더니 이내 흐뭇한 표정으로 어린 기사의 작은 선물을 받아들었다. 

계산대 앞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로 둘은 오늘 처음 만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새벽, 같은 일을 하러 나온 각자의 다른 듯 닮은 처지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듯했다. 돌아서 나가는 두 기사의 모습이 서로를 의지하고 응원하는 동료이면서 동시에 다정한 아버지와 아들 같아 보였다.   

5월 19일

새벽 1시 반경, 건장한 남성이 뛰어 들어와 112 신고를 요청했다. 그리고 잠깐 다시 나가더니 이내 헐레벌떡 돌아왔고 곧이어 전신에 문신을 한 나체의 남성이 눈가엔 피를 흘리며 손에 든 흉기로 앞서 온 남성이 붙들고 있는 편의점 문을 격렬하게 쳐댔다.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바로 인근 경찰서로 호출되는 '3초' 긴급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눈앞에 펼쳐진, 자칫 내게도 원치 않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위험한 대치를 위태로운 마음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살인이 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다행히 안에 있는 남자의 힘이 좀 더 우세해 밖의 광분한 남성의 진입을 막았다. 지난 번 취객 시비 때는 10분도 더 걸려 왔던 경찰이 이번엔 금방 와줘서 뜻밖의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경찰이 오고 사태가 진정되자 그제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좀 전까지 미친 듯 날뛰던 나체의 남성은 경찰을 보자 의외로 빨리 기세가 꺾였고 그런 그를 몇몇 행인이 비웃으며 지나가기도 했다. 도움을 청했던 남자는 그 사이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평화로워진 세상. 여유를 되찾자 내가 뜻밖에 맞닥뜨린 공포스러운 상황에 반사적으로 떠올렸던 질문 하나가 여전히 내게 답을 구하고 있는 게 보였다. 

'만약 저 칼 든 남자가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혼자 도망갈 것인가, 곤경에 처한 이를 도울 것인가?'   
 

편의점은 다양한 사람들의 다른 듯 닮은 삶의 단편들 만나는 또 하나의 소통 창구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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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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