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3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날부터인가 그분이 전에 없이 나에게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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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20대 때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PD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우직하고 곰처럼 듬직하던 한 PD는 동료는 물론 작가들 사이에서도 꽤 신망이 두터운 편이었다. 나를 비롯해서 어울리던 다른 작가들도 그 PD를 따르며 종종 어울렸는데, 하루는 친구가 울면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 PD가 친구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이야기였다.
여느 때처럼 여러 명이 술을 함께 마시고 나서 집에 갈 때, 그 PD가 친구를 집에 데려다 준다면서 택시에 태웠다고 한다. 그리고 간 곳은 여관.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도무지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아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빌었더니 그제야 정신차리고 풀어주었단다. 믿었던 사람에게 갑자기 성폭행을 당할 뻔 했던 친구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한 채 혼자 꿍꿍 앓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나도 함께 분노하고 우는 것 외에는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물 네 살의 비정규직 막내 작가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었다. 계속 일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친구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덮어버리는 것은 심지가 완전히 소화되지 않은 다이너마이트를 갖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또 그러면 어떡하지?" 친구와 나, 똑같은 마음이 동시에 튀어나왔다. 결국 친구는 그날의 사건을 덮어버렸지만, 그 일 이후 오래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30대 때였다. 일하던 잡지사의 사장님은 50대의 나이에 비해 열려 있고 젠틀한 분이었다. 외부적으로도 나름 존경받는 인사였고 사내에서도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3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날부터인가 그분이 전에 없이 나에게 스킨십을 하기 시작했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내가 너무 민감한 건가?' 싶어서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스킨십의 강도가 세지기 시작했고, 곤혹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나름 방법을 강구했다. 사장님 방에 들어갈 때 문을 열어놓은 채 들어가 봤지만 소용없었다. 사장님이 일어나서 방문을 닫고는 자리로 돌아오면서 내 등을 쓰다듬는데 온 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내가 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밤잠을 설치며 고민을 거듭했다. 정색하고 말했다가 밉보여서 잘릴까봐 겁이 났고,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기에는 오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불쾌감과 수치심 때문에 괴로웠다. 회사에 가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결국 사표를 쓰기로 마음먹고 마지막 방법으로 사장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사장님, 요즘 저를 격려해 주시고 싶은 마음에서 스킨십을 자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장님의 마음을 오해하고 싶진 않은데, 그런 스킨십이 계속 되면 제 마음이 불편해질 것 같습니다. 만약 저를 격려해 주고 싶으시다면 가볍게 어깨만 두들기시거나 수고한다고 말씀으로 격려해주세요. 그러면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사장님은 내 말을 알아들었고, 그날 이후 더 이상 불미스러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나마 사장님이 그 선에서 멈춰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누군가는 내가 점잖게 잘 대처했다고 하지만, 사실 난 그때를 생각하면 좀 부끄럽다. 왜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의 마음이 상할 것을 헤아리면서 좋은 말로 타일렀나 싶어서. 내 몸에 손을 대는 행위에 정색하며 단호하게 거부의 의사를 밝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당신들은 절대 모른다