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두 개가 '성관계'라니... 법원이 내놓은 기이한 해석

[게릴라칼럼] 안희정 사건, 현행법으로도 처벌 가능하다 ②

등록 2018.09.26 12:05수정 2018.09.2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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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 선고공판 출석하는 안희정 정무비서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지난 8월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 유성호


내게 칼이 있다. 상대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나는 칼을 들이대며 위협하지 않았고, 그걸로 어떻게 하겠다며 협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칼의 용도를 잘 아는 상대에게 원하는 바를 '정중하게' 말했을 뿐이고, 그 결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하자. 

나는 범법행위를 저질렀고 처벌 받아야 할까? 내 행동이 어떤 죄에 해당하고,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될 지는 구체적 상황과 행적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무죄 판결이 내려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죄 선고의 이유가 '흉기는 존재했으나 사용되지는 않았다'라면 어떨까? 

칼을 꺼내 휘두르지 않아도 '소유'나 '존재' 만으로 상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 흉기는 이미 사용된 것이나 다름 없다. 다시 말해, '존재'와 '이용'은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배타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상대를 두렵게 만드는 지위나 권력, 즉 '위력'도 마찬가지다. 

안희정 재판에서 법원은 그의 지위와 권세가 추행죄에서 위력에 해당할 만한 것이라고 봤다.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지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 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점을 본다면 이는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죄에서 위력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위력은 지니고 있었으나 행사하지는 않았다'였다. 위력의 '존재'와 '행사'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위력은 퇴근할 때 사무실 책상에 두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위력에 스위치가 달려있어서 필요에 따라 '잠시 멈춤' 상태로 둘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이다. 

물론 상사가 하급자를 대상으로 성행위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위력에 의한 간음이나 성추행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판단 기준을 삼아야 할까?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판결은 합리적 기준에 도달했을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질문에 답해보려 한다. 

위력의 존재와 행사
 

법무부가 '성폭력 근절 포스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과 대상을 받은 작품들. 왼쪽 포스터는 '승진을 핑계로, 업무를 핑계로 직위를 남용하지는 않으셨나요?'라고 묻고 있고, 오른쪽 포스터는 '성폭력, 원인은 야한 옷이 아니라 가해자'라고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안희정 사건의 재판부는 위력의 합리적 해석을 제시하지 못했고, 재판중에는 피해자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느가를 따지기도 했다. ⓒ 법무부


상사가 위력을 행사한다는 건 무엇일까? 안희정 사건 재판부는 피고인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했어야 위력의 행사를 인정했을까? '내가 주지사로서 명하노니...'라고 말했어야 할까? 안희정은 늘 업무 지시 형태로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맥주,' '모기향', '내 담배 좀.' 조금이라도 답변이 늦어지면 "어허. 문자 안 보네"라는 꾸지람이 날아왔다. 피해자가 위력에 의한 성추행과 간음을 당했다고 진술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피해자의 주장에 따르면, 새벽에 맥주 심부름을 시킨 안희정은 숙소에 온 그를 안으며 '외로우니 안아달라'라고 수차례 말했다고 한다. 당황한 피해자는 당시 거절 의사를 표현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후 간음 사건이 발생했다. 법원은 이때조차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피고인이 행한 신체 접촉은 맥주를 들고 있는 피해자를 포옹한 행위뿐이고, 언어적으로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재판부가 피고인의 일방적인 성적 행동에 '뿐'이라는 조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껏해야 안으라고 지시한 것 '뿐'이고, 상대 의사를 무시하고 끌어안은 것 '뿐'인데, 겨우 이런 걸 가지고 권력 남용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근본적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깨닫게 된다. 

재판부는 법적 미비로 인해 피고인의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미비된 것은 자신들의 성인지감수성으로 보인다. 재판부의 젠더의식 부재는 판결문 곳곳에서 드러난다. 피고인의 상황은 적극 유리하게 해석하는 반면, 피해자의 상황은 가능한 한 불리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가 '성관계' 의미라는 재판부

피고인은 "자니"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피해자가 아니라고 답하자 "올래?"라고 물었다. 피해자는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주무시다 깼느냐'라고 말했고, 그는 "ㅇ"라는 자음 하나로 답했다. 

이에 대해 피해자는 "엥?"이라고 반문하는데, 표현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일 터이다. 이어 피고인은 ".."라는 기호를 보낸  뒤, 상대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재빨리 "담배"라고 덧붙인다. 

피해자가 "네. 담배"라고 답했고, 피고인은 다시 ".."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피해자는 "다른 건요"라는 말로, 담배 이외에 필요한 것은 없냐고 물었고, 피고인은 "없다"고 답했다. 피해자는 담배를 챙겨 피고인의 숙소로 갔고, 이후 간음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자는 증언에서 ".."라는 상사의 문자가 불쾌함이나 침묵을 표현한 것으로 느껴졌으며, 두려움과 압박감을 가지고 피고인의 방으로 갔노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피해자의 증언과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놨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보낸 '..'를 성행위를 원한다는 메시지로 해석했다. 담배를 달라는 지시를 하기 위해 '담배'와 같은 지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했는데, 반복해서 '..'라는 문자를 보낸 것은 성관계를 바란다는 뜻을 전한 것이며, 피해자가 이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성관계'를 암시했을 수 있는 문자를 받고도 왜 상사의 숙소를 갔느냐며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피해자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도 놀랍지만, 해석도 그에 못지 않게 놀랍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로서 보기에, 재판부는 문자메시지 교환이 소통행위라는 기본적인 전제조차 무시하고 있다. 

둘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면, 피해자가 '..'를 '성관계'의 의미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피해자는 오직 '담배' 같은 명시적 메시지에만 정확한 대답을 하고, 반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담배 이외에 필요한 것은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고, 피고인 또한 이 질문에 "없다"고 명확히 답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피해자가 느낀 바를 무시한 채, 점 두 개에서 '성관계'를 읽어내고 이것을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적용했다. 

시도때도 없이 담배 심부름 시키는 상사가 '권위적이지 않다?
 

안희정이 비서에게 보낸 문자들. 재판부는 피고인이 권위주의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사진은 '추적60분'이 방송한 내용의 캡처이미지. ⓒ KBS

피고인은 과거에 '담배'라는 지시를 내린 뒤 4분만에 '어허. 문자 안 보네'라고 짜증 섞인 독촉을 했다. 이때 피해자의 답변은 두 사람 관계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비서실장과 밖에 있어서요. ㅠ 들어가면 바로 담배 챙겨서 드릴게요."

담배는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원할 때 제 입에 물기만 하면 되는 물건이다. 그런데도 담배 생각이 날 때마다 비서에게 문자로 지시를 내리는 상사, 업무 때문에 담배 지시를 확인 못했다며 당황해 하는 하급자. 하지만 피고인에 대한 재판부의 평가는 이러했다. 

"권위적이라거나 관료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아니하고, 기본적으로 참모진과 소통하는 정치인으로서의 태도를 취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 해석에 매우 공을 들였다. 피해자의 메시지에 포함된 "ㅠ"에 그만큼 주목했다면 ".."를 상대의 '불쾌'나 '침묵'으로 느꼈다는 피해자의 진술을 그렇게 간단히 무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안희정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재판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번복했다. ⓒ 안희정 페이스북 갈무리

반면에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하고 유리한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간음행위 이후 피해자에게 말과 문자로 미안하다며 거듭 사과했다. 이는 피해자 진술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상황에 대해 놀라운 해석을 제시한다. 

"피고인이 피해자가에 '미안하다'라고 말하고 또한 문자메시지를 보낸 취지는, 피해자의 심정을 다독이고 무마하여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저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한편 도지사와 비서라는 지위와 20살 이상의 나이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 도덕적 죄책감에 따른 사과라고 볼 측면도 없지 않다."

다시 말해, 법에 저촉되는 행위에 대해 사과한 것이 아니라, 그저 도덕적 미안함을 표현한 뿐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도지사와 비서라는 지위' 때문에 사과했다면, 위력에 의한 행위였음을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피고인이 소셜미디어에 공개적으로 사과한 내용과도 일치한다. 

"무엇보다 저로 인해 고통을 받았을 김지은 씨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저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입니다."
  
'명시적 동의'가 '위력간음'의 기준
 

성범죄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지적하는 캘리포니아 법무부 웹사이트. 피해자에게 책임이 없다는 사실, 성폭력 생존자는 흔히 시간이 지난 뒤에 신고를 결심한다는 사실,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한 것을 합의로 간주해서는 안 된는다는 보편적 상식은 한국의 법원에서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 캘리포니아법무장관


재판부는 한술 더 떠 피해자를 비난하기까지 한다. 담배 지시를 받았더라도 문 밖에 놔두고 돌아왔으면 간음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호텔은 왜 따라갔느냐, 야한 옷은 왜 입었냐로 대표되는 전형적 '피해자 때리기' 담론이다. 법원의 이런 공감부재에 대해서 검사출신의 금태섭 의원이 <한겨레> 기고문에서 잘 꼬집었다. 

"짧지 않은 법조 경력으로 확신하건대, 출장 중에 부장판사가 호텔 방으로 담배를 가져다 달라고 했을 때 문 앞에 두고 갈 수 있는 강심장의 평판사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의 기사 <20년 퇴보해서 안희정 무죄 만든 사법부>에서 재판부가 '위력에 의한 간음'을 '강간'의 법리와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위력 간음은 강간으로 처벌할 수 없는, 지위와 권력을 이용한 성폭행을 처벌하기 위한 만들어진 법이다. 강간과 달리 폭행과 협박을 구성요소로 삼지 않으며, 따라서 법원이 강간의 판단기준으로 삼아온 '항거' 판례를 적용해서도 안된다. 

흉기를 든 사람 앞에서 저항하기 어렵듯, 생사여탈권을 쥔 상사 앞에서도 저항하기 어렵기 때문에 마련된 것이 '위력 간음' 조항이다. 실제로 많은 피해자들이 '피해가 두려워 억지로 응할 수 밖에 없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심지어 사건 후에 아무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상사를 대해야 하는 고통까지 강요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안희정 사건 재판부가 그랬듯, 사건 전후의 피해자 행적을 근거로 '애정'이나 '합의'를 유추해서는 안된다.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인 하급자에게 '단호한 거부'를 요구하는 것 또한 합리적일 수 없으며 입법 취지에도 어긋난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시적 동의'가 될 수밖에 없다. 하급자의 자발적이고 명백한 동의가 있어야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인정하는 것이다. 법원이 피해자의 침묵이나 소극적 거부를 이유로 가해자의 위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상대를 침묵시키고 의지를 꺾는 것이 권세의 힘, 즉 '위력'이기 때문이다. 

명시적 동의는 권력관계와 부의 편중이 심화되는 한국 사회에서 약자와 법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다.

[안희정 사건, 현행법으로도 처벌 가능하다]
① 치솟는 '위력 성폭력', 법원은 손을 놔버렸다
 
#안희정 #위력 #명시적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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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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