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다

<김삿갓 시집> 서평

등록 2010.06.14 13:59수정 2010.06.14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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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 평안도 용강에서는 조선 조정의 지역차별에 격분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백성들의 지지를 업은 홍경래의 난은 짧은 기간 안에 평안도와 함경도를 점령해 갔다.

당시 함흥 선천방어사로 있던 김익순은 홍경래 군사들의 습격을 받고 민란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 일로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이 진압된 후 모반 대역죄로 사형을 당하게 되었고, 그의 아들 김안근은 자식들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했다.


김안근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그는 과거시험에서 김익순의 죄를 비난하는 글로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김익순이 자기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는 홀연히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게 된다.

요즘 막장 드라마의 단골소재가 출생의 비밀이라지만 이보다 더한 기막힌 사연이 있을까? 아니 어느 작가가 이보다 더 처절한 가족사를 쓸 수나 있을까? 이 기구한 가족사의 주인공이 바로 김삿갓으로 더 유명한 김병연이다. 그가 방랑생활 중에 삿갓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떠돌아다니는 내 삿갓 빈 배와 같아
한번 쓰니 어느덧 사십 평생일러라.
소 치는 더벅머리 목동 들로 갈 때 차림이고
갈매기 벗삼아 고기 잡는 늙은이 그대로일세.
취하면 벗어 나무에 걸고 꽃구경하고
흥 일면 손에 들고 누각에 올라 달구경이네.
속인의 의관이야 겉을 꾸민 것이지만
내 삿갓은 하늘 가득 비바람 몰아쳐도 홀로 근심 없다네.
- <김삿갓 시집>중에서

김삿갓, 그의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보았지만 그의 본명이 김병연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적을 뿐더러 그가 남긴 시들을 직접 읽어본 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범우사에서 펴낸 <김삿갓 시집>은 김삿갓이 한문의 음과 훈을 적절히 조화시켜 창작해 낸 그의 시들을 최대한 현대어로 번역해서 한글 세대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렇다면 김삿갓은 팔도를 유랑하면서 도대체 어떤 시들을 남겼기에 150년의 세월을 두고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일까?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아픈 가족사를 예술로 승화시키면서 그 중심에는 늘 백성들의 애환이 절절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민중시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생활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줘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은 갓을 쓰고, 지방 가득한 뱃살까지 늘어뜨린 석자 수염 만지작거리며 한가로이 풍류를 즐기던 역사 속 문인들과는 분명 달랐다.

네 성씨, 네 이름 나 모르고
어느 곳의 청산이 네 고향인고?
네 썩은 시체에 파리 꾀니 아침 해가 번거롭고
네 외로운 혼에 까마귀 울어대니 석양이 애도하네.
한 자 남짓 지팡이가 오직 네 유물이요
몇 되 남은 쌀이 구걸한 식량 전부일세.
앞 마을의 여러분께 이 한 가지 청하노니
흙 한 삼태기 가져다가 모진 풍상 막아주소.
- <김삿갓 시집> 중에서

당시 사대부 문인 누가 천박스럽게(?) 요강을 소재로 글을 쓸 생각을 했겠는가! 게다가 김삿갓은 당시 잘못된 풍습과 양반들의 위선에도 과감히 필력을 발휘했다. 시간이 흘러도 백성들이 그를 기억해주는 이유가 아닐까? <김삿갓 시집>을 읽다보면 왜 그를 설명할 때 풍자와 해학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을 등지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삶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문인으로서의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나서였을까? 그는 사물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흩날리는 눈송이는 춘삼월 나비요
밟히는 눈소리는 오뉴월 개구리로다.
추워서 못 가겠다 눈을 자꾸 핑계 대며
취하여 혹 머무를까고 다시 잔을 드누나.
- <김삿갓 시집> 중에서

모래 희고 갈매기 또한 희니
모래와 갈매길 어찌 분간하리오.
어부가 한 곡조 홀연히 퍼지니
모래는 모래, 갈매기는 갈매기 되누나.
- <김삿갓 시집> 중에서

또 김삿갓 시 중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소재로 금강산을 꼽을 수 있다. 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영산이요, 명산인가보다! '만일 금강산을 빼놓는다면 청산은 모두가 뼈만 남을 것'이라는 그의 표현에서 금강산의 숨막히는 절경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톰소여의 모험>의 저자 마크 트웨인은 고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전은 언젠가 읽어봤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이다.' 김삿갓 시의 참 맛은 직접 읽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는 무미하고 무취한 그냥 물일 뿐이다. 김삿갓 시를 읽을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이 물에서 달든 쓰든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에도 중복게재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제 블로그에도 중복게재되었습니다.

김삿갓 시집

김병연(김삿갓) 지음,
범우사, 1988


#김삿갓 #시 #고전 #고전 #마크 트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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