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짧은 머리, 자르는 데 '50분'... 깨달음 얻다

[24개월 병영 기록 ⑭] 갑질 근절의 시작점... 기다려 줄 땐 기다려주고 있는 그대로 봐주자

등록 2017.08.14 14:27수정 2017.08.1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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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국물 마시는 건 안 돼" 이런 군대 갑질도 있다]

시간에 비례해서 사람은 경험을 하고 생각이 누적된다. 그 생각엔 깨달음이 있다. 지금 소개한 일화는 어쩌면 병사 간의 갑질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2015년 10월의 가을이었다. 신병 티는 벗었지만 아직 일병이었다. 머리는 한껏 길어졌다. 평일엔 업무 탓에 이발을 할 시간이 없으니 인트라넷으로 이발을 미리 예약했다. 짧은 머리였지만 머리를 잘 자르고 싶은 심정이 있어서 상병인 고참 이발병을 예약했다.

이발 당일,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웬걸, 상병 대신 갓 일병을 단 신병이 왔다. 상병은 "오늘 이발은 제가 옆에서 코치하고 신병이 머리를 자르기로 했다"며 "양해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상병도 1년이 지나면 나갈 것이다. 후임에게 '비법' 전수를 위해선 교육이 필요할 터.

상병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얼떨결에 실험 대상이 됐다. 이발은 불안 불안했다. 고개를 숙여달라는 신병의 말에 푹 숙였지만 고개는 올라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목 주변을 깎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거다. 신병에게서 "이게 맞나, 저게 맞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신병의 긴장... 상병의 말 한마디

상병은 신병의 이런 모습을 계속 지켜보기만 했다. 사사건건 달려들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코치를 하지 않았다. 신병은 긴장한 듯 머리를 조금씩, 조금씩 자르고 또 잘랐다. 그러다가 유심히 앞거울을 보고 다시 머리를 잘라나갔다. 20분이면 자를 머리, 거의 50분이 다 돼서 잘랐다. 상병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렇게 자르면 군기 카드 끊길 수 있어. 더 잘라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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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서 찍은 내 짧았던 머리. ⓒ 고동완


부대가 위치한 비행단의 머리 단속은 엄격했다. 휴가를 나갈 때 머리로 걸리면 알짤없었다. 규정에 맞게 잘라야 문 밖을 나갈 수 있었다. 상병은 이를 지적한 것. 신병의 손놀림이 이어졌다. 신병은 심혈을 기울여 한 사람의 머리를 잘라줬다.

숙련도와 별개로 열정에 내심 감복했다. 불안했고 시간도 지체됐지만 한 머리에 기울이는 관심에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 머리를 숱하게 잘라왔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상병은 이제야 신병의 어깨를 다독이며 "이 정도면 됐다"고 말해줬다.

좀 기다려주면 안 되겠니

생활관에 들어서자 동기가 "여태 자른 머리 중 가장 낫다"며 호평을 해줬음은 물론이다. 머리를 잘라준 그 신병의 변화상이 자못 궁금해, 될 수 있으면 그 신병에게서 머리를 잘랐다. 예감대로 지나가는 시간에 따라 그 신병의 이발 기술은 발전을 거듭해 완성도에다 속도까지 겸하게 됐다.

대개 병사 간의 갑질과 강압은 신병일 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신병은 여러 부분에서 '어리버리'할 수밖에 없다. 기본적인 업무를 배워야 하고, 군대의 규율을 알아가야 하며, 선임의 눈치도 살펴야 한다. 신병이 처음부터 '빠릿빠릿' 하길 바라는데 앞서, 신병의 미숙함을 있는 그대로 봐주고 살펴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폭언과 같은 갑질이 싹트고 신병을 위축시킨다.

군에서 바라본 바로는, 신병이 처음엔 여러모로 미숙하더라도 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옆에서 알려주고 도와준다는 가정 하에 착실히 군 생활을 이어갔다. 갑질의 근절은 기다림과 인내에서 비롯된다. 후임이 일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고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면 이를 무턱대고 지적할 순 없는 일이다.

다양성에 대한 포용과 존중도 군 병폐를 근절하기 위한 전제 중 하나다. 사회가 획일화에서 개성화로 나아가고 있다지만, 다양한 군상이 어울려서 사는 군대는 정작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업무적인 부분과는 관계없이, 그 사람의 말투와 행색을 웃음거리로 삼으며 알게 모르게 지적을 일삼는 사례를 흔히 봐왔다.

개인의 맥락은 소거되고

예컨대, 이런 식이다. 경상도 태생의 청년이 자대에 왔는데 말투가 사투리에 딱딱함이 배어나왔다. 느낌상 부모의 강압에 의해 그러한 말투가 배양이 됐거나 말 못할 사정이 있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맥락은 군대에선 소거되는 경우가 흔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투를 하게 된 배경은 살피려하지 않은 채, 그저 웃음으로 이 상황을 소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군 교육도 형식적이었다. 그저 사례를 언급하며 갑질과 부조리를 일삼지 말라는 데 초점을 맞출 뿐, 그 원인에 대해선 잘 짚으려 하지 않았다. 정작 필요한 건 인내와 존중일 텐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후약방문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게 쉽고도 당연한 얘기라고? 실천은 말처럼 쉬운 게 아닐 테다. 군의 병폐가 여전히 사회에 스며들어 수직적 위계 질서와 갑질 논란과 같은 병리적인 현상을 낳고 있는 지금(병영 기록을 쓰게 된 배경이기도 하지만), 다시금 기본적인 덕목부터 새기고 살펴봐야 하지 않을런지.
#군대 #병사 #신병 #공군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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