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이 학교를 조롱하는 세상

자존감 짓밟힌 교사와 황폐해져가는 학교

등록 2009.03.16 09:45수정 2009.03.1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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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진보를 대변해 온 촌철살인의 달변가인 한 연예인이 사교육 업체의 얼굴 마담을 자처하더니, 아예 어느 사교육 업체 사장은 아이들이 학교에 굳이 일주일 내내 다닐 필요가 있느냐는 '막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교육 업체가 영업 차원에서 규정한 '대한민국 학교 무용론'은 몇몇 유명 인사의 입을 거치면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누구나 수긍하는 현실이 돼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른바 교육 수준에 있어서 학교는 더 이상 학원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공인'입니다.

 

수능과 논술, 그리고 대학교육협의회에 의해 고삐가 풀렸으니 곧 이어 대학마다 본고사를 치르게 될 것이고, 이제 학원은 학교를 대체하고 보란 듯 군림할 날도 머지않아 보입니다. 교육의 질이 오로지 대학 입시의 결과에 의해 평가되는 현실이고 보면 끔찍하나마 상상으로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최소 몇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교사가 되었건만, 이제는 수업 능력이 퇴화되고 지적 능력이 모자란 사람들인 것처럼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나아가 아이들 앞에 선 교사로서 교육에 대한 열정이 있기는 하냐며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핀잔마저 듣는 처지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우리 교육의 질을 가늠할 수 있는 교사들의 수준을 두고 학원 강사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합니다. 실력이든 열정이든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감히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저곳 곁눈질 할 필요 없이 오로지 입시 하나에 목을 맨 학원처럼 문제 풀이 한 가지에 '올인'을 할 수 있는 조건이라면 교사들은 못할 것 같습니까?

 

여전히 한 학급 당 학생 수가 40명이 넘고, 규모가 작은 학교의 경우엔 한 교사가 두세 학년의 두세 과목 정도는 함께 가르쳐야 하며, 상급 관청에서 내려 보낸 공문 더미와 잡무에 치여 교과서 한 번 변변히 챙겨볼 시간이 없는 현실은 깡그리 무시한 그런 비교는 온당치 않습니다.

 

더욱이 교사들은 학원 강사들에 비해 적어도 같은 세대를 놓고 본다면 '교육적' 고민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신분 상 안정돼 있는 이유일 수도 있고, 하루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을 피곤에 찌든 쾡한 눈의 아이들과 보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에게 '왜 열심히 공부하지 않느냐'고, '참고 견뎌내라'고 채근하는 짓은 차마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 공부이고, 가장 듣기 싫은 것이 공부하라는 말이며, 가장 가기 싫은 곳이 학교와 학원이라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공부는 조금도 즐겁지 않은, 외려 괴로운 '노동'입니다. 순간순간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지는 못할지언정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식의 뻔한 거짓말은 못하겠습니다.

 

명문대 합격자 수와 대학 진학률 따위의 숫자 놀음이 학원과 학교마다 호들갑 떠는 '성과'일지언정 교육의 질 또는 수준과 등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좋든 싫든 그 '성과'를 위해 학원 강사 마냥 오늘도 내일도 문제집만 열심히 풀도록 강요 받는 그 스트레스는 교사의 자존감을 시나브로 무너뜨립니다.

 

몇백 명의 아이들 앞에 서서 교과목의 수업자로서, 또 그들을 위한 상담자로서 일해야 하고, 잡무는 또 그것대로 빈틈없이 해내야 하는 교사에게 '학원 강사만도 못하다'는 핀잔은 그래서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억대 연봉의 '스타 강사'야말로 교사들이 벤치마킹해야 할 역할 모델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 '교육'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가 싶기까지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습 학원'으로 불리며 공교육을 보완하고 기생하는 형태로 운영돼 왔다면, 이제는 몇몇 학원은 전국에 지점망을 갖춘 어엿한 대기업으로 성장했고, 사교육이 공교육을, 학원 강사가 교사를 조롱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현 정권의 교육 정책에 따라 입시가 대학들의 요구에 따라 '자율화'되면서부터 사교육 업체들이 '교육'을 참칭하고 나섰습니다. 지금껏 누구도 학교가 입시를 위한 준비 기관이 되어야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경쟁력 운운하면서 '수명이 다 되었다'며 학교를 들쑤셔댑니다.

 

지금 우리 교육이 과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학교의 경쟁력이 이미 바닥이라는 말 자체도 황당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공교육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교육청에서조차 서슴없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습니다. 언제부턴가 교육청이 공교육이 아닌, 사교육을 위한 기관으로 변해버렸다는 지적에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자정이 넘도록 학원과 독서실을 순례하는 아이들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조차 나약하거나 부질없는 것으로 치부될 만큼, 우리 교육은 이미 황막한 전쟁터가 돼 버렸습니다. 현재 중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에서조차 전국 단위 일제고사를 대비하기 위한 정기 시험의 실시 여부가 논의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험이 늘어난다고 실력이 향상되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에게 성적에 대한 부담을 끊임없이 안기면서 경쟁을 유도하는 네거티브한 방식이 변변한 토론 한 번 거치지 않은 채 부활하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의 성적에 따른 우열반 편성은 이미 문제 제기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보편화된 지 오래고, 초등학생들에게마저 커닝 못하도록 책상 가운데 칸막이를 세워야 한다는 것부터 배우는 등 그야말로 '막 나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지난 해 말에 치렀던 학업성취도 평가를 재채점해야 한다면서 전국의 모든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성적 조작 사례를 샅샅이 찾아내겠다는 것이었지만, 그렇잖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학년 초에 적잖은 일거리를 교사들의 어깨위에 덜컥 얹어놓은 셈이었습니다.

 

재채점 요구는 모든 교사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정부 차원의 선언이었고,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외려 더 키우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재채점을 하는 교사도, 점검 나온 장학사도 대체 이걸 왜 다시 하는지 모르겠다며, 일제고사의 폐해에 따른 책임을 일선 학교 현장에 떠넘기려는 것이라고 발끈했습니다.

 

더욱 당혹스러웠던 건 채점을 다시 해서 보고를 하되 이웃한 학교끼리 답안지를 바꾸는, 이른바 '교차 채점'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교육청 입장에서 보면, 추가 비용 들이지 않고 주변 학교끼리 서로 견제하고 점수 경쟁을 유도하려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공교육을 책임져야 할 교육청이 학교와 교사들에게 외려 신뢰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셈이니,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스스로 조장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고한 학벌 구조는 손도 못 대는 상황에서, 교육의 본질이 사교육 업체들이 조장한 여론에 휘둘리고, 학교는 입시 경쟁력이 낮다고 학부모들에게 치도곤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육청마저 그 분위기에 굴복해 교사들을 욕보이며 공교육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으니 우리 교육은 어느덧 '막장'이 돼가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2009.03.16 09:45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공교육 붕괴 #일제고사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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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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