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만 보면 흥분" 여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 산다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 내가 '성폭력 경험'을 기록하는 이유] 아직 극복 못한 경험도 많지만

등록 2016.05.21 11:51수정 2016.05.2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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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아저씨가 내 허리를 만졌다, 나는 욕을 해줬다>를 쓰며 기억을 더듬다가 미처 놓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잊을 뻔한 기억을 잡은 느낌이기도 하고, 잠깐 희미해질 정도로 이 모든 일이 '해프닝'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아 걱정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경험들의 경중을 따져가며 '다행히 이런 일이 두 번은 없었네'라고 위안삼아야 하는 것이 씁쓸하다.

"치마 입은 것을 보면 흥분된다"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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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두고 분하고 화났던 순간들. ⓒ pixabay


오래 전 아침 출근길이었고,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으로 웬 아저씨가 오더니 출근하냐면서 말을 걸었다. 좀 낯설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대화를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어색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대화를 거절할 '힘'이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짧은 몇 마디가 오간 뒤 남자가 "아가씨들이 치마를 입은 것을 보면 흥분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바로 정색을 하지도 못했고, 환하게 웃을 수도 없었다. 정색을 하거나 소리치는 돌출행동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과 응해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어정쩡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피하다가 뒤이어 온 버스에 탔다. 버스가 바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잘 모르겠다.

창문 밖을 보니 치마를 입은 어떤 언니가 보였다. 겨울이었다. 나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땐 신고할 생각을 못하고, 동네에 그 때 그 남자와 비슷한 인상착의를 한 사람이 보이면 피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짧은 대화였지만 정신적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 말만은 한 자 한 자 선명하게 귀에 남아 있다. 근처에는 중년 여성도 있었고 내 또래의 여성도 있었고, 다른 남성들도 있었다. 그 중 남자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버스가 출발한 뒤 정류장에 있던 여성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한 1년 전에 <아니타 힐>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주인공 아니타 힐은 상사이자 대법관 후보였던 클레런스 토마스의 성희롱을 폭로한다. 1991년의 미국 사회는 작품으로 잠시나마 느낀 것이지만 부정의를 폭로하는 여성에게 완고하고 방어적·보수적이었다. 멀고 먼 길을 돌아 현재의 아니타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 주는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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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니타힐 포스터 ⓒ 프리다 리 목


아니타 힐의 말을 듣고 있던 청중 한 명이, 정말 말 그대로 '엉엉', '꺼이꺼이' 울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정말 정말 힘드셨을것 같은데, 어떻게 견디셨나요?"


영화는 슬프다기보다는 권력을 고발하는 인상이 강한데, 왜 거기서 억눌린 게 터졌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눈물이 나와 주룩주룩 울었다. 다시 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찾아보는데 넷플릭스에도 스마트플릭스에도 없어서 안타깝다. 유튜브에 이와 관련한 1991년 당시 청문회를 누군가 업로드해놓긴 했다.

내가 겪은 성폭력들을 기록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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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10번 출구,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의 목소리 ⓒ 김예지


언젠가 나에게 특정한 의미를 남긴 사건들, 구체적으로는 내가 겪은 모든 성폭력을 기록하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시도라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진 모르겠다. 경험의 나열이 무력해 보여서 일수도 있고, 누군가의 눈에는 비슷비슷해 보일 것을 걱정한 것 같기도 하다. 소위 말하는 '주작'(조작)으로 비춰져서 상처 받을 것을 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런 경험에, 끝이 없다고 느낀 것 같기도 하다.

몇 년 전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나와 같은 시기 일을 시작한 남성이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으로 여성의 나체 사진을 설정해 둔 적이 있다. 사진은 얼마 안 가 사라졌지만, 점심 시간에 그 사람이 "술은 여자가 따라야지"라고 말하는 바람에 같이 먹던 언니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때 말을 못하고 자리만 뜬 것이 아직도 후회가 된다. 그는 또 다른 자리에서 비슷한 말을 할지도 모른다.

또 몇 년 전 카페에서 일할 땐, 같이 일하던 남성 연장자가 나에게 "왜 이렇게 옷을 야하게 입었어?"라는 말을 손님들이 있는 곳에서 서너 번 연속으로 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같이 일하던 점장 언니는 오후 출근이었고, 나는 그 남성과 다섯 시간을 함께 일했다. 언니가 출근하고, 나는 퇴근할 때가 되어서야 "아까 그 말을 왜 하신 거냐"고 따질 수 있었다.

남자는 농담이라고, 장난이라고 말했고 나는 사과를 요구했다. 구체적으로 '사과'라는 단어를 꺼내고 나서야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점장이라는 지위가 있는 그 언니가 없었다면 그렇게 요구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기억 저편에 또 다른 일들이 있다. 나를 볼 때마다 시시각각 '화장이 진하다', '다리가 두껍다' 등의 외모 지적을 하고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강간이나 성매매를 자랑스럽게 말하던 학교 남자들이 생각난다. 2호선 지하철 안에서 "갈보년들"이라고 외치던 남자도 생각난다. 술에 취해 옆자리 여성 얼굴과 핸드폰 화면을 뚫어지라 보던 아저씨도 생각나고, 지하철 옆 자리에서 내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긁 듯 만지고 모른 척하던 남자도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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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여행 간 곳의 휴대폰 대리점에서 나를 끌고 가려던 직원이, 내가 건조한 눈빛으로 손목을 내려다보자 '아차'하는 표정으로 손의 힘을 푼 일도 있었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보란 듯이 '여자애들이 멍청해서 이해를 못한다'고 외치던 아저씨, 역 입구에서 '와이프가 돈도 안 줘서 바람도 못 피운다'고 동료에게 하소연하던 남자, 여성의 뒷모습을 TV 보듯 손가락질하며 낄낄 웃던 세 명의 남성들, 바늘구멍에 실을 꿰 듯 뚫어지라 몸을 훑는 눈들.

문장으로 정리하기엔 아직 내가 극복 못한 일도 많다. 한심하게도, 용기가 부족해 오늘은 여기까지 적는다. 이제는 이런 기록을 '어리석은 시도'로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 경험의 집합을 곱씹어 보며 길에서 처음 보는 여성들의 귀갓길을 염려할 수 있다면, 그리 어리석지만은 않은 시도라고 믿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세고 싶은 경험들을 읽으면서 자꾸 아니타 힐에서 본 그 여성이 떠오른다.

"정말 정말 힘드셨을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견디셨나요?"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 #강남역 #여성혐오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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