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를 건너서 숲으로' 그의 시가 도서관 이름이 되다

[써니‘s 서울놀이 41] 서울 은평구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

등록 2019.02.28 15:13수정 2019.06.26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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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광천)를 건너 숲(비단산)으로 가면 나오는 도서관. ⓒ 김종성

추위와 미세먼지가 이어지는 '삼한사미'의 올 겨울 날씨. 햇볕을 자주 쬐지 못해선지 이유 없는 우울감에 빠지다가도, 동네 도서관에 가면 뜻 모를 의욕이 생긴다. 도서관 서고는 마치 숲속을 거니는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충만해진다. 책들이 나무로 만들어져서 그런 기분이 드나보다.

서울 은평구에는 개성 있는 도서관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어 좋다. 산자락에 거대한 성채마냥 자리한 전망 좋은 은평구립도서관, 딱딱한 관(館)의 느낌보단 정다운 마을에 온 기분이 드는 구산동도서관마을, 불광천을 산책하다 들르기 좋은 불광천 작은도서관, 만화를 실컷 볼 수 있는 포수마을 만화도서관 등등. 느지막이 일어난 주말, 자전거에 올라타 어느 도서관에 갈까 고민하는 잠깐의 시간이 즐겁다.

이름도 독특한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은 은평구에서 가장 근래(2018년 하반기) 생겨난 도서관이다. 내(불광천)를 건너서 숲(비단산)으로 가면 나타나는 절묘한 이름의 도서관이다. 도서관 이름이 참 시적이구나 싶었더니 윤동주 시인이 지은 시 <새로운 길>(1938)에 나온단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건너서 마을로
 

시처럼 안온한 도서관 공간. ⓒ 김종성

시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시 낭송 오디오. ⓒ 김종성

알고 보니 이 도서관은 윤동주(1917년~1945년 2월 16일)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로 설립한 도서관이란다.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평양 숭실중학교의 후신인 숭실중·고등학교가 인근에 있다.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를 살다간 시인의 민족사랑 정신과 문학을 기리고 있다. 윤동주 시인은 광복을 불과 6개월 남기고 일본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돌아가셨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도서관 2층에 가면 시문학 자료실과 전시실이 마련돼 있을 정도로 시와 친화적인 곳이다. 윤동주 시인의 생애와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시낭송 오디오 기기를 통해 감상하는 시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도서관 내부 구조도 시처럼 자유롭고 책 읽기 편안하다. 입시공부를 위한 열람실은 따로 없는 대신 작은 공간을 활용한 좌석들이 눈길을 끈다. 눕다시피 기대어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원형의 좌석이 제일 좋았다.

도서관 이름에 나오는 '숲'이 실제로 나있어 더욱 좋다. 3층에 있는 도서관 옥상정원으로 나가면 햇볕을 즐기며 산책하기 좋은 숲길이 나있다. 숲을 품은 산 이름이 '비단산'이다. 도서관 이름과 왠지 어울린다. 비단결같이 부드러운 능선 길을 걷다가, 도서관에서 읽었던 섬진강 시인 김용택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자연이 말하는 것을 받아쓰다보니 시가 되었다." 
 

도서관 2층에 있는 시문학 자료실. ⓒ 김종성

비단산 숲길을 품고 있는 도서관. ⓒ 김종성

흥미로운 책 처방전, 어떤 책이 들어 있을까?

요즘 온라인 서점이나 책방에 가면 '북큐레이션(Book Curation)'이라는 이벤트가 한창이다. 특정 책을 골라 독자에게 소개하는 것으로 일종의 책 처방 서비스다. 개인 SNS나 유튜브에서도 활용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로 트렌드가 되고 있다.

'큐레이션'(curation)은 '특정 콘텐츠를 목적에 따라 수집하고 선별하는 것을 뜻하는 용어다. 미술 분야에서 주로 사용했던 개념이었으나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져 나오는 책 세상에서 자신에게 맞는 책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맞춤책을 추천해준다니 좋은 아이디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도서관'에도 북큐레이션 서비스가 있어 반가웠다. 약국에 들고 가는 처방전 봉지에 책이 들어있어 눈길을 끌었다. 책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더욱 흥미롭다. 어쩌다 꼰대, 세련되게 불편함을 표현하는 노하우, 개소리에는 단호하게 등 재미있는 문구가 적혀있고 그에 어울리는 책이 봉투 속에 들어있다.
 

도서관에서 진행 중인 흥미로운 북큐레이션. ⓒ 김종성

소확행을 느끼게 해준 책처방전. ⓒ 김종성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 가운데 애써 골랐을 사서 분들의 노고가 고맙게 느껴졌다. 책을 서가에서 직접 보고 고르는 게 아니라, 책을 상징하는 문구만 보고 미지의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운 좋게도 나만의 '인생책'을 만난다면 더욱 반가울 것 같다.

나는 '여행지에서 만난 고양이', '고양이를 좋아하는 당신에게'가 적힌 처방전 봉투를 택해 대출신청을 했다. 두툼한 처방전 봉지 안엔 어떤 책이 들어있을까. 부러 봉지를 개봉하지 않고 집에 들고 오는 시간이 왠지 떨리고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을 제대로 느꼈다. 책도 마음에 들었지만 도서관에서 만든 풋풋한 책갈피가 꽂혀있어 더욱 좋았다. 동네 도서관이 단순 입시공부나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는 기능을 넘어 복합 문화 공간 등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 도서관 누리집 : http://www.nslib.or.kr

 
덧붙이는 글 서울시 '내 손안에 서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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