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피아니스트, 다시 세상에 나오기까지

[인터뷰]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김민찬씨

등록 2019.04.12 16:16수정 2019.04.12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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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찬 피아니스트&작곡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김민찬 씨가 살아온 음악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다. ⓒ 오홍지 기자


음악을 듣는다는 건 연주자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설렘, 두근거림 또는 충격적이거나 벅찬 느낌. 따뜻하거나 때때로 슬프기도. 어쨌거나 온갖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접한다. 그 속에서 연주자의 마음을 잠시나마 엿보는 것 같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김민찬(38)씨의 음악은 오후 햇살 같다. 기분 좋게 달궈진 대지의 따뜻함. 그러면서 가볍게 '여운'도 동반한다.

지난달 충북 청주 청소년광장에서 문화공간 '다락방의 불빛'이 주최한 행복한 음악 이야기에서 인상 깊은 연주를 선보인 김민찬씨가 "사람들 기억에 평범한 작곡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든지 자신을 생각했을 때 편안한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며 "가까운 사람과 음악을 공감하고, 공유하고 나아가 그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고 소망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피아노를 쳐온 그가 본격적으로 몰두하게 된 계기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 음악교사의 권유로 학생들 앞에서 연주를 한 일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베토벤 소나타 비창 2악장이었죠." 당시를 떠올리듯 김씨가 웃었다.

인생을 바꿔놓은 곡

그렇게 김씨의 연주를 듣던 음악교사는 그를 불러 피아노를 진지하게 해보라며, 음대에 진학해보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다. 그 말에 김씨는 "음대 가면 도대체 뭐해요?"라며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나 음악교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김 씨는 몇 번이나 "왜 가야 하나요"라며 거절에 일수였다.

"몇 번을 거절해도 화를 내시지 않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주셨어요. 제가 음대를 가면 유학도 가서 높은 곳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등 다양한 활로 개척이 가능한 곳이라고 했죠. 이후에 그 선생님은 제게 무대에서 연주할 기회를 많이 주셨죠. 저에 대한 이해랑 배려를 많이 해주셨어요. 제게는 은사님이죠. 그래서 결심했어요. 음대를 가보자 하고요."


그러나 결심은 곧 실망으로 번졌다. 음대 진학이 1년 늦춰졌기 때문이다.

"음대를 가려면 실기를 봐야 하자나요? 스스로 집에서 연습하고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실기를 보러 갔는데 글쎄 저와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피아노를 치는데 기가 팍 죽더라고요(웃음). 다들 너무나 잘 치는 거에요. 실기도 보지 않은 채 바로 집으로 왔죠. 그렇게 1년 재수를 한 것이죠."

우여곡절 끝에 음대에 들어가서도 그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교육과정이 그에게는 맞지 않았다. 학기가 지날 때마다 그가 느낀 것은 '실망뿐인 교육 시스템과 숨 막히는 현실'이었다. 

"막상 음대에 들어가 보니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이 크게 와 닿지 않았어요. 곡을 완성해야 하는데, 곡에 관해 고민하고 이해하고 싶고, 저만의 해석으로 연주하고 싶었지만, 학교는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았죠. 학교라는 시스템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여유를 주지 안 자나요. 배정된 교수들한테 그 곡을 배워서 완성해갈 뿐이에요. 그렇게 시간은 지나고 4학년 1학기에 때였던 것 같아요. 문득 '이건 아니지 않나?' 정말 진지하게 제게 물었죠."

졸업을 두 학기 남기고 시작된 '방황'
 

김민찬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인터뷰 작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김민찬씨. ⓒ 오홍지 기자

 
- 두 학기만 다니면 졸업인데, 아깝지 않았나요?
"그러니깐요. 두 학기만 마치면 졸업을 하는데, 여기서 학기를 마치고 졸업하고 나면 과연 나는 누군가가 생전에 나도 모르는 악보를 주면 나 스스로가 이 곡을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대체 그렇지 못하면 졸업장이 무슨 필요가 있지라고 생각했어요."

- 그래도 아직 학생이니까 졸업하고, 사회로 나오면 의문을 품은 것들은 경험으로 배워질 것 같은데요?
"저 같은 경우는 그것 때문에 휴학을 여러 번 했어요. 거의 1년마다 했던 것 같아요. 그때도 지금과 같은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생각이 드니까 제가 이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더 라고요. 바로 자퇴서를 제출했어요.

학교에서는 난리가 났죠. 학과장부터 시작해 선배와 동기, 후배들이 '미친 거 아니냐. 두 학기만 다니면 네가 하고 싶은 음악 마음껏 할 수 있는데, 그래도 졸업장은 있어야지 유학도 갈 수 있다. 졸업장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라고 말하는 거예요. 저는 그 말에 '앞으로 두 학기를 더 다니면서 졸업장을 받아야 한다는 그 자체가 끔찍하다. 그만두겠다'라고 말하고 나왔죠."

김 씨는 그렇게 자퇴한 이후 음악 활동을 중단했다.

"졸업도 못한 저를 누가 고용하겠어요. 음악 활동을 중단한 동안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죠. 음악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것이죠. 그러다가 한 가지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약국 창고 지기 했을 때죠. 지하라 환기도 잘되지 않고, 먼지도 많고, 굉장히 공기가 좋지 않았어요. 거기서 1년간 일할 때 천식을 거의 달고 살았어요.

그렇게 참고 참다가 이러다 제 몸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아 약국장에게 그만둔다고 말씀드렸더니 몸이 안 좋아진 것은 순전히 제 탓이라는 거예요. 관리를 못 했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어요. 밖에 나가서 일하려면 간신히 숨만 쉴 수 있을 정도의 월급을 받거나 아니면 막일 정도밖에 없구나 라고요. 약국 창고지기를 계속했으면 받은 돈을 병원비로 다 쓰겠다고 생각했죠. 그럼 차라리 남들보다 조금 덜 먹고 좀 더 춥게 지내자고 생각을 하며 결심했어요. 그렇게 공백기가 시작된 것이죠."


- 어떤 공백기를 맞았나요?
"약 2년 정도를 집에 혼자서만 지냈던 것 같아요. 외부와의 차단을 끊었죠. 일주일 정도 한마디도 안 할 때도 있었어요. 그때 나이는 28살 정도였을 거예요."

- 그 당시는 방황을 많이 하던 시기였나요?
"네 맞아요. 온종일 집에만 있고, 생필품도 인터넷으로 주문했죠. 그나마 나갈 일이 생기다면 쓰레기 분리수거 외에는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지인의 예식장을 함께 가자는 전화가 왔다고 한다. 

"예식장을 가니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보였어요. 아무 느낌도 들지 않을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보니 너무나 연주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어요.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죠. '음악을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 어머니가 손을 잡아주시면서 제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울컥했죠."
 

김민찬 피아니스트&작곡가 인터뷰 김민찬 피아니스트&작곡가 인터뷰 ⓒ 오홍지 기자

 
- 어머니 때문에 피아노를 다시 칠 수 있었네요. 이후 행보는 어떻게 됐나요?
"지인분을 통해 재즈 하시는 분을 소개받고, 4개월간 교습을 받았어요. 당시 나이가 30살 정도였어요. 재즈를 배우다 어느 날 한 번은 곡을 써갔는데, 그분이 제 곡을 보시고는 신기해하셨어요. 그분은 제게 '음악에서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모를 뿐이지 이미 머릿속에 다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음악이 어떻게 흘러가고 구성돼야 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이론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쓰고 싶은 것을 쓰라고 말했어요. '잘할 수 있다고' 그 말을 들으니까 예전에 내가 어떻게 곡을 쓰지 하던 많은 의심이 해소됐어요,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작곡하기 시작했어요. 아마 그분이 아니었으면 평생 작곡을 하지 않았을 거에요. 그분이 제 곡을 굉장히 많이 좋아했어요.

그분한테는 교습을 4개월밖에 받지 못했는데, 교습 기간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해줬어요. 언젠가 병아리가 알에서 깨고 나온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올 때는 스스로 깨고 나와야 건강하게 잘 산다는 거에요. 그걸 만약 누군가가 보고, 안타깝게 여겨 알에서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도와주면 건강하게 못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제게 '너를 알에서 깨고 나올 수 있게 도와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거에요. 스스로 알에서 깨고 나올 것이라며 저를 믿는다고 말씀 하시더라고요. 너무나 기뻤죠."

작곡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작곡에 열을 올렸다. 그러고선 데모 테이프를 제작해 국내 3대 음반회사에 보냈다. 자신이 작곡한 곡을 대중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3대 음반 회사 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김 씨를 만나 뵙고 싶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믿기 힘들어서 혹시 스팸 아닌가 하고 의심도 헸었어요. 신기했죠. 미팅하고 난 후 음반계약을 해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하는 것에 대해서 모든 지원을 다 약속 해주더라고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곡 작업을 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다

- 다른 분들에게도 곡을 써주는 활동을 하셨나요? 
"아뇨. 사실, 무명 연주자의 곡을 누군가가 봐준다는 것은 힘들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작곡을 하고 음반 회사와 일만 했어요. 그렇게 한 것은 제가 힘들 때 저희 형님이 항상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 뜻은 제가 정말 뛰어나면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볼 거라고, 계속 제 길을 가라고 말씀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 말을 믿어요. 저를 항상 지지해주는 사람들은 가족과 주변 지인분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부분이 제가 버티는 힘인 것 같아요."

- 클래식은 막연하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접근하기 쉬운 방법이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어렵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안타깝게도 생각해요. 굳이 말씀드리자면 좋아하는 곡을 우선 많이 들으세요. 쇼팽이나 모차르트. 베토벤의 음악은 일상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어요. 유명하니깐요.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렇게 먼저 쉬운 것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궁금증도 생겨나고, 흥미를 느끼게 돼요.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 퓨전 연주나 작곡도 염두에 두고 있나요?
"퓨전 음악에도 시도해보려고 해요. 어떤 장르에 음악도 취급하고 싶어요. 제가 작곡한 곡 중에 탱고도 있어요. 이후에 또 다른 장르에 곡을 만들 계획이에요."

그는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음악에 관해 공부를 했다면 스스로 곡을 해석해야 해요. 한 곡을 갖고 자기만의 해석 시점으로 풀어내야 하죠. 창작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철학적인 생각과 상상력이 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 같은 경우는 언제부턴가 오선지에 음표들이 문장이나 글로 보이더라고요. 혹은 이미지나. 어떤 곡을 해석한다고 할 때 내가 곡을 작곡할 때는 문장을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며 작업에 몰두하죠.

"납득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넘어가 지질 않아요. 항상 저 스스로 '왜'라는 의문을 던졌던 것 같아요. 악보를 외워 연주하는 것보다 곡에 담겨 있는 의미나 왜 이렇게 해석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김민찬씨가 작곡한 곡은 <장미꽃>, <나비의 춤>, <Love Story>, <쇼팽의 별>, >별과 달 그리고 피아노>, <사막여우>, <당신은 모릅니다>, <심연> 등이다. 이 곡들은 멜론뮤직에서 검색하면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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