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쓴 날 보고 놀라던 여자, 이젠 이해한다

[강남역 여성살인 사건- 남자가 말한다2] 남성이라 몰랐던 불안과 공포

등록 2016.05.20 12:48수정 2016.05.2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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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지난 17일, 서울 강남의 한 건물 화장실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한 30대 남성은 일면식도 없던 20대 여성을 수차례 흉기로 찔러 숨기게 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내용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나는 25살의 남자다. 이번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보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내 가족에 대한 걱정이었다. 저 여성이 동생이었다면, 어머니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나는 제정신으로 있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앉아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너는 남성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만 드는 거야."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성인 친구는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보고 공포심이 들었다고 했다. 평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는 몰카를 걱정해야 하고, 밤길에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기만 해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는데 이제는 화장실에서조차 목숨을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나도 두려운 것이 많다. 길에서 불량한 사람들을 만나 돈을 뺏길까 봐, 술 취한 사람들과 시비가 붙을까 봐 걱정한다. 하지만 길을 걸으면서 누군가에게 강간을 당할까 걱정한 적도, 공중화장실에서 몰카를 걱정한 적도,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걱정한 적도 없다. 무수히 많은 시간을 밤늦게 다니면서도 나는 안전하리라 믿었다.

어느 날이었다. 해가 지고 어둑해진 저녁에 혼자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덕을 올라오는 여성을 마주쳤다. 모자를 푹 눌러쓴 내 모습 때문일까. 그녀는 빠른 속도로 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거의 뛰는 모습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나쁜 짓을 할 마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해가 된다.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25년을 범죄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살아왔던 나와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긴 세월을 범죄의 대상이 될까 봐 걱정했을 그녀와 너무도 달랐다. 그녀'들'은 살아온 세월만큼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별다른 이유도 아니다. 단지 '여성'이었기에 많은 그녀들은 주위를 경계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남학생들이 여자 선생님의 치마 속을 찍으려 한다. 이것이 들키더라도 크게 처벌받지 않는 걸 아는 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그런 일을 반복한다. 또 어떤 학생은 성희롱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화내는 선생님의 반응을 보면서 더욱 즐긴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미생>에서도 나왔듯, 그녀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과 성희롱을 당한다. 몸매가 좋다느니, 치마가 짧다느니, 이래서 여자가 안 된다느니.

강력 범죄의 피해자의 80% 이상이 여성이라는 통계나, 가해자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통계를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된다. 남성이 느끼는 위험과 여성이 느끼는 위험은 그 무게감이 다르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같은 사건을 보고 여성들은 위협을 느끼고 목숨을 걱정하는 반면, 남성의 경우에는 주변의 여성을 먼저 걱정한다. 확실한 차이다.

비교적 안전하게 살아온 나, 그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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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지 이틀이 지난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 이번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은 단순 묻지마 살인사건이 아니다. 피해자가 건장한 남성이었다고 해도 과연 살인사건이 발생했을까? 아니다. 단지 피해자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모든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여성들은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에 걱정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부 커뮤니티와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누군가는 "치마를 입으니 그렇다", "여자가 밤에 다니지 그렇지", "메갈의 조작이다" 등의 여성 혐오 댓글을 단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마음 편히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여성이 아니며, 평범한 대한민국의 남성이다. 남자로서 내가 아무렇지 않았던 문제들은 여성들에게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불편했지만 크게 나서지 않았던 작은 차별, 여성 혐오가 쌓여 지금의 사건이 생겼다. 나는 남자였고, 여성의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여성 혐오를 내비치는 사람들에게 싸울 용기도 없었다. 결국, 한 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었다.

나는 이번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더욱 마음 아프다. 그렇기에 적극적으로 애도하고 강력히 여성 혐오와 싸우고 싶다. 여성 혐오를 마주 보고 바꾸려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하고 싶다. 나는 남자라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남역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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