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전체의 사상을 학생의 힘으로 집약한 6ㆍ10만세운동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15회] 1919년 3ㆍ1혁명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촉매제 역할

등록 2019.02.16 14:39수정 2019.02.1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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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 운동 6·10 만세 운동은 일제 치하에서 조선공산당이 전개한 가장 대표적인 대중투쟁이다. ⓒ 서문당

기미년 3ㆍ1혁명과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국내 3대 독립운동의 하나인 1926년 6월 10일의 6ㆍ10만세운동은 학생과 민중이 함께 궐기한 항일투쟁이었다.

1919 3ㆍ1혁명이 고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삼았다면 6ㆍ10만세운동은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하여 일어났다. 3ㆍ1혁명 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라는 허울 아래 식민통치를 더욱 강화시키고, 항일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3ㆍ1혁명이 좌절되면서 우리 독립운동은 한동안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만주의 무장 독립투쟁 진영도 일제의 경신참변 등 교포학살로 근거지를 잃고 연해주 방면으로 밀려났다. 러시아에서는 자유시참변사건으로 독립운동 진영끼리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여기에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탄핵과 내분이 겹쳐 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국내에서는 민립대학설립운동과 실력양성론이 대두되었으나 일제의 탄압과 분열책으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20년대 민족운동이 부진상태에 빠져 있을 때 활력을 일으킨 것은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일제경찰ㆍ헌병대의 삼엄한 감시속에서도 독서회운동을 비롯하여 국민계몽운동을 통해 차츰 조직과 연대를 갖추어 나랐다. 

이와 함께 1924년 전국 각지에 산재한 대중단체를 통합한 조선노농총연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조선노농총연맹은 전국의 167개 단체 대표 204명이 모여 통일된 노동자ㆍ농민조직으로 결성되어, 강령으로 '노농계급해방', '완전한 신사회실현', '자본가계급과 철저한 투쟁', '노농계급의 복리증진 및 경제적향상 도모'를 내세웠다. 가입단체가 늘어나 260여 개에 이르고, 회원수가 5만3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후 각지의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나갔다.


조선공산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주의를 표방한 정당으로 제1차당에 속한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와 파리강화회의 결과에 크게 실망한 독립운동세력의 일부는 피압박 약소 민족의 해방투쟁에 적극적인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면서 그 지원을 받아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중국요릿집 '아서원' ⓒ 동아일보

1925년 4월 17일 공산주의 계열단체인 화요회ㆍ북풍회ㆍ무산자동맹회 등에 소속된 김재봉ㆍ조동우ㆍ김찬ㆍ김약수ㆍ정운해 등 17명이 서울시내 아서원에서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강령은 ①일본 제국주의 통치의 완전한 타도 ②8시간 노동제 ③부녀의 정치ㆍ경제ㆍ사회적 권리의 평등 ④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⑤일체의 잡세 폐지 ⑥언론ㆍ집회ㆍ출판ㆍ결사의 자유 ⑦민족개량주의 등 기만 폭로 ⑧제국주의 약탈전쟁 반대 ⑨중국 노동혁명지지 ⑩타도 일본제국주의, 타도 일체 봉건세력, 조선민족해방 만세 등을 내걸었다. 

이를 전후하여 경성전차승무원 파업, 평양인쇄직공 파업, 평양양말직공 파업, 목포제유노동자 파업, 전남 암태도 소작쟁의 등의 투쟁이 잇따랐다. 민중에 의한 전국적인 그러나 산발적인 항일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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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국장 발인 모습(1926년 6월10일) 순종황제 국장 발인 모습(1926년 6월10일) ⓒ 이혜원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제는 한국 병탄 후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키고 이왕(李王)으로 격하시켰다. 총독부는 순종의 장례식을 6월 10일에 거행한다고 공표했다. 항일운동가들은 고종의 인산일을 3ㆍ1혁명의 계기로 삼았듯이, 순종의 인산일에 많은 사람이 서울에 집결할 때에 거사할 것을 준비하였다. 

사회주의계열의 권오설ㆍ김단야ㆍ이지탁과 인쇄직공 민창식ㆍ이용재, 연희전문의 이병립ㆍ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제국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의 박내원ㆍ권동진 등은 논의를 거듭하면서 6월 10일을 기해 전국적ㆍ전민중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권오설을 책임자로 하는 6ㆍ10만세운동투쟁지도위원회를 구성하고, 투쟁계획과 방법, 격문인쇄, 운동자금 등을 논의한 다음 ①사회주의ㆍ민족주의ㆍ종교계ㆍ청년계의 혁명분자들을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할 것 ②6월 10일 기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 ③ 시위방법으로 연도 시위대를 분산 배치하여 격고문과 전단을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지도부의 구성부터 쉽지 않았다. 더욱이 추진과정에서 중국지폐 위조사건과 『개벽』지 압수사건 등으로 정보가 누설됨으로써 일부 연루자들이 구속되면서 거사는 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생 박하균을 비롯하여 이병립ㆍ이병호ㆍ이천진ㆍ박두종 등 각 학교 학생들이 준비책임자로 선임되고, 이들은 서대문밖 솔밭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 30매를 만들고, 이병립이 기초한 "2천만 동포의 원수를 구축하라!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제작하였다.

학생들은 또 『시대일보』 배달원 김낙환과 함께 비밀리에 격문 1만 매를 인쇄하여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들도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ㆍ만세ㆍ조선독립만세!"라는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서울시내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1926년 6월 10일이 밝았다.
이날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5천여 명에 이르렀다. 일반 민중도 수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에는 30만 명의 애도민중이 상여가 통과하는 지역에 몰려나왔다고 보도했다.

3ㆍ1혁명과 같은 일이 재현될까 두려워한 일제는 당일 현장에 무장한 육해군 75,000여 명과 2,000여 명의 정사복 경찰을 동원하고, 인천과 부산에는 경계비대를 출동시키는 등 삼엄한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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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릉으로 향하는 순종의 국장행렬. 유릉으로 향하는 순종의 국장행렬. ⓒ 이혜원

순종의 상여가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5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문을 살포한 것을 계기로 관수교 근처에서는 연희전문대생들이, 을지로에서는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간부들이, 동대문 근처에서는 『시대일보』 배달원들이, 신설동 부근에서, 동묘 부근에서, 잇따라 학생들이 독립만세와 격문을 살포하고, 이에 민중들이 합세하면서 시가지는 기미년 3ㆍ1만세 시위와 같은 분위기가 재현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무장한 군대까지 동원하여 군중들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출동한 일경에 붙잡힌 학생이 서울에서 2,000여 명, 전국적으로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중 상당수가 제령(制令) 제7호와 출판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일제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에 총질을 하지 않은 것은 자칫 피를 보고 흥분한 민중들을 자극할까 두려워서였다. 또 구속자들을 조선치안유지법 등을 적용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서울의 6ㆍ10만세시위 운동이 알려지면서 고창ㆍ순창ㆍ청주ㆍ울산ㆍ군산ㆍ평양ㆍ홍성ㆍ공주 등지의 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나고, 이어서 당진ㆍ강경ㆍ진주ㆍ하동ㆍ이원 등으로 파급되었다.

6ㆍ10만세 운동은 순종의 죽음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지만, 3ㆍ1혁명 이래 민중의 심중에 흐르는 항일민족정신이 이를 계기로 분출한 것이다. 특히 기성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직접 지휘부에서 몸을 사린 데 비해 학생들이 전면에 나섬으로써 이후 학생운동의 동력이 되어, 3년 후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접목되었다. 

6ㆍ10만세 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폭력으로 곧 진압되고 말았지만,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1919년 3ㆍ1혁명에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촉매제 역할을 함으로써 결코 꺼지지 않는 항일민족운동사의 횃불이 되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6ㆍ10만세운동 준비과정에서 사회주의세력과 민족주의세력, 특히 천도교 구파세력의 연대는 이후 신간회운동의 태동으로 나타났다. 비롯 투쟁지도부가 거사 이전에 붕괴되고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의 전면적인 협력관계가 형성되지는 못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6ㆍ10만세운동은 향후 민족운동사에 큰 받침돌이 되었다. 

"학생층에서는 6ㆍ10운동의 준비 조직이 발각되지 않았다. 노출되지 않았던 준비조직을 인산 당일의 가두로 연결시켜 나감으로써 6ㆍ10운동의 추진주도력은 명실공히 학생이 담당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6ㆍ10운동은 어느 계층에만 국한된 항일의 표현이나 행동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사상을 학생의 힘으로 집약하여 대변한 학생주도의 민족항쟁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정세현, 『항일학생민족운동사』)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순종_인산일 #6.10만세운동 #권오설 #조선공산당 #신간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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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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