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은 올레꾼이자 시민운동가

[바이크올레꾼 길 따라 남도여행 18] 김삿갓 종명지 화순 동복 구암마을에서

등록 2010.02.18 18:14수정 2010.02.1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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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앞 망미대에 있는 김삿갓 이미지 ⓒ 서정일


본명이 김병연 혹은 김분을 김삿갓이라도 한다. 200여 년 전에 태어나 53년을 살다간 그는, 거처를 한곳에 정하지 않고 전국 팔도를 떠돌아 다녔다. 연대가 정확치는 않지만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김정호가 오로지 올바른 지도하나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돌아다녔던 점에 비하면 그의 '방랑생활'은 '방탕생활'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필자는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다소 이견은 있을 수 있지만 그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또한 어떤 형식으로든 남기고자 했으며 영향을 미치려 한 점은 오늘날로 해석하면 컨설팅이며 시민운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삿갓을 읊노라 - 난고 김병연

부평 같은 내 삿갓 빈 배와 같이 가벼워
한번 쓰기 시작 한 것이 사십 평생이 되어가는구려
더벅머리 소년이 들로 소치러 갈때 갖추는 가벼운 장비이고
고기 잡는 늙은이가 흰 갈매기와 짝할 때 써야 제격이라네.

술이 취하면 벗어 걸어놓고 꽃구경 하고
흥이 나면 벗어들고 누에 올라 달구경했네.
세상 사람들의 의관은 다 외부 장식물이지만
내 삿갓은 하늘에 풍우가 가득 몰아와도 나 홀로 근심이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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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종명지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 정씨 종가 사랑채 (최근 복원해 놓은 곳이다) ⓒ 서정일


김삿갓은 1807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출생했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인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로 있던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항복한 죄로 폐족이 됐으나 멸족만은 면했고 결국 상민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학문에 전념한 그는 20세 되던 해, 영월도호부 백일장에서 김익순을 통탄하는 글을 써 장원을 하였으나 그 후 자신이 지탄했던 김익순이 조부임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고 "조상에 지은 죄가 커서 하늘을 보기 두렵다"며 삿갓을 쓰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러던 중 44세 때인 1850년, 전라남도 화순군에 당도한 김삿갓은 압해정씨 창원군공 백인당파의 종가 사랑채에 기거하면서 빼어난 자연경관을 시에 담았는데 화순군 이서면의 물염적벽을 보고는 그 풍광이 중국의 적벽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이곳에 머물렀는데 그의 방랑생활 중에서 이토록 길게 머물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더구나 35년의 방랑생활 중 화순에서의 생활이 1/3을 넘길 정도로 긴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1863년 3월 29일, 57세의 나이로 생을 달리했고 사람들이 그를 마을 동편 동뫼에 초장을 했으나 3년 뒤 후손들이 강원도 영월군으로 이장해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이 마감을 내렸고 자신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화순과도 영원히 작별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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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종명지인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앞으로는 동복천이 흐른다.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망미대는 층층이 바위로 구성된 절벽형태로 절경이다. ⓒ 서정일


그럼 김삿갓이 생을 마감한 정확한 장소는 어딜까? 다름 아닌 그가 화순에 도착해 처음 거처를 정했던 정씨의 사랑채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무려 13년 동안이나 남의 집 사랑채를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화순 동복 구암마을과 김삿갓 사이엔 뭔가 특별함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이른다.

그 첫 번째는 그곳이 그의 생애 가장 편안한 곳으로, 구암마을 사람들은 가족과 같이 따뜻한 사람들로 느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즉, 잃고 싶지 않은 고향 같은 것으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고 싶었던...그렇지 않았다면 그저 보따리 하나만 짊어지면 나설 수 있는 길을 강산이 변해도 꼼짝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마지막 임종까지 그곳에서 맞이할 생각을 했을 리 없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그 반대라고도 생각된다. 오히려 김삿갓이 그들에게 편안하고 따뜻한 사람이었거나 그 마을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기에 길을 떠나지 못하도록 주민들이 그를 간곡히 붙잡아 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상일은 서로 뜻이 맞아야 하듯 아마도 둘 모두에 해당한다고 봐야 옳을 것 같다.

그렇다면 화순은 이름부터 화합하고 순응한다는 뜻이며 경치 또한 훌륭하고 곡식이 풍족해 인심이 넉넉한 구암마을이 김삿갓의 마음을 동하게 한 것은 분명하지만 주민들은 김삿갓의 어떤 점이 그토록 소중하고 또 필요로 했을까?

유추 해석해 보면 당연히 그가 세상을 보는 생각(시각)이 남다르고 특정 가치를 발견해 표현해 내는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눈과 가장 가까운 속눈썹은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남의 허물은 크게 보면서 자신의 티끌은 발견하지 못하는데 세상의 이치를 두루 섭렵한 외부인인 그가 화순과 동복 마을에 대해 색다른 생각(시각)으로 접근하고 그곳의 가치를 발견해 멋진 문장으로 표현해 내니 어찌 잡아두고자 하지 않았겠는가?

필자는 이런 김삿갓을 지금 표현을 빌어 '올레꾼이자 시민운동가'라고 칭하고 싶다. 진정한 올레꾼은 자신을 위해 걷지 않고 남을 위해 길을 나서고 진정한 시민운동가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고 만인에게 이득이 돌아 갈 수 있도록 베푸는 것이 정석이다. 필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바이크올레꾼 #화순군 #동복면 #구암마을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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