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욕하던 동네서 한 시민이 건넨 금일봉 "후회되더라"

[노무현이 만든 미래 ②] "노무현을 가슴에 새기고 싶다"... '순례길' 걷는 시민들

등록 2019.05.20 20:31수정 2019.05.2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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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을 내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래에 남긴 시대 정신은 '사람'이었다. 노사모를 비롯한 '노무현 키즈'는 풀뿌리 정치에 뛰어들었고, 시민들도 저마다 노무현을 기억하며 촛불 혁명의 큰 밑거름이 됐다. 오마이뉴스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아 '노무현이 만든 미래', 노무현의 사람들을 만났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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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민 노무현>의 한 장면. ⓒ 엠앤씨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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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민 노무현>의 한 장면. ⓒ 엠앤씨에프

  
"여기 김천에서는 노 대통령 살아계실 때 엄청 욕을 많이 했어요. 저도 지역 사람이니까 반론 한마디 못하고 그냥 듣기만 했죠.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 그렇게나 후회되더라고요. 왜 감추고만 살았을까."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평생을 김천에서 살아온 40대 이승철씨가 <오마이뉴스>에 한 말이다. 그는 14일 김천역을 출발해 구미역으로 향하는 '노무현 순례단'을 만나자 급히 차를 세운 뒤 봉투에 20만 원을 넣어 건넸다.

이씨는 "구미에서 일을 보고 오는 길에 반대편에 노란옷을 입은 순례단이 지나는 걸 봤다"며 "생일날 만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냐"고 반가워했다. 이날은 그의 마흔네 번째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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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사람 이승철씨는 노무현 순례단을 만나자 금일봉을 건넸다. 본인 생일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 김종훈

  
이날 경북 김천 아포역 인근 초등학교 앞에서 갑작스레 '금일봉'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노무현 순례길'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이다.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에 따라 이 순례길을 '깨시국(깨어있는 시민들의 국토대장정)'이라고 칭하고 있다.

'깨시국'은 지난 1일 서울 광화문광장을 시작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묘가 있는 경남 봉하까지 걸음을 잇고 있다. 총 22일 동안 진행되는 490km 거리, 이 구간을 22개로 나눠 '노무현 순례길'이라 명명했다.

14일, 경북 김천역을 출발해 구미역까지 향하는 14일차 순례길에 <오마이뉴스>가 동행했다. 서울과 경기, 충청과 대전, 경남과 부산, 호남과 제주 그리고 대구와 경북에서 모인 시민들이 '노무현'이라는 공통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걸음을 이었다.

"88년에 노무현과 문재인에게 도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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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순례길'에 참여한 시민들이 경북 김천-구미 구간을 걷고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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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순례길'에 참여한 시민들이 경북 김천-구미 구간을 걷고 있다. 뒤쪽에 걷는 남성이 90년대 노무현 의원에게 도움을 받은 안덕호씨다. ⓒ 김종훈

 
54년생 안덕한씨는 부산 출신이다. 경남 양산에서 30년 넘는 시간을 살았다. 노무현의 고향 부산에서 태어나 문재인이 살았던 양산에서 일생을 살아온 것이다. 올해 66세가 된 안씨는 첫날부터 14일째 걸음을 잇고 있었다. 

그는 "내 나이쯤 되면 시간이 많이 남는다, 종일 걸어도 괜찮다"면서 "노 대통령이 대통령 되기 전 국회에 있을 때 인연을 맺었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 관련해 시민단체를 운영하다가 90년대 중반 노무현 의원과 문재인 변호사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91년에 산업연수생제도가 생긴 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가 너무나 심각했어요. 아무리 힘써도 피해가 계속 되더라고요. (산업연수생제도를) 어떻게든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국회에 있던 노 의원이 힘을 많이 써줬어요.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생각하며 바꿔나갔습니다. 부산에 있던 문재인 변호사가 실무적인 일을 해줬습니다."


안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처음 국회의원이 된 88년 4월부터 인연을 이어왔다. 당시 노 대통령은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공천을 받아 부산 동구에 출마해 당선이 됐다. 안씨는 유권자로 정치권에 발을 디딘 노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그해말 노 대통령은 '5공비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전국구 스타가 됐지만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 총재와 결별한 뒤엔 도전과 실패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안씨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90년대 부산‧경남 지역에서 파키스탄과 동남아노동자들이 착취당할 때, 유일하게 행동해준 인물이 노무현 의원뿐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자연스레 정치인 노무현이 걸은 행보에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요. 그래서 2009년 5월 23일 노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양산대학병원으로 뛰어갔던 겁니다.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을 수 없었거든요."
 

안덕한씨는 순례길 내내 선두 그룹에서 순례를 이끌고 있다. 그는 "노 대통령 생각도 많이 하고, 내가 지나온 길도 떠올려 본다"면서 "완주해서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 노무현을 가슴에 새기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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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국민학교에서 열린 13대 국회의원 부산 동구 선거합동연설회를 마친 노무현 통일민주당 후보가 자동차에 올라 지역구를 돌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당시 노무현 통일민주당 후보는 허삼수 민주정의당 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 연합뉴스

  
파리에서 온 순례자
  
이날 노무현 순례단이 김천을 거쳐 구미에 들어서자 한쪽에서 "할 짓 더럽게 없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전을 하던 한 남성이 창을 내리고 순례단을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건넨 것이다. 순례단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자, 그는 창을 올리고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경기도 안양에서 새벽부터 내려와 순례단에 합류한 최유림씨는 "할 일이 없어서 내려온 게 아니라 바쁜 사람들이 귀한 시간 내서 내려온 것"이라면서 "제대로 알지 못해서 저런 막말을 하는 것 아니겠냐"라고 말했다.

순례단이 막말만 듣는 건 아니었다. 김천역을 출발해 구미역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이 상대적으로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세가 낮았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힘내세요", "고맙습니다" 등 수많은 응원 메시지가 이어졌다. 한 택시기사는 순례단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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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순례길'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온 심광보씨. ⓒ 김종훈

 
순례단에는 '노무현 순례길'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리옹에서 온 심광보씨도 있었다.

심씨는 "프랑스에서만 34년째 살고 있다"면서 "시대를 앞서간 노무현 대통령에게 미안해서 추모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에서 지난 촛불혁명을 봤는데 어마어마한 충격과 감동이었다"면서 "노무현이 뿌린 씨앗이 국민들 마음 속에 남았고, 그것이 위기의 순간 태동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년 5월 이렇게 노무현 순례길을 따라 걸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기억하지 않겠어요? 그러다 보면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수천 명 수만 명으로 불어날 것이고, 자연스레 우리는 노 대통령을 더 기억하게 될 겁니다. 다만 지금 사람이 적은 게 좀 아쉬워요.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에 동참한 180만 명 중 10%만 참여해도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저도 프랑스에서 왔잖아요."
 

그는 "노무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없애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은 유일한 대통령이었다"면서 "남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 결실을 맺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생일을 맞은 60대 김경열씨도 자신의 부인, 딸과 동참했다. 그는 "가족들이 함께 노 대통령을 기억해주고 마음을 나눠줘서 고맙다"면서 "생일을 기념하고 싶어서 가족들과 함께 이 자리에 섰다"라고 덧붙였다. 이어 "노 대통령을 생각할수록 삶에 정신적인 여유가 생긴다"면서 "앞으로도 매년 가족들과 함께 순례길에 동참할 것"이라며 웃었다.

그의 딸 김봄씨 역시 "아버지의 강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서 "걸으면서 노 대통령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돼 뿌듯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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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순례길'에 참여한 시민들, 지금은 사라진 경북 아포역 앞에서.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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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순례길' 3기 총대장 오흥국씨. ⓒ 김종훈

   
노무현순례길 3기 대장 오흥국씨는 "순례단은 매일 20~25km를 걷고 있다"면서 "언제든 시민들이 동참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열차가 다니는 기찻길을 따라 이동한다"고 전했다.

이어 "세상을 바꾸려면 시민들이 깨어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번 순례길을 통해 더 각성하고 깨우치고 있다"라며 "매년 5월이면 노 대통령을 기억하는 움직임이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017년 첫 걸음을 뗀 '노무현 순례길'은 올해가 세 번째다. 매년 규모가 조금씩 확대되고 있는데, 백미는 순례길의 마지막 여정인 진영역에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까지 이어지는 22구간이다.

22일 동안 22구간 순례길에 참여한 시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으로 걸음을 잇는다.

오흥국 대장은 "마지막 순례길에는 300여 명의 시민들이 함께할 것 같다"면서 "세상을 바꾸려면 깨어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노무현 순례길을 통해 깨어났다"고 자평했다.

마지막 구간인 진영역~봉하마을은 전체 코스 중 가장 짧은 4.4km 구간으로, 22일 오후 1시 경남 김해 진영역에서 출발한다. 노무현 대통령 묘역에 도착한 시민들은 다함께 노 대통령에게 참배하고 22일간의 모든 순례 일정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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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순례길'에 참여한 시민들이 경북 김천-구미 구간을 걷고 있다. ⓒ 김종훈



 

퇴임 뒤의 노무현 전 대통령 ⓒ (주)바보들

 
[관련기사]
[노무현이 만든 미래 ①] "노무현이 내 정치의 기준... 그가 부산 디비진 걸 봤어야" (http://omn.kr/1jbk6)
#노무현 #문재인 #순례길 #노무현순례길 #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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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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